1912년의 강서구 외발산동, 시간의 한 줌을 열다
- 서울 HI
- 7월 3일
- 2분 분량
1912년의 외발산동, 시간의 한 줌을 열다

🌾 1. 기억 저편의 외발산동, 그 너른 품
1912년의 외발산동은 약 226만 제곱미터의 땅 위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은 논이었고, 논 사이로 밭과 임야가 어우러졌으며, 대지와 잡종지도 드문드문 스며들었죠.
2. 논, 삶의 근간이었던 땅
전체 면적의 약 절반을 차지하던 논은 총 225필지, 1,245,698㎡에 달했습니다. 흙내음 짙은 논밭이 들녘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은 이 땅 위에 계절마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3. 집터와 마을의 윤곽
논과 밭 사이로 사람들의 삶이 녹아들었죠. 32필지, 26,155㎡의 대지는 날마다 불빛이 켜지던 집터였습니다. 이곳에서 가족이 모여 함께 밥을 짓고, 대지 위에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4. 숨결을 머금은 숲, 임야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던 외발산동의 뒷산에는 8필지, 17,745㎡의 임야가 자리했어요. 숲속에는 다양한 생명들이 숨 쉬었고, 사람들은 임야에서 나무를 베며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도 했습니다.
5. 다양한 얼굴의 땅, 잡종지
잡종지는 3필지, 15,368㎡로 적었지만, 이 땅은 작은 상점이나 마을 대문 앞, 공공의 공간처럼 다채로운 역할을 했을 것 같습니다.
6. 밭, 손끝으로 일궈낸 풍년
논에 이어 밭은 131필지, 372,064㎡로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계절마다 채소와 곡물들이 자라나며, 삶을 위한 작은 전쟁처럼 고된 농삿일이 이어졌죠.
7. 땅을 가진 사람들, 성씨로 본 공동체
외발산동을 가꾸던 사람들은 주로 네 성씨로 나뉘었습니다:
최씨: 193필지
이씨: 38필지
김씨: 24필지
박씨: 11필지
이들은 이 땅을 일구며 마을의 중심을 이루었고, 외발산동의 기억은 이들의 땀과 숨결로 채워졌습니다.
8. 국가의 손길, 국유지
한편, 99필지는 국유지였습니다. 공공의 땅으로서 마을 주민들에게 함께 사용되는 공간이었을 테고, 관리와 책임을 국가가 나눠 지던 땅이었겠지요.
왜 지금 ‘문화재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중요한가?
1912년 외발산동의 토지 구조에도 문화재를 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당시 마을 중심의 대지 위, 산과 들의 경계에는 옛 유물이나 유적이 스며 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지표조사는 땅 위에 노출된 유구나 유물이 있는지, 마을의 자취가 남아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확인합니다.
시굴조사, 표본조사는 땅속의 흔적을 일부 파내어 유물의 존재를 미리 가늠하는 단계입니다.
최종적으로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역사 앞에 조심스레 땅을 열어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굴하죠.
이 모든 과정이 영상처럼 마을의 기억을 되살리고, 우리 시대에 맞게 보존하고 재해석하는 길입니다.
살아 숨쉬는 이야기: 성공 사례
서울 강동구 한 도심 재개발지에서도 문화재지표조사를 먼저 요청한 뒤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시대 가옥터와 조선시대 도자기, 옛 생활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도시재생의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사례는 외발산동처럼 도심 속 잠든 마을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외발산동, 다시 쓰는 이야기
1912년의 외발산동은 단순한 농촌이 아니었습니다. 논·밭·임야·대지·잡종지… 이 땅은 다양한 얼굴로 사람들을 품었습니다.
최·이·김·박 성씨의 삶의 흔적, 국유지의 관리, 계절마다 변하는 농사…
이 모두가 역사이고 문화유산의 씨앗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씨앗을 다시 들춰보며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지표조사를 통해 땅 위의 흔적을 기록하고, 시굴·발굴조사를 통해 땅속의 이야기를 꺼내면,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 외발산동의 삶과 문명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당신이 외발산동에서 표본조사, 시굴조사, 또는 발굴조사를 의뢰하고 싶은가요?
오래된 한 조각의 유물, 땅속 깊은 기억까지도 전문 기관을 통해 정밀히 분석·보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땅의 이야기, 우리가 함께 이어갈 수 있습니다.
출처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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