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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석촌동은 100년 전 어떤 모습이었을까?

  • 2025년 5월 14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석촌호수 아래 잠든 100년 전 기억 — 1912년 석촌동, 땅이 말하는 역사


목차

  1.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 100년 전엔 무엇이었을까

  2. 수치로 읽는 1912년 석촌동 — 문화재 지표 조사가 밝혀낸 땅의 기억

  3. 드넓은 밭과 황금 논 — 농사가 삶의 전부였던 시절

  4. 초가집과 장독대 — 석촌동 사람들의 하루

  5. 산이 품은 마을 — 자연과 함께 살던 사람들

  6. 땅에 새겨진 성씨의 흔적 — 누가 이곳의 주인이었나

  7. 빼앗긴 들, 빼앗긴 기억 —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국유지의 그늘

  8. 석촌동이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말



  1.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 100년 전엔 무엇이었을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석촌호수 주변을 걷고 있다면 멈춰서 한번만 발아래 땅을 봐주세요.

카페 테라스에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이 자리, 송리단길 골목골목을 누비는 이 공간, 석촌호수 벤치에 앉아 오리를 바라보는 이 한갓진 오후. 사실 이 모든 풍경의 밑바닥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잠들어 있습니다. 바로 1912년의 석촌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라고 하면 교과서 속 딱딱한 활자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땅은 다릅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땅은 그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 땀 냄새, 웃음소리, 그리고 때로는 눈물까지 고스란히 품고 기억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인 seoulheritage.org가 1912년 토지조사부를 기반으로 진행한 문화재 지표 조사와 기초 조사는 바로 이 '땅의 기억'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입니다.

오늘 저는 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여러분을 100년 전 석촌동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지금부터 시간 여행을 시작합니다.


  1. 수치로 읽는 1912년 석촌동 — 문화재 지표 조사가 밝혀낸 땅의 기억


숫자는 때로 어떤 서사보다 강렬합니다. seoulheritage.org의 문화재 발굴 조사 및 지표 조사 자료에 따르면, 1912년 당시 송파구 석촌동은 총 107필지, 약 529,675㎡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넓은 규모냐면, 지금 석촌호수 면적(약 21만 ㎡)의 두 배를 훌쩍 넘는 크기입니다.



이 방대한 땅은 용도에 따라 뚜렷하게 나뉘어 있었어요.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것은 단연 밭(전田)이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72%가 밭으로 사용되었고, 논(답畓)이 약 5.5%인 82,397㎡, 산림(임야)이 약 17%인 89,302㎡로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실제로 집을 짓고 살던 대지는 고작 전체 면적의 3.5%인 54,882㎡, 76필지에 불과했습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건 하나입니다. 1912년의 석촌동은 '농업 공동체'였다는 것. 지금처럼 소비와 유흥의 거리가 아니라, 땅을 일구고 하늘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었습니다.

문화재 지표 조사는 이런 수치를 단순히 집계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각 필지의 소유관계, 토지 이용 방식, 그리고 그 위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작업입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100년 전 서울 지도와 기록을 통해 잊혀진 역사를 되짚는다는 철학은 바로 이런 세밀한 지표 조사에서 출발합니다.


  1. 드넓은 밭과 황금 논 — 농사가 삶의 전부였던 시절



봄이 되면 석촌동 사람들은 일찍 일어났습니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쟁기를 끌고 밭으로 나갔어요. 그들이 심었던 것들 — 콩, 옥수수, 밀, 참깨 — 은 단순한 작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해 겨울을 버텨낼 식량이자,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정이었고, 아이들을 키워낼 생명줄이었습니다.

밭 하나, 필지 하나가 한 가족의 생사를 쥐고 있는 세상. 그래서 석촌동 사람들은 흙을 대할 때 경건했습니다. 씨앗을 심을 때도, 잡초를 뽑을 때도, 수확을 거둘 때도 — 모든 순간이 삶의 기도였습니다.

논 풍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2필지, 82,397㎡의 논에서는 가을이 되면 황금빛 물결이 일렁였습니다. 벼가 익어가는 냄새, 물이 가득한 논에 비친 하늘, 이웃들이 서로 품앗이로 함께 추수하는 풍경은 지금 우리 눈에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현실이자 일상의 전부였습니다.

문화재 발굴 조사와 지표 조사를 통해 이런 농경지의 위치와 규모가 하나씩 복원될 때마다,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았던 무명의 사람들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됩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흙이 된 그들의 삶이 조사를 통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1. 초가집과 장독대 — 석촌동 사람들의 하루



76필지, 54,882㎡의 대지 위에 석촌동 사람들의 삶이 펼쳐졌습니다. 지금처럼 콘크리트 빌딩이나 대형 아파트 단지는 없었습니다. 대신 볏짚을 엮어 올린 초가지붕, 바람을 막아주는 흙담, 마당 한켠에 자리 잡은 항아리들이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안방에서 밥 짓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올랐습니다. 마당에서는 닭이 모이를 쪼고, 강아지가 아이들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장독대에는 된장, 간장, 고추장이 담긴 항아리들이 줄지어 서서 그 집의 역사를 증언했습니다. 손으로 빚은 항아리 하나에 몇 년의 세월이 담겨 있었는지.

여기서 중요한 성공 사례를 하나 소개할게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1912년 종로구 훈정동 지역을 대상으로 진행한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단순한 토지대장 분석을 넘어 당시 주거 형태와 생활 방식까지 복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사지(社寺地, 사찰 및 사당 부지)의 위치를 특정하고, 그 주변의 주거 필지 분포를 분석함으로써 마을의 공간 구조를 3차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이 방법론은 현재 석촌동을 비롯한 다른 서울 지역의 문화재 발굴 기초 조사에도 적극 적용되고 있습니다.

석촌동의 작은 초가집 하나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역사의 단위로서 조사되고 기록된다는 사실 — 그 무게가 느껴지시나요.


  1. 산이 품은 마을 — 자연과 함께 살던 사람들


15필지, 89,302㎡. 1912년 석촌동을 감싸고 있던 산의 규모입니다. 지금의 도시화된 송파구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이 산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봄이면 산나물을 캐러 올라갔고, 여름이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으며, 가을이면 낙엽을 긁어 땔감을 마련했습니다. 산은 약초를 품고 있었고, 귀한 나무를 제공했으며, 무엇보다 마을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자연의 울타리였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뒤에 산을 두고 앞에 물을 마주하는 '배산임수'의 지형은 마을 입지의 이상형이었습니다. 석촌동의 산은 단지 나무가 자라는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정신적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마을 제사를 올리고, 조상의 묘를 모시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던 공간.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임야 지역은 특히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지하에 고분이나 유구(遺構)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울 곳곳에서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도심 개발 전 시굴 조사와 표본 조사를 진행하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들을 발견하는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석촌동의 임야 역시 그 잠재성을 품고 있는 공간입니다.


  1. 땅에 새겨진 성씨의 흔적 — 누가 이곳의 주인이었나



1912년 석촌동에는 여러 가문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그 분포를 보면 마을의 권력 지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씨 가문이 27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뒤를 김씨 25필지, 염씨 15필지, 한씨 12필지가 따랐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토지 소유 통계가 아닙니다. 각 성씨가 대대로 일군 삶의 역사입니다. 이씨 집성촌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 김씨 문중의 제사당이 어느 필지에 있었는지, 염씨 가문의 농지가 어떤 방향으로 뻗어있었는지 — 이 모든 것이 문화재 지표 조사와 기초 조사를 통해 조금씩 복원됩니다.

성씨들이 한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는 '집성촌' 문화는 조선시대 마을 공동체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의 제사를 함께 지내고, 흉년이 들면 서로 나누고, 외부의 위협에 함께 맞섰습니다. 석촌동의 이씨, 김씨, 염씨, 한씨는 단순히 같은 동네 이웃이 아니라 '운명 공동체'였던 셈입니다.

그 공동체의 기억이 100년이 지난 지금, 문화재 발굴 기관의 조사 보고서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숫자와 기록 속에서 다시 존재를 주장하는 순간 — 그것이 바로 역사 조사의 힘입니다.


  1. 빼앗긴 들, 빼앗긴 기억 —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국유지의 그늘


이 이야기에서 가장 무거운 챕터입니다. 지금까지 아름답고 소박했던 석촌동의 풍경 뒤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1912년 석촌동에는 30필지의 국유지와 44필지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가 존재했습니다. 합치면 74필지입니다. 전체 107필지 중 무려 69%에 달하는 토지가 조선인이 아닌 일제와 그 앞잡이 기관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그 이름을 들으면 지금도 서늘함이 느껴집니다.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세운 이 회사는, 법적인 외양을 갖추고서 조선 농민들의 땅을 합법적으로 빼앗았습니다. 석촌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갈던 밭, 할머니가 지키던 논, 아이들이 뛰놀던 마당이 어느 날 갑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로 기록되었습니다.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흘러들거나, 혹은 그 땅에 붙어 더 가혹한 조건으로 농사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땅이 없는 사람은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던 시대였습니다. 토지 수탈은 단순한 재산 침해가 아니라,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폭력이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의 문화재 지표 조사와 발굴 기초 조사는 이런 역사적 사실도 기록합니다. 아름다운 유물만이 역사가 아닙니다.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 지워진 기억들, 그 아픔의 흔적도 발굴되어야 할 유산입니다. 땅이 기억하는 것을,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1. 석촌동이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말


오늘의 석촌호수는 아름답습니다. 봄이면 벚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물들고, 겨울이면 은빛 물결이 일렁입니다. 주말이면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걷고, 아이들이 오리를 쫓으며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 이제 여러분도 알게 되었습니다.

100년 전 이곳에서 밭을 일구던 이씨 가문의 어르신, 이웃집 김씨 아주머니와 함께 벼를 베던 여인, 산에서 나무를 해오던 소년,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논이 남의 이름으로 등기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 윗세대의 이야기입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진행하는 지표 조사, 시굴 조사, 표본 조사, 발굴 조사는 단지 땅속의 유물을 꺼내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잊혀진 사람들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이고, 지워진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석촌호수를 다시 걸을 기회가 생기면, 딱 한 번만 멈춰 서 주세요. 발아래 땅을 한번 내려다보고, 조용히 속으로 물어봐 주세요.

"100년 전, 여기서 당신은 어떻게 살았나요?"

그 질문 하나가, 역사를 살아있게 합니다. 그 질문 하나가,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 하나가, 땅 아래 잠든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것입니다.

땅은 기억합니다. 언제나.

이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가까운 사람에게 공유해주세요. 우리 주변의 평범한 땅이 얼마나 비범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함께 알아갈수록 세상은 더 풍요로워집니다. 문화재 지표 조사, 문화재 발굴, 서울 역사 탐방에 관심 있는 분들은 seoulheritage.org를 방문해보세요. 100년 전 서울의 기록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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