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 망우리의 땅이 들려주는 1912년의 기억 – 잊혀진 중랑의 유산을 찾아서
- 서울 HI
- 11월 9일
- 3분 분량
목차
서문 – “망우리, 이름 속에 숨어 있는 시간의 무게”
논과 밭이 만든 삶의 풍경
1912년 망우동의 사람들, 성씨로 보는 마을 구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와 국유지의 확장
묘역과 산이 말해주는 유적발굴의 단서
문화재발굴의 현재, 그리고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의 역할
에필로그 – 오늘의 도시 속에 살아 있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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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망우리, 이름 속에 숨어 있는 시간의 무게”
커다란 글씨로 새겨진 이름, ‘망우리(忘憂里)’. 근심을 잊는 마을이라는 뜻의 이곳은 지금의 중랑구 망우동이다.
하지만 1912년, 이곳은 단순한 동네가 아니었다.
논과 밭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그 사이를 따라 물길이 흘렀던 이 땅은 수백 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식민의 흔적이 얽혀 있는 거대한 ‘지표’였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틀 속에서 잊혀가던 이 땅은, 오늘날 문화재발굴과 유적발굴단의 손끝을 통해 다시 깨어나고 있다.
한 삽의 흙을 젖히면 나오는 조선의 도자기 파편, 돌담의 흔적, 그리고 이름 모를 조상의 묘비 하나.
그 모든 것은 “서울의 망우동”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유물발굴작업의 시작점이다.

논과 밭이 만든 삶의 풍경
1912년 망우동은 555필지 1,437,196㎡의 면적을 가진 큰 마을이었다.
그중에서도 논 191필지 792,872㎡, 밭 301필지 493,575㎡가 이 마을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것은 단순한 농경지의 수치가 아니다.
이곳은 한양의 동쪽 끝자락에서 쌀과 보리를 키우며 서울로 물자를 공급하던 중요한 농업 지대였다.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논을 적셨고, 그 곁에는 흙벽돌로 지은 초가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지금의 중랑천 인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탄한 지형은 바로 그때부터 삶의 터전이었다.
1912년의 망우동은 아직 도시가 아니었다.
그곳은 흙먼지를 밟으며 하루를 살아내던 선조들의 유적발굴 현장 같은 삶의 기록이었다.

1912년 망우동의 사람들, 성씨로 보는 마을 구조
이 마을의 주인공은 ‘정씨’였다.
1912년 당시 망우동에는 정씨가 127필지, 김씨 74필지, 윤씨 42필지, 신씨 39필지, 이씨 36필지, 박씨 26필지, 최씨 26필지, 장씨 18필지, 남씨 11필지, 지씨 10필지가 살았다.
성씨 분포는 단순한 인구 통계가 아니다.
이것은 지표조사에서 지역의 공동체 구조를 읽어내는 핵심 단서다.
특정 성씨가 집중된 지역은 혈연 중심의 집성촌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런 마을에서는 조상의 묘역, 재실, 제단 등 유적발굴조사원들이 반드시 찾아야 할 문화재적 가치가 숨어 있다.
정씨가 지배했던 망우동은 ‘정씨골’이라 불렸고, 마을의 중심에는 재실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주변의 밭과 논은 대대로 같은 가문이 경작하며 전통을 이어갔다.
이런 구조는 오늘날 문화재발굴과정에서 망우리 묘역의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와 국유지의 확장
그러나 1912년의 망우동은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조선총독부 산하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가 이 지역의 토지를 대거 사들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47필지가 동척의 소유로 넘어갔다.
동척은 일본인 이민과 농업개발을 명분으로 조선의 땅을 헐값에 매입했다.
망우동의 비옥한 논과 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세운 창고와 관리소 주변에서는 농민들의 이주가 이어졌고, 그 자리에 일제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오늘날 발굴조사원들이 땅속에서 찾아낸 벽돌 잔해와 일본제 도자기 파편은 바로 이 시기의 흔적이다.
당시 망우동에는 국유지 28필지, 공유지 1필지, 마을 소유지 3필지, 그리고 법인 소유지 1필지가 있었다.
이 수치는 식민통치가 진행되면서 토지 소유권이 공공과 제국의 손으로 옮겨가던 시대적 흐름을 보여준다.

묘역과 산이 말해주는 유적발굴의 단서
망우리라는 이름에서 ‘망(忘)’은 잊는다는 뜻이지만, 이 땅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장소다.
지금도 망우리공원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 오래된 묘역의 흔적은 이미 1912년 토지대장에서 시작된다.
그때의 기록에는 1필지 446㎡의 분묘지와 13필지 111,233㎡의 임야가 존재했다.
이는 지금의 망우리공원과 이어지는 유적발굴단의 조사 구간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당시의 묘역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조선 후기 묘제와 석물, 봉분 구조를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지금도 발굴조사원들이 사용하는 문화재발굴조사장비는 GPS 기반 정밀측량기와 지하탐사레이더로 발전했지만,
그 뿌리는 바로 1912년의 ‘망우리 묘역’에서 출발했다.

문화재발굴의 현재, 그리고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의 역할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는 단순히 과거를 캐내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도시 개발 속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이 땅이 어떤 기억을 품고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망우동 일대는 현재도 도로 확장, 주거지 개발, 공원 정비 등의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때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시굴조사와 표본조사를 병행하며, 문화재 훼손 가능성을 최소화한다.
때로는 도자기 조각 하나, 나무 말뚝 하나가 도시 설계도를 바꾼다.
이런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서사처럼 흘러간다.
삽을 드는 순간 시작되는 긴장감, 그리고 한 조각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낼 때의 전율.
이것이 바로 유물발굴작업의 진짜 매력이다.
서울의 발전과 보존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세심한 문화재발굴과정 덕분이다.
에필로그 – 오늘의 도시 속에 살아 있는 과거
오늘 우리는 망우리묘지공원에서 故 윤동주 시인의 묘를 참배하며, 그가 썼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가 묻혀 있는 이곳의 땅 아래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수많은 선조들의 삶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들의 흔적은 1912년의 토지대장 속 숫자에서, 발굴현장의 흙냄새 속에서, 그리고 오늘의 우리 눈앞에서 되살아난다.
서울의 문화재발굴은 과거를 캐내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망우리의 흙 아래 숨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그 기억을 서울의 미래로 이어가는 것.
그 길의 맨 앞에는 언제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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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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