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랑구 중화동 토지의 진짜 얼굴, 잊힌 땅의 기록을 다시 꺼내보다
- 서울 HI
- 12월 1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12월 2일
목차
1장 중화동의 오래된 지도를 펼치는 순간
2장 429필지의 땅이 들려주는 1912년의 구조
3장 논과 밭, 집과 산이 만들어낸 중화동의 풍경
4장 성씨별 토지 소유 분석, 누가 이 마을을 이루었나
5장 동양척식·마을·법인 소유의 토지까지… 보이지 않던 권력의 흔적
6장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7장 성공 사례와 함께 보는 발굴의 가치
8장 끝까지 읽는 사람에게 보내는 작은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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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땅의 기록을 다시 꺼내는 일은, 결국 우리 삶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더라.
중랑구 중화동의 1912년 토지 기록을 펼치는 순간, 오래된 지도 속에 잠들어 있던 시간이 갑자기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빽빽한 아파트와 도로, 상가로 가득 찬 지역이지만 100년 전 이곳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은 마치 문화재발굴 현장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긴장감마저 있었다.
지표조사 한 번이면 금방 끝날 것 같은 자료 같지만, 들여다보는 순간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고, 발굴조사원들이 왜 수많은 시간과 장비를 들여 유물발굴과 유적발굴을 반복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1장 중화동의 오래된 지도를 펼치는 순간
1912년, 중랑구 중화동의 땅은 총 429필지 1,179,268㎡였다.
지금의 중화·묵동 일대를 떠올리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이곳은 농경지와 임야가 중심이었던 작은 자연마을이었다.
바람의 결이 다르고 흙 냄새가 더 진했을 그 시절의 풍경이 숫자들 사이에 고스란히 숨어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느꼈던 건, 단순히 ‘몇 필지였는가’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토지 구조가 공동체를 이루었는지, 그 흐름을 읽는 일이었다.
2장 429필지의 땅이 들려주는 1912년의 구조
이제 하나씩 들어가보자.
숫자가 말하는 건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그 시절 중화동의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였다.

3장 논과 밭, 집과 산이 만들어낸 중화동의 풍경
1912년 중화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논이었다.
118필지 787,739㎡.
지금의 중화역 일대가 한때 물길을 따라 논이 펼쳐진 너른 들판이었다는 건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른다.
집이 있던 대지는 39필지 36,426㎡로 꽤나 소박한 규모였다.
산, 즉 임야는 20필지 90,886㎡였고 밭은 6필지 20,228㎡였다.
여기서 특이한 건 연못, 즉 지소가 3필지 27,256㎡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단순한 농업용 물 저장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중요한 물길이나 생태 공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의 중화동은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알고, 농사일과 계절 변화가 일상을 지배하던 전형적인 자연마을형 정주지였다.
그런데 이 평범한 구성 안에서도 권력과 소유의 흐름은 명확히 드러난다.
4장 성씨별 토지 소유 분석, 누가 이 마을을 이루었나
최씨가 111필지.
박씨가 101필지.
이씨가 40필지.
김씨가 36필지.
전씨, 함씨 등도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이 기록은 단순한 명단이 아니다.
당시 마을의 중심 가문이 누구였는지, 어느 집안이 경제적·사회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문화재발굴급의 중요한 단서다.

5장 동양척식·마을·법인 소유의 토지까지… 보이지 않던 권력의 흔적
1912년이라는 시점이 주는 역사적 무게를 잊으면 안 된다.
이 시기 토지 구조를 보면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가 11필지가 확인된다.
이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에 나타난 토지 수탈 구조의 명백한 흔적이다.
마을 공동 소유 토지는 5필지였고, 법인 소유의 토지가 3필지 있었다.

숫자는 냉정하지만, 그 속에는 조용히 사라져가던 사람들의 땅, 공동체의 터전, 그리고 외부 권력의 침투까지 모두 담겨 있다.
6장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바로 이런 기록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문화재 지표조사와 유적발굴, 시굴조사가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땅일지라도 그 아래는 사람들의 삶, 마을의 구조, 잊힌 유물발굴의 흔적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재발굴과정은 그저 의무적 행정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찾아 현재와 연결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가 최신으로 발전해도 결국 핵심은 ‘어떤 이야기를 찾아내느냐’다.

7장 성공 사례와 함께 보는 발굴의 가치
청계천에서는 이미 수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 화폐, 토기, 생활유적 등이 출토되었고, 이런 기록들이 서울의 도시사와 생활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은 중화동 같은 지역의 유적발굴 필요성을 더 강하게 증명해준다.
지금은 사라진 논과 연못, 최씨·박씨 집안의 집성촌, 동양척식이 파고들던 토지들.
이 모든 건 발굴을 통해서만 실체를 찾아낼 수 있다.

8장 끝까지 읽는 사람에게 보내는 작은 울림
중화동의 오래된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며 느낀 건 아주 단순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살고 있다는 것.
누가 이 땅을 일궜는지, 어떤 사람들이 웃고 울며 삶을 이어왔는지, 그 흔적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
이 글을 읽는 너가 단 한 번이라도 중화동을 지나칠 때
“여기 아래 이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하고 한 번만 떠올려준다면,
그 순간 잊힌 역사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화재를 지키는 일의 진짜 힘이고,
우리가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끝까지 읽어줘서 고맙다.
이 기록이 너에게도 조용한 울림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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