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랑구 중화동 토지의 진짜 얼굴, 잊힌 땅의 기록을 다시 꺼내보다
- 2025년 12월 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4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조사 · 서울 중랑구 중화동 역사 · 문화재 발굴기관 · 유적발굴 · 동양척식주식회사
사라진 땅의 기록을 다시 꺼내는 일은 결국 우리 삶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더라. 중화동의 오래된 지도 안에서 100년의 시간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서울 중랑구 중화동.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 분주한 도로가 가득한 이 동네가 1912년에는 논이 넓게 펼쳐지고 연못이 마을 공동체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던 자연마을이었다. 총 429필지 1,179,268㎡. 그 광대한 기록 안에 최씨·박씨·이씨의 삶이 있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늘도 있었으며,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있었다.
이 글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바탕으로, 중화동이라는 공간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야기 형태로 풀어낸다. 지표조사 한 번이면 금방 끝날 것 같은 자료 같지만, 들여다보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목차
1중화동의 오래된 지도를 펼치는 순간
2429필지의 땅이 들려주는 1912년의 구조
3논과 밭, 집과 산이 만들어낸 중화동의 풍경
4성씨별 토지 소유 분석, 누가 이 마을을 이루었나
5동양척식·마을·법인 소유의 토지까지, 보이지 않던 권력의 흔적
6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7성공 사례와 함께 보는 발굴의 가치
8끝까지 읽는 사람에게 보내는 작은 울림
429
총 필지 수
1,179,268㎡
총 면적
118
논 필지
111
최씨 필지
11
동양척식 소유
3
연못(지소) 필지
1. 중화동의 오래된 지도를 펼치는 순간

1912년 중랑구 중화동의 토지 기록을 처음 펼치는 순간은 묘하다. 오래된 지도 속에 잠들어 있던 시간이 갑자기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금은 빽빽한 아파트와 도로, 상가로 가득 찬 지역이지만 100년 전 이곳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은 마치 문화재 발굴 현장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긴장감마저 준다.
지표조사 한 번이면 금방 끝날 것 같은 자료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발굴조사원들이 왜 수많은 시간과 장비를 들여 유물 발굴과 유적 발굴을 반복하는지, 이 기록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429필지 1,179,268㎡. 이 숫자들 사이에 바람의 결이 다르고 흙 냄새가 더 진했던 그 시절의 풍경이 고스란히 숨어 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중화동의 기록을 꺼내든 것도 그 흐름의 일부다. 단순히 '몇 필지였는가'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토지 구조가 이 공동체를 이루었는지, 그 흐름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2. 429필지의 땅이 들려주는 1912년의 구조

429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그 안에는 그 시절 중화동의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 전체가 담겨 있다. 전체 1,179,268㎡의 땅이 어떻게 나뉘어 있었는지를 보면 이 동네가 어떤 성격의 공간이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농경지가 중심이었고, 임야가 그 주변을 감쌌으며, 사람들의 집은 그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형적인 자연마을형 정주지의 구조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런 필지 구성이다. 어떤 유형의 땅이 어느 비율로 분포하느냐에 따라 그 아래 층위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화동처럼 논이 중심이고 연못까지 존재하는 수변 농경 지역은 지표조사 단계에서부터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수계 관련 유구, 논두렁 흔적, 수로 구조물이 지층에 온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3. 논과 밭, 집과 산이 만들어낸 중화동의 풍경

1912년 중화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건 논이었다. 118필지 787,739㎡. 지금의 중화역 일대가 한때 물길을 따라 논이 너르게 펼쳐진 들판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른다. 계절마다 색이 바뀌는 그 들판 위로 바람이 지나고, 농부들의 발소리가 흙을 눌렀던 풍경이 기록 속에서 다시 떠오른다.
대지는 39필지 36,426㎡로 비교적 소박한 규모였다. 사람들이 실제로 살았던 공간은 생각보다 작았고, 그 주변을 광대한 농경지가 둘러싸고 있었다. 임야는 20필지 90,886㎡, 밭은 6필지 20,228㎡였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가장 눈을 끄는 것은 연못, 즉 지소가 3필지 27,256㎡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단순한 농업용 물 저장지가 아니다. 마을 공동체의 핵심 물길이자 생태 공간으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연못의 존재는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단서다. 수변 생활 유구, 목제 유물, 수로 시설의 흔적은 토양 조건이 맞으면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중화동의 연못 3필지가 있던 구역은 발굴조사 시 가장 먼저 정밀 조사가 필요한 지점으로 꼽힐 수 있다.
논
118필지
787,739㎡
임야(산)
20필지
90,886㎡
연못(지소)
3필지
27,256㎡
밭
6필지
20,228㎡
대지
39필지
36,426㎡
4. 성씨별 토지 소유 분석, 누가 이 마을을 이루었나

성씨별 토지 소유 기록을 펼치는 순간 숫자가 사람으로 바뀐다. 최씨가 111필지로 압도적인 1위였다. 박씨 101필지, 이씨 40필지, 김씨 36필지가 그 뒤를 이었다. 전씨와 함씨 등도 마을의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최씨 111필지와 박씨 101필지를 합치면 212필지로, 전체 429필지의 거의 절반이 이 두 집안에 집중돼 있었다.
이 기록은 단순한 명단이 아니다. 당시 마을의 중심 가문이 누구였는지, 어느 집안이 경제적·사회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핵심 단서다. 최씨와 박씨가 이웃하며 이 마을의 주요 농경지를 관리했다면, 이 두 집안이 집중된 구역에서 조선 후기 주거 유구와 공동 시설 흔적이 발굴될 가능성이 높다. 성씨 분포는 발굴 방향을 잡는 가장 오래된 나침반이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특정 성씨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나 비석 파편이 나오는 순간, 과거의 기록과 발굴의 물증이 연결되며 퍼즐이 맞춰진다. 유적 발굴이란 결국 이런 연결의 과정이다. 하계동의 이씨 127필지가 그랬던 것처럼, 중화동의 최씨 111필지도 발굴조사원이 현장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데이터다.
111
최씨 필지
101
박씨 필지
40
이씨 필지
36
김씨 필지
11
동양척식
5
마을 공동 소유
3
법인 소유
5. 동양척식·마을·법인 소유의 토지까지, 보이지 않던 권력의 흔적
1912년이라는 시점이 주는 역사적 무게를 잊으면 안 된다. 이 시기 토지 구조를 보면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가 11필지 확인된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에 나타난 토지 수탈 구조의 명백한 흔적이다. 한일병합 불과 2년 만에 국책 기관이 서울 외곽의 농경 마을 깊숙이까지 필지를 확보해 두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 유물이다.
마을 공동 소유 토지 5필지의 존재도 눈여겨봐야 한다. 공동 소유 토지는 보통 마을 공동우물, 제당, 공동창고, 마을 광장 등 공동체 생활의 핵심 시설과 연결된 경우가 많다. 이 5필지가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를 추적하면 당시 중화동 공동체의 구심점이 어디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이 구역은 마을 공공 시설 유구 출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점이 된다.
법인 소유 3필지도 주목할 만하다. 근대 초기 법인 소유 토지는 민간 기업 또는 종교·학교 법인의 활동 반경을 보여주는 자료다. 창고였는지, 교육 시설이었는지, 종교 관련 건물이었는지에 따라 출토되는 유물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숫자는 냉정하지만 그 속에는 조용히 사라져가던 사람들의 땅, 공동체의 터전, 외부 권력의 침투까지 모두 담겨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1필지 + 마을 공동 소유 5필지 + 법인 소유 3필지 = 총 19필지. 전체 429필지의 4.4%가 비개인 소유였다. 이 구역들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공공·집단적 성격의 유구 출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우선 검토 대상이다.
6.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가

바로 이런 기록 때문에 문화재 지표조사와 유적 발굴, 시굴조사가 지금도 멈추면 안 된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아파트 부지이고 평범한 도심 도로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사람들의 삶, 마을의 구조, 잊힌 공동체의 흔적이 층층이 묻혀 있다. 한 번 파헤치고 기록 없이 덮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영원히 사라진다.
지금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재 발굴 과정은 그저 의무적 행정 절차가 아니다. 과거를 다시 찾아 현재와 연결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문화재발굴조사 장비가 최신으로 발전해도 결국 핵심은 '어떤 이야기를 찾아내느냐'이고, 그 이야기의 실마리는 1912년 중화동 기록 같은 역사 자료에서 시작된다. 기록이 없으면 방향이 없고, 방향이 없으면 발굴은 그냥 흙을 파는 일로 끝난다.
중화동처럼 논·연못·임야가 공존하던 수변 농경 지역은 특히 층위 보존이 잘 되는 경향이 있다. 물가 인근의 토양 조건이 유기물 보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발굴조사원들이 수변 지역에서 목제 유물이나 식물 유체를 기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중화동의 연못 3필지는 그런 의미에서 발굴 현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될 수 있다.
7. 성공 사례와 함께 보는 발굴의 가치
성공 사례 — 청계천 일대 발굴과 도시 기억의 복원
청계천에서는 수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 화폐, 토기, 생활 유적 등이 출토됐다. 이 기록들은 서울의 도시사와 생활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단순한 하천 복원이 아니라 도시 기억의 복원으로 프로젝트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중화동 같은 지역에서도 동일한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은 사라진 논과 연못, 최씨·박씨 집안의 집성촌 흔적, 동양척식이 파고들던 토지들. 이 모든 것은 발굴을 통해서만 실체를 찾아낼 수 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참고)
이런 성공 사례들이 쌓일수록 문화재 발굴조사의 가치는 더 선명해진다. 개발과 보존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성이 결합된 공간은 장기적으로 더 높은 문화적·경제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중화동의 기록이 발굴 현장에서 실제 유구와 맞닿는 날, 그 가치는 다시 한번 확인될 것이다.
8. 끝까지 읽는 사람에게 보내는 작은 울림

중화동의 오래된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며 느낀 건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살고 있다는 것. 누가 이 땅을 일궜는지, 어떤 사람들이 웃고 울며 삶을 이어왔는지, 그 흔적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
최씨 111필지, 박씨 101필지. 논에서 계절을 보내며 함께 수확을 나누던 사람들. 연못 옆에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던 소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름이 조용히 토지대장에 파고들던 그 해의 무거운 공기. 이 모든 것이 429필지 1,179,268㎡ 안에 함께 담겨 있었다.
"여기 아래 이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중화동을 지나칠 때 단 한 번만 이렇게 떠올려준다면, 그 순간 잊힌 역사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화재를 지키는 일의 진짜 힘이다.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꺼내 읽는 한,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도 계속 살아 있다.
끝까지 읽어줘서 고맙다. 이 기록이 너에게도 조용한 울림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걷는 길 위에는 늘 오래된 시간이 따라온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사라진 건 하나도 없다. 단지 우리가 다시 꺼내 읽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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