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명동,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곳의 100년 전 이야기
- 서울 HI
- 8월 9일
- 3분 분량
목차
📌 명동,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곳의 100년 전 이야기
🧭 1912년 명동2가의 구체적인 모습
🏠 얼마나 많은 집이 있었을까?
🚶 명동2가의 도로는 어떤 모습이었나
🕯️ 조용한 공간, 사사지는 무엇인가?
🏢 법인 소유 땅의 의미
🇯🇵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토지 점유 실태
🇨🇳 명동 속 중국인의 존재감
🧱 오늘의 문화재지표조사와 연결되는 명동의 발자취
✅ 서울에서 문화재 발굴·지표조사를 의뢰하려면
📚 성공사례로 보는 서울문화유산 발굴 이야기
🔚 마무리하며: 기록은 역사가 된다

명동, 지금 당신이 걷는 그곳은 100년 전엔 어땠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오가는 서울의 중심, 명동.
패션, 음식, 쇼핑, 관광의 1번지로 손꼽히는 이곳이 과연 100년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가 매일 걷는 길 아래에, 카페와 백화점이 들어선 그 땅 아래에 숨겨진 과거의 흔적은 상상만으로도 흥미롭다.
역사는 단지 오래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사실 과거의 연속선상 위에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1912년 조선총독부가 남긴 자료를 통해 명동2가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단지 통계가 아닌, 사람과 삶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놀랍고, 결국은 오늘의 서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1912년 명동2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나
1912년, 서울 중구 명동2가는 총 108필지로 구성된 땅이었다.
면적은 무려 110,228㎡, 오늘날로 치면 축구장 15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면적이다.
당시 이곳은 한창 도시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대한제국은 무너지고, 조선총독부가 도시의 구조를 재편하면서 명동 역시 그 변화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 기록은 단순한 행정적 숫자가 아니다.
이 안에는 명동이 단순한 상업지구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길을 걷고, 삶을 이어간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명동에는 얼마나 많은 집이 있었을까?
1912년의 기록에 따르면, 명동2가에는 106필지, 109,445㎡의 대지가 주거용으로 존재했다.
거의 모든 면적이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백화점이 있는 그 자리에, 커피숍이 있는 그 옆 골목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가족을 꾸리고, 장작을 패고, 밥을 지었다는 것.
도시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다는 증거다.
명동의 도로는 얼마나 있었을까?
길은 곧 흐름이다. 사람이 다니고, 물자가 오가며, 시간이 지나가는 경로.
명동2가에는 도로 부지로 쓰인 땅이 446㎡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의 넓고 반듯한 도로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건 곧, 당시 명동은 ‘사람 중심의 마을’이었고, 차보다는 걸어서 다니는 골목 중심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좁은 골목, 서로 인사하며 지나가는 이웃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던 삶의 풍경이 떠오른다.
사사지는 무엇이고, 왜 중요할까?
1912년 당시 명동2가에는 1필지, 337㎡의 ‘사사지’가 있었다.
사사지는 사적인 절이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지금으로 치면 작은 사찰이나 가문의 제단 같은 공간이다.
즉, 명동2가에도 누군가의 신앙과 기억, 조상의 흔적을 간직한 공간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런 공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 작은 사사지 하나가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과 전통을 대변한다.
법인이 소유한 땅 1필지, 그 의미는?
당시 명동2가에는 법인 명의로 된 땅이 1필지 존재했다.
지금처럼 대형 재벌이나 기업체가 땅을 소유하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건 명동이 단지 주거지역이 아니라 공공성이나 상업성을 띤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당시 이 땅이 어떤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점이었을 수도 있고, 기관의 사무소였을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명동2가에서 얼마나 많은 땅을 차지했나
가장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
108필지 중, 일본인이 소유한 땅은 무려 76필지.
명동2가 대부분의 땅을 일본인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의 땅은 빠르게 일본 자본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명동처럼 중심지일수록 그 속도는 더 빨랐다.
이건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우리가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다.
그들은 단지 ‘지배’한 것이 아니라, 우리 땅 위에서 ‘자산’을 만들고, 우리 삶의 터전을 바꾸어놓았다.
중국인도 명동2가에 살았다고?
흥미롭게도, 명동2가에는 중국인도 살았다.
그들은 10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는 그들이 상업을 목적으로 명동에 터를 잡았다는 증거다.
당시 중국 상인은 약방, 포목점, 음식점 등 다양한 업종에서 활동했으며, 명동은 이처럼 다문화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명동의 과거는, 오늘의 문화재지표조사로 이어진다
지금 명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에서는 개발 전에 반드시 문화재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진행한다.
왜냐하면 땅 아래엔 여전히 많은 유물이, 흔적이,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1912년의 기록처럼, 누군가의 삶과 신앙과 문화가 담긴 공간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
서울문화유산 같은 기관에서는 이 과정을 전문적으로 맡아,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가 되고 있다.
서울에서 문화재 발굴조사를 맡기려면?
서울 지역에서 문화재 시굴조사, 표본조사, 지표조사 또는 발굴조사를 의뢰하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다.
서울문화유산은 이러한 절차를 수년간 전문적으로 진행해온 곳으로, 지역의 역사성과 법적 절차를 모두 고려하여 작업한다.
특히 도심 한복판인 명동, 종로, 강남 같은 지역은 문화층이 깊기 때문에 사전조사 없이 개발을 진행하면 법적 제재나 공사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 성공사례: 서울 중구 ○○개발지, 발굴 후 새로운 도시 스토리텔링 구축
2023년 서울 중구의 한 복합개발 부지에서 진행된 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생활유적이 다수 발견되었다.
서울문화유산은 이를 바탕으로 복원 콘텐츠를 제공하고, 지역주민 및 방문객을 위한 역사전시 공간을 기획해 도시 브랜딩에 성공했다.
그 결과, 해당 개발지는 단순한 상업공간을 넘어 ‘스토리 있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마무리하며: 기록이 곧 미래다
1912년 명동2가의 숫자 하나하나는 단지 옛날 이야기로 치부되어선 안 된다.
그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100년 전, 누군가가 살았고, 사랑했고, 지냈던 그 땅 위에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거를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가 미래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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