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역삼동, 1912년 그 시간으로 떠나는 타임머신』
- 2025년 6월 7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테헤란로 그 땅, 100년 전엔 황금빛 벼가 출렁이는 논이었다
1912년 강남구 역삼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강남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땅과 사람의 이야기
강남역 11번 출구를 나서는 순간,
잠깐만 멈춰봐.
지금 네 발 밑 이 땅,
100년 전엔 벼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고
42개 무덤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강남은 처음부터 강남이 아니었다.

목차
강남의 심장, 역삼동의 비밀
논과 밭, 역삼동의 놀라운 변신
오래된 무덤과 숲의 속삭임
한씨, 임씨, 심씨… 땅을 품은 사람들
국유지, 개발의 숨겨진 주인공
문화유적의 흔적을 찾아서
역사와 현재, 역삼동이 말하는 이야기
역삼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테헤란로, 강남역, 삼성과 카카오와 네이버가 밀집한 IT 기업의 성지.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곳이 바로 역삼동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이 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을 따라가면, 지금의 화려한 역삼동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빌딩 한 채 없던 그 시절 역삼동이 품고 있던 이야기를 지금 꺼내보려 한다.
1. 강남의 심장, 역삼동의 비밀
오래된 지도 한 장을 상상해봐. 지금의 테헤란로와 강남역 사거리 자리에 빌딩이 아니라 논두렁이 그려져 있고, 언덕 위에 무덤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 그게 1912년 역삼동의 실제 모습이었다.
역삼동은 당시 강남 일대에서도 꽤 넓은 땅이었다. 총 550필지, 1,385,946㎡에 달하는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에는 논과 밭, 산과 무덤, 그리고 소박한 집들이 자리를 나눠 가지고 있었다. 그 땅의 이야기가 지금의 강남을 만든 기초가 됐다.
역삼동이라는 이름도 생각해봐. '역삼(驛三)'은 역참과 관련된 이름이다. 조선 시대 이 일대에 역참, 즉 공문서와 물자를 전달하는 교통 거점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역참길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 살고, 그 사람들이 논을 갈고 밭을 일구며 역삼동이라는 마을을 만들어갔다. 지금의 테헤란로가 그 옛 역참길 위에 놓여 있는 거다.
2. 논과 밭, 역삼동의 놀라운 변신

1912년 역삼동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한 건 단연 논밭이었다. 논과 밭을 합치면 325필지, 634,502㎡. 전체 면적의 약 46%가 농경지였다.
550필지
역삼동 전체 필지
1,385,946㎡
총 면적
325필지
논밭 (634,502㎡)
42필지
분묘지 (43,021㎡)
24필지
임야 (211,987㎡)
139필지
국유지
325필지의 논밭. 지금 테헤란로 양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고층 빌딩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황금빛 벼가 출렁이고, 고구마와 감자가 흙 속에서 영글던 광경. 그게 불과 100여 년 전 역삼동의 일상이었다. 강남이 대한민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 된 지금, 그 땅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634,502㎡는 어느 정도 면적일까. 축구장 약 90개를 채울 수 있는 넓이다. 그 광대한 땅에서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이면 김을 매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리듬이 역삼동 사람들의 한 해를 가득 채웠다. 그 리듬이 지금은 회의 일정과 마감 스케줄로 바뀌었을 뿐,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런 광활한 농경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수백 년간 경작된 땅은 토양 층위에 농경 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논두렁 경계, 수리 시설 터, 농기구 보관 창고 유구 같은 것들이 아직 역삼동 지하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수 있다.
3. 오래된 무덤과 숲의 속삭임
역삼동의 1912년 기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가 여기 있다. 분묘지 42필지, 43,021㎡. 지금의 강남 한복판에 42개 필지에 달하는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42필지의 무덤. 이 숫자가 얼마나 큰 건지 생각해봐. 지금 강남역 주변을 걸으면서 주요 건물들을 떠올려봐. 그 건물들이 들어선 자리 어딘가에 100년 전 누군가의 조상이 잠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역삼동이 단순한 논밭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들이 삶을 이어온 공간이었다는 증거다.
임야도 있었다. 24필지, 211,987㎡.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어렵지만, 역삼동에 축구장 약 30개 크기의 숲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과 작은 숲이 마을 사람들에게 땔감을 주고, 더위를 피할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 숲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지금도 어딘가 땅속에 남아 있을 거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는 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영역이다. 42필지라는 방대한 분묘지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신분과 생활상을 알려주는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백자 제기, 동전, 비석 조각, 금속 장신구 같은 것들. 이 무덤들이 제대로 발굴되고 기록된다면, 강남 개발 이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복원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강남의 화려함 아래, 42개 무덤이 먼저 있었다. 그 땅에서 잠든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 거리가 존재한다."
4. 한씨, 임씨, 심씨… 땅을 품은 사람들
1912년 역삼동 토지 기록에는 수많은 성씨들이 등장한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건 한씨로 73필지였다. 임씨 58필지, 심씨 46필지, 최씨 42필지, 김씨 40필지 순이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성씨들이 역삼동의 땅을 나눠 가졌다.
73필지
한씨
58필지
임씨
46필지
심씨
42필지
최씨
40필지
김씨
한씨 73필지. 역삼동에서 한씨가 가장 많은 땅을 가졌다는 게 흥미롭다. 청주 한씨, 양천 한씨 등 어느 계열인지에 따라 이 가문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의 강남 한복판이 될 줄도 모르고 이 땅에서 농사를 짓고 가족을 키웠던 한씨 일가. 그들의 후손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심씨 46필지도 눈에 띈다. 방화동에서 129필지로 최대 지주였고, 천호동에서도 72필지를 가졌던 심씨가 역삼동에서도 등장한다. 강남구, 강동구, 강서구까지 서울 곳곳에 심씨 가문의 땅이 분포했다는 건, 이 가문이 조선 후기 서울 전역에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일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런 성씨 분포 패턴은 당시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강남이 될 줄도 몰랐던 이 땅에서 묵묵히 밭을 갈던 한씨와 임씨와 심씨와 최씨와 김씨의 사람들. 그들은 지금의 강남 개발이 가능했던 보이지 않는 역사의 뿌리다. 그 뿌리를 기억하는 것, 그게 문화재 지표조사와 역사 기록이 존재하는 이유다.
5. 국유지, 개발의 숨겨진 주인공

역삼동 기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항목 중 하나가 국유지다. 무려 139필지가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었다. 전체 550필지 중 25%가 넘는 비율이다.
139필지의 국유지. 이건 역삼동에서 특별히 눈여겨봐야 할 숫자다. 당시 국유지는 크게 두 종류였다. 하나는 역참, 도로, 관청 부지처럼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공공 시설 부지였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소유한 농지, 즉 역둔토였다. 역삼동이라는 이름에 역참의 흔적이 담겨 있듯, 이 동네는 조선 시대부터 국가 교통망의 핵심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유산이 139필지의 국유지로 남아 있었던 거다.
더 흥미로운 건 이 국유지가 훗날 강남 개발의 기반이 됐다는 점이다.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될 때, 국유지는 민간 소유 땅에 비해 수용과 개발이 훨씬 쉬웠다. 1912년에 국유지로 등록된 그 139필지가, 수십 년 후 대한민국 최대 도심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다. 강남 개발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1912년 토지 기록부터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6. 문화유적의 흔적을 찾아서
역삼동은 지금의 강남 이미지와 달리 풍부한 역사 층위를 품고 있다. 42필지의 무덤, 24필지의 숲, 325필지의 논밭, 139필지의 국유지가 공존했던 이 땅은 단순한 농촌이 아니라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문화와 역사가 쌓인 공간이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역삼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분석해 역사 지도를 구축하고 있다. 이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개발이 시작되고 나면 그 아래 묻힌 역사를 되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역삼동 지하에 어떤 역사 층위가 남아 있는지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역삼동에서 문화재 발굴조사가 필요한 이유
42필지 분묘지, 24필지 임야, 325필지 농경지가 존재했던 역삼동은 조선 시대 이후 오랜 생활 문화의 흔적이 지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강남 재개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공사 착공 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필요 시 시굴조사·표본조사·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조사가 이루어져야 이 땅의 역사를 지킬 수 있다.
실제로 강남 일대에서는 의외의 발굴 성과가 나온 사례들이 있다. 도심 개발 현장에서 조선 시대 생활 유구가 발굴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그때마다 우리는 강남이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역삼동 지하에도 그런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7. 역사와 현재, 역삼동이 말하는 이야기

역삼동은 단순히 강남의 중심지가 아니다. 1912년의 논밭과 무덤과 숲에서 시작해, 수십 년 만에 대한민국 최첨단 도심으로 탈바꿈한 이 공간은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 변화가 너무 빠르게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이 가진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강남이 개발되던 1970년대, 불도저가 논을 밀어버리고 아파트가 들어서던 그 속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가 사라졌을지. 그게 지금도 아쉬운 이유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강남에서는 지금도 재개발이 진행 중이고, 그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할 기회가 있다. 역삼동의 42필지 분묘지, 24필지 임야, 325필지 농경지가 품고 있던 이야기들이 아직 땅 아래 잠들어 있을 수 있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첫 번째 걸음이 바로 지표조사다.

다음에 강남역을 나서거든, 딱 한 번만 발 아래를 봐. 그 반들반들한 대리석 아래, 아스팔트 아래, 콘크리트 아래. 100년 전 한씨와 임씨의 논이 있었고, 심씨의 밭이 있었고, 이름 모를 42개의 무덤이 있었다. 그 위에 지금 네가 서 있다.
강남은 처음부터 강남이 아니었다.
한씨가 논을 갈고, 임씨가 밭을 일구고,
이름 모를 42집안의 조상이 잠들어 있던 땅.
그 위에 지금의 테헤란로가 놓였다.
빌딩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 땅이 살아온 시간은 지워지지 않는다.
역사는 화려한 유리 빌딩 아래,
지금도 조용히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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