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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으로 떠나는 종로구 궁정동 이야기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청와대 옆 동네, 1912년 궁정동의 98필지에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은 청와대가 들어선 그 자리 옆. 여의도공원 절반 크기의 땅에 이씨 16필지·김씨 12필지가 살았고, 일본인 4필지와 국유지 4필지가 그 사이를 채웠다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궁정동의 시간


목차

1. 시간 속으로 떠나는 궁정동 이야기

2. 1912년 궁정동, 여의도공원 절반 크기의 마을

3. 이씨·김씨가 이끌던 성씨 공동체

4. 국유지 4필지 — 권력 교체기의 흔적

5. 일본인 4필지 — 궁궐 옆까지 침투한 식민지

6.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보는 궁정동

7. 종로 도로 흔적 발굴 성공 사례

8. 마무리 — 과거를 제대로 보는 것이 미래다


궁정동. 지금은 청와대가 위치했던 자리 바로 옆, 서울에서 가장 권력의 냄새가 짙은 동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12년 이 동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98필지, 66,076㎡. 여의도공원 절반에 가까운 이 공간에 이씨와 김씨가 살았고, 그 사이에 일본인의 필지와 국유지가 끼어 있었다.

경복궁과 맞닿은 이 동네의 1912년 기록은 단순한 토지대장이 아니다. 조선 왕조가 끝나고 일제가 막 들어서던 그 전환기, 궁궐 바로 옆 동네에 어떤 권력의 지형이 형성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단면이다.



1. 시간 속으로 떠나는 궁정동 이야기

궁정동이라는 이름은 궁궐 안쪽에 있는 동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경복궁 북쪽, 지금의 청와대 일대가 그 공간이었다. 조선 시대부터 이곳은 왕실과 가까운 특별한 공간이었고, 1912년에도 그 특별함이 토지 기록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98필지라는 작은 숫자 안에,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어떤 동네보다 강렬한 역사적 맥락이 압축되어 있다. 이 동네의 이야기를 읽는 건 단순히 100년 전 주민 목록을 보는 게 아니라, 조선과 일제 사이 권력 교체기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2. 1912년 궁정동, 여의도공원 절반 크기의 마을

1912년 궁정동의 총 면적은 66,076㎡였다. 지금 여의도공원이 약 229,539㎡이니, 그 약 29% 규모다. 축구장으로 환산하면 약 9개 규모다. 그런데 그 넓은 땅에 필지는 98개뿐이었다. 다른 종로구 동네들과 비교해도 필지 수가 가장 적다.

98필지

총 필지 수 (시리즈 최소)

66,076㎡

총 면적 (축구장 약 9개)

약 674㎡

필지당 평균 면적

필지 수가 적고 면적이 넓다는 건 각 집이 매우 넓었다는 뜻이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약 674㎡, 200평이 넘는다. 앞서 살펴본 낙원동이나 권농동과 비교하면 필지당 면적이 압도적으로 크다. 이건 궁정동이 서민 밀집 주거지가 아닌, 넓은 대지를 가진 상층 계층의 주거지였음을 보여준다. 경복궁 바로 옆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이 동네의 사회적 성격을 결정했을 것이다.


3. 이씨·김씨가 이끌던 성씨 공동체

궁정동의 성씨별 토지 분포는 다른 종로구 동네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씨 16필지, 김씨 12필지로 1·2위를 차지했지만, 전체 98필지에서 이 두 성씨의 합산이 28필지, 약 29%에 불과하다. 한 성씨가 과반을 넘겼던 권농동(정씨 59%)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다.

이씨

16필지

김씨

12필지

이 말은 나머지 70%의 필지들이 여러 다른 성씨들과 특수 소유지(국유지, 일본인 소유)로 구성됐다는 뜻이다. 궁정동은 특정 가문의 독점 없이 상대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각 집의 규모가 200평이 넘었으니, 이들이 모두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음은 분명하다.

필지당 평균 면적 674㎡(약 204평). 이는 궁정동 거주자들이 서울 도심의 일반 서민이 아닌 상층 계층이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 시 이 넓은 필지 구역에서는 상류 계층의 건축 양식과 고급 생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4. 국유지 4필지 — 권력 교체기의 흔적

1912년 궁정동에는 국유지가 4필지 있었다. 이 시기는 조선 왕조가 막 멸망하고 일제의 통치가 시작된 직후였다. 경복궁 바로 옆 동네인 궁정동의 국유지는 단순한 행정 공간이 아닌, 권력 교체기의 정치적 맥락이 담긴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국유지

4필지

왕실·관청 관련 추정

일본인 소유

4필지

식민지 초기 침투

조선 왕조 시절 궁궐 관련 시설로 활용됐을 가능성, 혹은 일제가 통치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국가 소유로 편입된 토지일 가능성도 있다. 경복궁과의 물리적 인접성을 고려하면, 이 국유지 4필지 구역에서의 발굴조사는 조선 왕실의 부속 시설이나 근위 공간과 관련된 유구가 출토될 가능성이 있는 특별 조사 구역이다.


5. 일본인 4필지 — 궁궐 옆까지 침투한 식민지

궁정동에도 일본인 소유 4필지가 있었다. 수치만 보면 낙원동의 25필지에 비해 작다. 하지만 맥락이 다르다. 낙원동은 상업 중심지여서 경제적 침탈의 성격이 강했다면, 궁정동의 일본인 4필지는 조선의 왕궁 바로 곁에 위치한 상징적 공간에 식민 권력이 파고들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일본인 4필지는 경복궁과 맞닿은 궁정동이라는 위치에서 그 의미가 증폭된다. 조선의 가장 신성한 공간 바로 옆에서 외세의 토지 침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식민 지배가 단순한 행정적 통치를 넘어 조선의 정신적 중심까지 장악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 시 이 4필지 구역에서는 일본식 건축 자재와 조선식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그것은 두 문화의 충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그리고 그 일본인 소유지에서 훗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이 4필지의 이후 이야기를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완전한 역사 연구가 될 것이다.



6.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보는 궁정동

궁정동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왜 필수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이 지역은 조선 왕실의 물리적 공간과 맞닿아 있었고, 상층 계층 거주자들의 고급 생활 문화가 농축되어 있었으며, 권력 교체기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는 곳이다.

토지대장 분석지표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조사의 범위는 단순한 건축 유물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생활 유적, 토지 이용의 흔적, 왕실과 관련된 특수 유구까지 포함된다. 궁정동의 98필지 하나하나는 단 몇십 년이 아닌 수백 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seoulheritage.org는 이 기록을 서울 전역 아카이브의 일부로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발굴 전략 수립에 활용하고 있다.


7. 종로 도로 흔적 발굴 성공 사례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신축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조선 후기의 도로 흔적과 민가 터가 확인됐다. 처음엔 단순한 개발지로만 보였지만, 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그 유적은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개발과 보존이 균형을 찾은 이 사례는 지표조사가 단순한 형식 절차가 아님을 증명한다.

궁정동에서 같은 방식의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조선 후기 상류 계층의 가옥 기단, 왕실 관련 유구, 혹은 경복궁 관련 부속 시설의 흔적. 이 모든 가능성이 궁정동 땅 아래에 있을 수 있다.

종로구 신축 부지 도로 흔적 발굴 사례처럼 지표조사가 등록문화재 지정으로 이어질 때, 그 지역의 역사적 가치는 영구적으로 보호받게 된다. 궁정동처럼 역사적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더욱 높다.



8. 마무리 — 과거를 제대로 보는 것이 미래다

오늘 궁정동 어딘가를 걷게 된다면, 발아래 땅을 한 번 생각해봐 줬으면 한다. 이씨 가문의 넓은 대지였을 수도 있고, 김씨의 200평짜리 마당이었을 수도 있다. 국유지였던 이 자리에서 어떤 관청이 운영됐을 수도 있고, 일본인이 소유한 4필지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98필지, 66,076㎡. 이 숫자 뒤에는 조선의 마지막과 일제의 시작이 교차하던 그 극적인 전환기가 담겨 있다. 경복궁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왕조가 끝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사람들의 하루. 그 하루가 지금도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유산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발견되고, 복원되고, 우리 앞에 다시 서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

경복궁 담장 너머, 조선의 마지막이 잠든 궁정동의 98필지

98필지, 66,076㎡. 필지당 200평이 넘는 상층 계층의 마을, 이씨와 김씨의 넓은 집터, 국유지 4필지와 일본인 4필지가 공존하던 전환기의 현장. 경복궁 바로 옆에서 조선과 일제가 교차하던 그 시간이 지금도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약속이다.



궁정동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지표조사 의뢰 방법 알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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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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