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서울 종로구 세종로가 품은 1912년의 비밀
- 서울 HI
- 11월 3일
- 3분 분량
목차
기억을 깨우는 거리, 세종로의 시작
213필지의 땅, 그 아래 숨은 조선의 그림자
김씨, 이씨, 최씨, 박씨… 성씨별로 본 토지의 주인들
일본인 토지 소유의 흔적, 식민의 서막
809,778㎡의 공간이 말해주는 서울의 변천
문화재발굴과 유적발굴의 연결, 세종로의 현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로 본 세종로의 미래
끝맺음 – 땅이 기억하는 역사를 오늘에 잇다
“이 거리의 돌 하나, 흙 한 줌에도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세종로를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울림이 있다.
광화문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길목, 왕의 행차가 지나던 그 길이 지금은 시민들의 출근길이 되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이곳의 땅은 이름도, 주인도 달랐다.
1912년, 종로구 세종로의 면적은 809,778㎡.
213필지로 나뉘어 있던 그곳은 조선의 중심이자, 근대 서울의 출발점이었다.
1. 기억을 깨우는 거리, 세종로의 시작
1912년의 세종로는 오늘날보다 훨씬 넓고 한적했다.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당시 관청과 민가가 혼재했고, 지금의 정부청사 부근은 대규모 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때의 도심은 지금의 빌딩숲이 아니라, 기와지붕과 돌담이 엮인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이었다.
이곳의 대지는 212필지, 총 809,478㎡.
거의 전부가 대지였다는 점은 세종로가 이미 100년 전에도 ‘권력과 중심의 거리’였음을 보여준다.

2. 213필지의 땅, 그 아래 숨은 조선의 그림자
1912년의 세종로는 대지 212필지와 잡종지 1필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잡종지 1필지, 면적은 단 300㎡.
아주 작지만, 그 300㎡가 당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잡종지란 공공용지나 특정 용도가 불분명한 땅으로, 행정체계의 빈틈을 상징한다.
그 땅은 어쩌면 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앞, 길모퉁이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3. 김씨, 이씨, 최씨, 박씨… 성씨별로 본 토지의 주인들
당시 세종로에는 김씨가 40필지, 이씨가 32필지, 최씨가 11필지, 박씨가 10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네 성씨가 전체 토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대부분이 관직 출신 가문 혹은 명문가로, 조선 후기의 세도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세종로 일대의 한옥을 소유하며 관청에 출입했고, 대대로 관직을 이어갔다.
토지의 소유 구조는 곧 사회의 계급 구조였다.
서울의 중심에서 권력과 재산은 한 뿌리로 얽혀 있었다.
4. 일본인 토지 소유의 흔적, 식민의 서막
그러나 이 평온한 지형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바로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다.
1912년 세종로에는 일본인이 15필지의 토지를 소유했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1910년 한일병합 직후 불과 2년 만에, 서울 중심부의 토지가 일본 자본으로 흘러들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들은 상업과 행정의 요충지인 세종로를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이 작은 15필지는 훗날 식민지 통치의 기반이 되었고, 조선의 행정 중심을 장악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

5. 809,778㎡의 공간이 말해주는 서울의 변천
오늘날 세종로는 행정, 정치, 문화의 중심지다.
하지만 100여 년 전, 그 자리는 역사의 변곡점 위에 서 있었다.
궁궐, 관청, 민가가 뒤섞인 도시 구조는 시간이 흐르며 고층 건물과 아스팔트로 덮였다.
문화재발굴조사팀이 이 지역의 문화재 지표조사(지표조사는 지하에 묻힌 유적의 분포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면,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옛길의 흔적, 조선시대 담장, 일제강점기 건물 기초가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유적발굴의 진짜 매력이다.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도시의 뿌리를 이해하는 일이다.
6. 문화재발굴과 유적발굴의 연결, 세종로의 현재
현재 세종로 일대에서는 도시 재정비나 공공사업이 이루어질 때마다 문화재발굴조사원들이 현장을 찾는다.
지표조사로 땅 속 유물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필요할 경우 시굴조사와 본격적인 유물발굴작업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출토된 도자기 조각, 건물 기단석, 생활유구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서울의 근대화를 증언하는 기록이다.
세종로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조선 후기 기와는
“이곳이 한때 민가였고, 한옥이 줄지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런 문화재발굴과정이 쌓여 오늘의 세종로가 만들어졌다.

7.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로 본 세종로의 미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은 세종로를 비롯한 서울 전역에서
수많은 문화재발굴조사장비와 데이터 분석을 활용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을 보존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과거를 파는 사람들’이 아니다.
도시의 시간층을 복원하는 ‘기억의 기록자’다.
지표조사 단계부터 유물발굴작업, 보고서 작성, 디지털 아카이빙까지 이어지는 이들의 손끝에서
서울의 땅은 다시 말을 건다.
이처럼 과거를 찾아내는 일은, 단순한 조사 행위가 아닌
우리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여정이다.

8. 끝맺음 – 땅이 기억하는 역사를 오늘에 잇다
오늘 우리가 세종로를 걷는 이유는 단지 출근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아래, 누군가의 삶과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의 세종로는 지금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땅은 여전히 ‘서울의 심장’으로 뛰고 있다.
문화재발굴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우리가 땅을 파는 이유는,
잊힌 시간을 다시 꺼내 오늘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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