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수표동, 1912년의 시간 속으로: 땅이 말해주는 도시의 기억
- 서울 HI
- 10월 10일
- 3분 분량
목차
도심 속의 타임캡슐, 수표동의 1912년을 열다
98필지 25,381㎡, 숫자로 보는 근대 서울의 풍경
이씨와 김씨,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
일본인의 진출과 토지 소유 변화의 시작
국유지 1필지, 작은 면적이 말하는 큰 의미
수표동이 품은 도시 발전의 흔적
현대의 문화재 조사와 과거의 기록이 만날 때
서울의 유산을 발굴하다 – 오늘의 시굴과 지표조사
과거를 밝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의 도시 기억
성공적인 문화재 조사의 사례와 시민의 역할

도심 속의 타임캡슐, 수표동의 1912년을 열다
서울의 중심, 중구 수표동. 지금은 화려한 빌딩과 상점, 복잡한 도심의 풍경이 펼쳐져 있지만, 1912년으로 돌아가면 전혀 다른 얼굴이 우리를 맞이한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듯, 그 시절의 수표동은 98필지의 대지 위에 삶의 흔적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25,381㎡라는 면적 안에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 필지마다, 한 가족마다, 그들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바로 그런 잊힌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다.
98필지 25,381㎡, 숫자로 보는 근대 서울의 풍경
1912년, 수표동은 행정적으로 98필지로 나뉘어 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작은 면적 같지만, 당시 서울의 주거 밀도를 고려하면 제법 큰 규모였다. 한 필지에는 작은 한옥 여러 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골목마다 우물과 시장,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이 땅의 기록은 단순한 부동산 정보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초입기였던 1912년, 서울의 도심부는 근대화의 이름 아래 급격히 재편되고 있었다. 도로가 정비되고, 토지 대장이 새로 만들어지며, ‘소유’라는 개념이 근대적인 법 체계 속으로 편입되던 시기였다.
이씨와 김씨,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
1912년의 기록 속에는 흥미로운 이름들이 등장한다. 수표동의 주된 토지 소유자는 이씨가 17필지, 김씨가 11필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성씨의 비율을 넘어, 한반도의 대표적 가문들이 도시 중심부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이가 대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대다수 시민들은 세입자였고, 좁은 공간에 모여 살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들의 이름은 문서에 남지 않았지만,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들의 흔적을 찾아낸다. 낡은 기와조각, 토기 파편, 그리고 생활 도구 하나하나가 그들의 삶을 증언한다.
일본인의 진출과 토지 소유 변화의 시작
1912년 수표동의 대지 중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는 무려 17필지였다. 당시로서는 결코 작은 수치가 아니다. 한일병합 이후 불과 2년, 일본인들은 서울 도심의 핵심 지역에 빠르게 진출하며 근대적 상업과 금융의 중심을 차지해갔다.
이들의 토지 매입은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닌 식민지 권력의 확장 과정이었다. 특히 수표동은 남대문과 청계천, 종로를 잇는 요지로,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일본 상인과 관리들이 이 지역에 터를 잡으며, 서울의 경제 구조와 도시 경관은 눈에 띄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유지 1필지, 작은 면적이 말하는 큰 의미
당시 수표동에는 단 하나의 국유지가 존재했다. 단 1필지. 그러나 그 작은 면적 속에는 근대 행정체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정부의 공공시설이거나 도로, 하천부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화재 발굴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국유지는 도시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어디에 관공서가 있었는지, 어떤 행정 기능이 도심 속에 배치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수표동이 품은 도시 발전의 흔적
서울의 도시사는 수표동 같은 작은 지역 단위에서부터 읽을 수 있다. 도심 재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뤄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하 몇 미터 아래에는 조선 후기의 주거지, 일제강점기의 도로 흔적, 해방 이후의 도시 확장 자취가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 발굴 현장에서 발견되는 유물 하나가 서울의 도시계획사 전체를 다시 쓰게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수표동 일대에서 발견된 근대기 벽돌 구조물은 서울 도심의 건축 기술 변화와 생활 수준의 향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현대의 문화재 조사와 과거의 기록이 만날 때
오늘날 문화재 발굴 기관들은 바로 이런 과거의 데이터와 유적 현장을 연결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 전 단계에서 토지의 역사적 가치를 조사하는 필수 절차이며, ‘시굴조사’나 ‘표본조사’는 실제로 유구(遺構)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과학적 방법이다.
서울 도심의 공사 현장에서는 이러한 조사 과정을 통해 예상치 못한 유물이 출토되는 일이 빈번하다. 수표동 일대도 예외가 아니다. 건물 신축이나 재개발 공사 전, 지표조사를 통해 조선 후기의 주거지, 근대기 상점 터, 일본식 주택의 기단부 등이 확인되기도 했다.
과거를 밝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의 도시 기억
문화재 조사는 단순히 옛것을 캐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도시를 이해하는 일’이며, 동시에 ‘미래의 도시를 설계하는 일’이다. 서울의 중심지 한가운데에서 100여 년 전의 땅 주인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복원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수표동의 과거는 곧 서울의 근대화 과정이며, 오늘날 도시가 지닌 정체성의 뿌리다.
성공적인 문화재 조사 사례와 시민의 역할
서울 중구의 한 재개발 현장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조선 후기의 도로 구조와 우물터가 발견되어 공사 계획이 일부 수정된 적이 있다. 이처럼 문화재 조사는 도시 발전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더 깊은 역사와 정체성을 살리는 중요한 과정이다.
또한 최근 시민 참여형 문화재 조사 프로그램이 확산되며, 일반인들도 서울의 발굴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참여는 서울의 역사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결론: 서울 수표동, 땅이 기억하는 시간의 기록
1912년 수표동의 98필지, 25,381㎡의 대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한 도시의 시작점이자,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흔적은 오늘날 서울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속에 서울의 진짜 이야기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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