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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땅이 들려주는 1912년의 이야기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지금 네가 사진 찍는 그 부암동 카페 자리, 1912년엔 밭이었다


감성 명소로 유명한 부암동의 숨겨진 얼굴 — 396필지, 100만㎡에 달하는 농경지와 임야, 그리고 일본인이 파고든 14필지의 땅.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1912년의 진짜 부암동


목차

1. 시간을 거슬러, 1912년 부암동으로

2. 396필지의 땅이 들려주는 마을의 풍경

3. 141필지의 집터 —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4. 성씨별 토지 지도 — 김씨·이씨·윤씨의 마을

5. 밭 227필지, 부암동을 뒤덮은 농경의 땅

6. 임야·사사지·잡종지가 말해주는 것

7. 일본인 14필지 — 기억해야 할 흔적

8.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사실들

9. 오늘의 부암동, 과거를 마주하다

10. 왜 지금, 발굴이 필요한가


부암동 하면 뭐가 떠오르냐. 감성 카페, 한옥 게스트하우스, 북악산 뷰, 인증샷 명소. 맞다. 그런데 딱 100년 전, 이 동네를 걷는 사람이 봤던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카페 자리는 밭이었고, 게스트하우스 자리는 기와집이었으며, 산 아래 숲에선 주민들이 땔감을 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엔 일본인 소유 필지 14개가 조용히 끼어들고 있었다.

1912년 종로구 부암동. 396필지, 1,016,437㎡. 서울 도심 속에 이만한 규모의 농경지와 임야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이미 충격이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의 기록을 꺼내기 전까지, 이 이야기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1. 시간을 거슬러, 1912년 부암동으로

1912년 부암동의 첫인상은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감성 카페도, 아기자기한 빵집도, 주말마다 사람들로 붐비는 골목도 없다. 대신 경사진 지형을 따라 밭이 펼쳐지고, 산 아래엔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숲에선 나무 패는 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풍경이다.

396필지

총 필지 수

1,016,437㎡

총 면적 (약 30만 7천 평)

100만㎡를 넘는 이 면적을 실감하기 어렵다면 이렇게 비교해보자. 여의도 면적이 약 290만㎡인데, 부암동 한 동네의 1912년 토지 기록이 그 약 35%에 해당하는 규모다. 서울 도심 속에 이만한 땅이 대부분 밭과 임야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 동네의 당시 성격을 단번에 보여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규모의 데이터는 발굴 전략 수립에 매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 어떤 용도로 쓰인 땅이 어디에 분포했는지를 파악해야, 그 아래에 어떤 유구와 유물이 잠들어 있을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396필지의 땅이 들려주는 마을의 풍경

396필지를 용도별로 쪼개서 보면 1912년 부암동의 실제 모습이 드러난다. 밭이 압도적으로 많고, 집터가 그 뒤를 따르며, 산과 사찰 부지, 용도 불명의 잡종지가 각자의 자리에 놓여 있다.

227필지

897,885㎡ — 전체의 약 88%

대지 (집터)

141필지

47,544㎡

임야

26필지

69,765㎡

사사지

1필지

198㎡

잡종지

1필지

1,044㎡

일본인 소유

14필지

식민지 시대의 흔적

이 분포 하나만으로 1912년 부암동의 성격이 완전히 설명된다.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 있지만, 그 실체는 농촌 공동체에 훨씬 가까웠다. 주거지보다 밭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건 이 동네 사람들이 흙을 만지며 먹고사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3. 141필지의 집터 —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141필지, 47,544㎡의 대지. 밭에 비하면 작아 보이지만, 이 안에 부암동 사람들의 모든 일상이 담겨 있다. 경사진 지형을 따라 들어선 기와집들,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길이 흐르는 풍수적 명당 자리를 고른 집들. 좁은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장독대 옆에서 어머니가 김치를 담그던 그 풍경이 141이라는 숫자 안에 들어 있다.

부암동의 지형적 특성상 평탄한 땅이 적어, 대지는 주로 경사가 완만한 남향 구릉지에 집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이 들어선 위치가 곧 그 집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도 연결된다. 조망이 좋고 물이 잘 빠지는 명당에는 주도적 가문이, 그보다 불리한 위치에는 소작농이나 소규모 자영업 가구가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141필지 대지 구역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건축 기단, 온돌 유구, 기와 파편, 생활 도기 등이 집중 출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핵심 조사 구역이다. 지형적 특성과 결합하면 당시 거주 패턴을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4. 성씨별 토지 지도 — 김씨·이씨·윤씨의 마을

1912년 부암동의 토지 소유 현황을 성씨별로 보면, 이 동네를 주도하던 가문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동네들과는 다르게 부암동은 상위 성씨의 독점이 덜하고, 꽤 다양한 성씨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순위

성씨

필지 수

비율

1위

김씨

71필지


2위

이씨

68필지


3위

윤씨

39필지


4위

박씨

27필지


4위

유씨

27필지


6위

최씨

24필지


7위

정씨

23필지


8위

민씨

19필지


9위

한씨

16필지


김씨 71필지, 이씨 68필지로 1·2위가 팽팽하다. 다른 동네에서는 한 성씨가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부암동은 다르다. 상위 9개 성씨가 비교적 고르게 땅을 나눠 가졌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단일 가문 중심이 아닌, 다양한 가문이 공존하며 균형을 이루던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윤씨 39필지도 눈에 띈다. 조선 후기 서울에서 윤씨 가문은 여러 정치적 사건과 연관된 유력 가문이었는데, 부암동에서도 상당한 토지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문화재 발굴 시 윤씨 집중 구역에서는 가문 특유의 건축 형식이나 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유구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5. 밭 227필지, 부암동을 뒤덮은 농경의 땅

숫자부터 보자. 227필지, 897,885㎡. 전체 1,016,437㎡ 중 무려 88%가 밭이었다. 이건 단순히 농사를 많이 지었다는 게 아니다. 1912년 부암동은 서울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본질은 농경 공동체였다는 뜻이다.

227필지

밭 필지 수

897,885㎡

농경지 총면적

약 88%

전체 면적 비율

부암동의 지형은 경사진 구릉지가 많아 배수가 잘 되고, 남향을 향한 면이 넓어 일조량이 풍부했다. 채소 재배에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주민들은 이 밭에서 무, 배추, 파 같은 채소를 키워 가족의 밥상을 채우고, 남은 것은 인근 시장에 내다 팔았을 것이다. 지금 부암동의 어느 카페 자리, 어느 갤러리 자리가 그 밭이었는지는 발굴이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88%가 밭이었던 동네, 그게 1912년 부암동의 진짜 얼굴이다. 지금의 감성 명소 뒤에 농부의 하루가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과거 밭 지역은 농업 관련 유물, 토양 성분 분석 시료, 수로 및 배수 시설 흔적이 발견될 수 있는 특수 조사 구역으로 분류된다. 897,885㎡에 달하는 이 구역에서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당시 도시 근교 농업의 실체를 가장 풍부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나올 수 있다.


6. 임야·사사지·잡종지가 말해주는 것

임야 26필지, 69,765㎡. 이 산자락은 당시 주민들의 생존과 직결된 공간이었다. 겨울을 버티기 위한 땔감, 봄과 여름에 채취하는 약초, 그리고 가축을 풀어놓는 방목지. 지금의 도심 공원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용적인 공간이었다. 임야는 종종 마을 공동 소유이거나 특정 가문이 대대로 관리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마을 공동체의 결속과도 깊이 연결된다.

사사지 198㎡는 규모는 작지만 의미가 크다. 사찰이나 사당의 터였을 가능성이 높고, 이 공간은 마을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공동체가 모여 제사를 지내고, 안녕을 기원하고, 계절의 변화를 의례로 맞이하던 자리다. 그 198㎡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소망이 오갔을지를 생각하면 숫자가 달리 보인다.

잡종지 1,044㎡는 기록상 용도가 명확하지 않지만 공동 우물터, 나무 저장 공간, 공용 통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부지들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용도가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물 이용 시설 관련 유구나 공동 저장 시설의 흔적이 출토될 수 있기 때문이다.



7. 일본인 14필지 — 기억해야 할 흔적

여기서 이야기가 무거워진다. 1912년 부암동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14필지 있었다. 그리고 마을 소유 토지가 2필지 기록되어 있었다. 14필지라는 숫자가 전체 396필지 중 약 3.5%에 불과해 보일 수 있지만, 시기를 생각해야 한다. 강제 병합 2년차,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던 바로 그 시점이다.

14필지

일본인 소유

2필지

마을 공동 소유

1912년

강제병합 2년차

14필지는 시작이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 숫자가 어떻게 불어났는지는 기록이 말해준다. 부암동처럼 도시 근교 농경지가 넓게 펼쳐진 지역은 농업 생산성과 개발 가능성을 노린 일본인 지주들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강제 매입, 경제적 불균형을 이용한 소유권 이전, 세금 문제를 내세운 압박. 그 결과물이 이 14필지라는 숫자다.

일본인 소유 필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일본식 기와, 근대식 벽돌 구조물, 일본산 생활 도기 파편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건축 유물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 문화 침투의 물질적 증거로 평가된다. 부암동의 14필지 구역도 이런 관점의 조사가 필요하다.


8.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사실들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의 역사적 잠재력을 평가하는 과정이다. 토지 용도, 소유 구조, 지형 분석, 현장 답사를 종합해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예측한다. 부암동처럼 밭이 88%를 차지하고, 다양한 성씨 가문이 공존했으며, 일본인 소유지까지 섞여 있는 복합적인 지역은 지표조사의 가치가 특히 높다. 다양한 용도의 땅이 공존했던 만큼, 출토 유물의 스펙트럼도 훨씬 넓게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seoulheritage.org는 이런 역사 토지 데이터를 서울 25개 구 전체에 걸쳐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부암동의 396필지 기록이 이 아카이브 안에서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될 때, 그 아래에 잠든 100년 전 농부의 삶이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다.



9. 오늘의 부암동, 과거를 마주하다

현재 부암동은 서울에서 가장 문화적 감수성이 높은 동네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그 감수성의 원천이 사실은 이 동네가 품고 있는 역사의 두께에서 온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본인 소유 토지였던 부지에서 조선 후기 유물과 생활 도구가 다수 발견된 사례는, 땅이 소유자가 바뀌어도 그 안의 기억은 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부암동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기와와 생활 토기가 함께 출토되며 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복원됐고, 해당 지역은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발굴이 규제가 아닌 이 동네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걸 이 사례가 증명한다.

발굴조사를 통해 유구가 확인된 구역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보존·활용 계획이 수립된다. 이는 동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지역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10. 왜 지금, 발굴이 필요한가

지금 부암동 어딘가에 새 건물을 짓거나 기존 건물을 허물고 재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기와 조각 하나, 도기 파편 하나가 공사를 멈추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전에 지표조사를 받아두면 이 리스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다.

227필지의 밭, 141필지의 집터, 14필지의 일본인 소유지. 이 기록이 말하는 건 부암동 땅 아래에 다층적인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를 꺼내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그건 이 땅에서 살다 간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가장 조용한 경의다.


🏛️

88%가 밭이었던 동네, 그 아래에 잠든 농부의 하루

396필지, 1,016,437㎡. 지금의 감성 카페와 갤러리 자리는 100년 전 채소밭이었고, 그 사이 어딘가엔 김씨·이씨·윤씨 가문의 기와집이 있었다. 일본인의 14필지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던 시대의 기록이 지금도 땅 아래에 남아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이다.



부암동 근처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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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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