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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1912년 당시 토지 소유 현황과 역사적 맥락

최종 수정일: 4월 21일

1912년 낙원동에 일본인 25필지가 있었다 — 이 시리즈 최다 기록


303필지 중 일본인 혼자 25필지. 고려시대 기와가 나와 공사가 멈춘 종로의 그 현장. 혜화동 중학교 아래서 조선 초기 유적이 나온 이야기까지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낙원동의 시간


목차

1. 1912년 낙원동, 축구장 8개짜리 마을의 이야기

2. 302필지 대지·밭 1필지·국유지 1필지의 구성

3. 김씨 54필지부터 조씨 10필지까지 — 6개 성씨의 공동체

4. 일본인 25필지·중국인 1필지 — 이 시리즈 최다 외국인 소유지

5. 성씨 정보가 발굴 단서가 되는 순간

6. 종로에서 고려 기와가 나와 공사가 멈춘 이야기

7. 혜화동 중학교 아래 조선 초기 유적 발굴 성공 사례

8. 도시 아래 숨겨진 역사에 귀 기울이기


낙원상가. 종로 한복판에서 악기 소리가 흘러나오는 그 건물 아래에 1912년 낙원동이 잠들어 있다. 303필지, 총 59,854㎡. 크기로 따지면 축구장 약 8개 규모의 땅이다. 그 안에 김씨·이씨·최씨·박씨·정씨·조씨가 살았고, 일본인이 25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25필지.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모든 종로구 동네들 중 단일 외국인 국적의 최대 소유 필지다. 내수동의 8필지도 충격이었는데, 낙원동은 그 세 배를 넘는다. 왜 낙원동에 이렇게 많은 일본인 소유지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지금부터 꺼내본다.

이미지 프롬프트 1 — 도입부

A Korean man in his early 30s standing in front of Nakwon Music Arcade in Jongno Seoul, looking down at the pavement with a contemplative expression, imagining the traditional neighborhood that once existed beneath the building. Street sounds around him. Cinematic photography, Korean person only, no readable text or signage.


1. 1912년 낙원동, 축구장 8개짜리 마을의 이야기

1912년 당시 낙원동은 303필지, 총 면적 59,854㎡의 땅이었다. 축구장 8개 규모라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지금의 낙원상가도, 익선동의 아기자기한 골목도, 번화한 종로 거리도 없던 시절. 이곳은 기와지붕이 이어지고 좁은 골목을 따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르던 평범하고 생생한 동네였다.

303필지

총 필지 수

59,854㎡

총 면적 (축구장 약 8개)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이 숫자들은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니다. 당시 서울의 사회 구조, 권력 관계, 그리고 식민지 현실이 한 장의 토지대장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가 된다.


2. 302필지 대지·밭 1필지·국유지 1필지의 구성

낙원동 303필지의 용도별 구성이 흥미롭다. 302필지 대지(58,091㎡)에 밭은 단 1필지(763㎡), 국유지도 단 1필지. 이 분포가 말하는 게 있다.

대지 (주거·상업)

302필지

58,091㎡ — 전체의 99.7%

1필지

763㎡ — 마지막 농경 흔적

303필지 중 302필지가 주거·상업용 대지라는 사실은 낙원동이 1912년 당시 이미 거의 완전한 도심형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밭 1필지(763㎡)가 그나마 농업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것도 시간의 문제였다.

도시화율 99.7% — 종로구 최고 수준의 도심형 마을

이 높은 도시화율은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오랫동안 주거·상업 공간으로 활용된 도심형 마을은 생활 유물, 건축 기단, 상업 시설 흔적이 가장 촘촘하게 층층이 쌓여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3. 김씨 54필지부터 조씨 10필지까지 — 6개 성씨의 공동체

낙원동의 성씨별 토지 분포는 이 동네가 얼마나 다양한 가문들이 공존하던 공간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김씨

54필지

이씨

45필지

최씨

18필지

박씨

16필지

정씨

15필지

조씨

10필지

낙원동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씨가 45필지로 2위를 차지하며 김씨(54필지)와 격차가 비교적 작다는 것이다. 두 성씨를 합산하면 99필지로 전체의 약 33%다. 또한 정씨 15필지가 상위 5위 안에 자리 잡았다는 점도 낙원동만의 특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동네들에서 정씨가 상위권에 든 경우가 드물었는데, 낙원동에서는 박씨를 바짝 추격하며 5위를 차지했다.

이런 성씨별 분포 정보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발굴 중에 유골이나 토기, 기와가 출토됐을 때 인근 필지의 소유자 정보와 대조하면 어떤 가문의 터였는지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일본인 25필지·중국인 1필지 — 이 시리즈 최다 외국인 소유지

낙원동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가 여기 있다. 일본인 25필지.

25필지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모든 동네들 중 단일 외국인 국적 최대 소유 필지.


내수동 8필지의 3배, 당주동 4필지의 6배가 넘는다.

🇯🇵

25필지

일본인 소유 — 시리즈 최다

🇨🇳

1필지

중국인 소유

303필지 중 26필지, 약 8.6%가 외국인 소유였다. 조선인들의 마을이지만 열 집 중 한 집 꼴로 외국인 소유지가 끼어 있었다. 이 비율이 다른 동네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는 뭘까. 낙원동의 위치가 힌트다. 종로 상권의 핵심에 위치한 낙원동은 상업적 가치가 높은 땅이었고, 일본인 상인과 기업들이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인 25필지는 1912년 강제 병합 2년차의 기록이다. 종로 도심 한복판에서 이미 전체 필지의 8.6%가 일본인 소유로 넘어가 있었다는 사실은, 토지 수탈이 변방이 아닌 서울의 가장 번화한 중심지에서부터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이 25필지에서 문화재 발굴 시 일본식 유물과 조선식 유물이 혼재 출토될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상업 활동의 구체적인 물질 증거가 나올 수 있다.

중국인 1필지도 의미 있다. 당주동에서도 중국인 1필지가 있었는데, 낙원동에서도 같은 숫자가 확인된다. 당시 종로 상권에서 활동하던 중국 상인의 흔적이 낙원동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5. 성씨 정보가 발굴 단서가 되는 순간

1912년 토지대장에 적힌 성씨 정보가 어떻게 실제 발굴조사의 단서가 되는지를 이해하면, 이 기록의 가치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발굴 중에 유물이 나왔을 때 그 유물이 어떤 가문의 물건인지를 추적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낙원동 발굴 구역에서 특정 성씨의 이름이 새겨진 토기나 도장이 나온다면, 토지대장과 대조해 그 가문의 거주 위치와 생활 반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과정이 지표조사의 핵심인 '사람과 땅의 관계를 다시 써내려가는 작업'이다.

지표조사는 단순히 '땅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1912년 토지대장의 성씨 정보와 현재 발굴 유물을 연결해 '어느 가문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복원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역사 기록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강력한 시너지다.


6. 종로에서 고려 기와가 나와 공사가 멈춘 이야기

2022년, 서울 종로의 한 주택가 재건축 현장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고려 시대 기와와 토기 조각이 발견되며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이 발견 하나가 이 지역을 역사문화 보존구역으로 바꿨다. 개발은 최소한의 방식으로 조정됐고, 발굴된 유물은 이후 지역 역사 자료로 활용됐다.

낙원동 인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종로 상권의 핵심 지역이라는 위치상, 낙원동도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오히려 도심화가 일찍 이루어진 지역일수록 지표 아래의 역사 층위가 더 두껍게 쌓여 있을 수 있다.

2022년 종로 고려 기와 발견 사례처럼 지표조사가 공사를 막는 게 아니라 더 현명한 방향으로 개발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낙원동에서도 같은 방식의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서울 상업 문화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7. 혜화동 중학교 아래 조선 초기 유적 발굴 성공 사례

낙원동 인근 혜화동의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 중학교 부지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조선 초기의 유적과 기와 조각들이 다수 출토됐다. 학교 신축 계획과 충돌했지만, 문화재청과의 협의 끝에 유적을 일부 보존하고 지상에 기념 공간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조정됐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매일 자신이 밟고 있는 땅 아래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를 배우게 됐다. 그 공간은 역사 교육의 장으로 승화됐다. 이처럼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히 땅을 파는 일이 아니라, 도시 속 역사와 미래를 잇는 다리다.



8. 도시 아래 숨겨진 역사에 귀 기울이기

오늘 낙원상가 앞을 지나가게 된다면, 잠깐 멈춰서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김씨 가문 54필지의 기와집이 있던 자리일 수도 있고, 이씨 가문의 상점 터였을 수도 있다. 정씨의 마당이었을 수도 있고, 일본인이 소유한 25필지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그 아래에는 어쩌면 고려 시대의 기와가 있을 수도 있다. 조선 초기의 생활 도구가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지표조사 없이 그냥 콘크리트로 덮어버린다면, 그 이야기는 영원히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뿌리를 잃는다.

"당신이 파 내려간 그 땅 속에서 고려시대의 집터, 혹은 조선시대의 생활유물이 나온다면? 그 가치는 단순한 돈으로 따질 수 없고, 도시 전체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중요한 역사 자원이 된다."



낙원상가 아래, 일본인 25필지와 김씨 54필지가 함께 잠들어 있다

303필지, 59,854㎡.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 중 외국인 소유지 최다(일본인 25필지 + 중국인 1필지). 도시화율 99.7%의 도심 한복판. 그리고 고려 기와가 나와 공사가 멈춘 인근의 이야기. 문화재 발굴은 그 모든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약속이다.



낙원동 종로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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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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