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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도렴동 1912년, 그 땅 위에 숨겨진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최종 수정일: 4월 21일

1912년 도렴동에 미국인이 살았다 — 종로 한복판의 예상 밖 기록


김씨 36필지·이씨 21필지·박씨 11필지의 마을, 그리고 미국인 1필지·일본인 2필지. 지금은 정부청사가 들어선 이 땅의 100년 전 진짜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도렴동의 시간


목차

1. 한 장의 지도로 시작된 이야기

2. 1912년 도렴동, 서울의 심장을 기록하다

3. 151필지의 사람들 — 삶의 흔적들

4. 김씨·이씨·박씨의 마을 권력 지도

5. 미국인 1필지·일본인 2필지 — 국제적 공간이었던 도렴동

6.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7. 도렴동 인근 성공 사례 — 경희궁 터가 바꾼 것

8. 지금이 조사를 시작해야 할 타이밍인 이유

9. 서울에서 발굴조사를 의뢰하려면

10. 마무리 — 그냥 덮고 가지 말고, 한 번 들춰보라


도렴동. 지금은 국무총리 공관과 정부청사가 들어선 행정 중심지다. 그런데 1912년 이 땅의 기록을 펼쳐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온다. 미국인. 종로 한복판 도렴동 151필지 중 한 필지가 미국인 소유였다. 일본인 2필지도 있었다. 조선인 가문들과 일본인, 그리고 미국인이 같은 골목을 공유하던 공간이 1912년 도렴동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도렴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정치·외교·문화가 교차하는 특별한 공간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땅 아래에 잠든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다.




1. 한 장의 지도로 시작된 이야기

서울을 걷다 보면 번화한 거리와 높은 건물들 사이로 문득 옛것이 불쑥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돌담 하나, 오래된 계단 하나, 그리고 '도렴동' 같은 이름만 들어도 어딘가 과거를 품고 있는 지명처럼. 지금은 정부 행정의 중심지로 알려진 이 동네가 100년 전에는 얼마나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오래된 지도 한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지도 속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름이었다. 조선인 성씨들 사이에 적혀 있는 미국인 소유자. 이 한 줄의 기록이 도렴동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2. 1912년 도렴동, 서울의 심장을 기록하다

1912년 종로구 도렴동은 151필지, 총 24,568㎡의 땅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약 7,430평 규모다. 규모 자체는 다른 종로구 동네들과 비슷하지만, 이 동네의 특별함은 면적이나 필지 수가 아니라 소유자의 다양성에 있다.

151필지

총 필지 수

24,568㎡

총 면적 (약 7,430평)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조선 시대부터 중요 시설들이 밀집했던 이 지역은 1912년에도 그 성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종로 중심부에 위치한 도렴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행정, 외교, 상업이 겹쳐지는 복합 공간이었다. 그것이 미국인 소유지가 이 동네 안에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3. 151필지의 사람들 — 삶의 흔적들

151필지. 그 안에는 151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아침마다 장사 준비로 분주했을 것이고, 어떤 집에서는 학문을 논하는 선비의 붓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필지에서는 조선의 언어도 일본어도 아닌 영어가 오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 복잡한 공존이 1912년 도렴동의 진짜 얼굴이다. 전통과 근대, 조선과 식민지, 동양과 서양이 한 동네 안에서 뒤섞이던 그 복잡한 시간이 지금 이 땅 아래에 층층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그 층위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4. 김씨·이씨·박씨의 마을 권력 지도

조선인 소유자들 사이에서도 분명한 서열이 있었다. 김씨가 36필지로 압도적인 1위, 이씨가 21필지, 박씨가 11필지였고, 최씨·정씨·윤씨 등이 뒤를 이었다.

순위

성씨

필지 수

비율

1위

김씨

36필지


2위

이씨

21필지


3위

박씨

11필지


그 외 최씨·정씨·윤씨 등 다수 성씨 분포

이 동네에서 김씨가 1위라는 점은 다른 종로구 동네들과 다르다. 대부분의 동네에서는 이씨가 1위였는데, 도렴동에서는 김씨가 압도적으로 많은 필지를 보유했다. 이는 도렴동에 특정 김씨 계열 가문이 오랜 시간 이 지역에서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쌓아왔음을 시사한다.

이런 성씨별 토지 분포 데이터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핵심 기초 자료가 된다. 어느 구역에서 어떤 성씨가 집중됐는지를 알면, 그 아래에서 어떤 성격의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지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미국인 1필지·일본인 2필지 — 국제적 공간이었던 도렴동

이 글의 시작에서부터 계속 언급된 핵심 이야기다. 1912년 도렴동에는 미국인이 1필지, 일본인이 2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다른 종로구 동네들에서는 일본인 소유지가 있는 경우는 있었지만, 미국인 소유지가 등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

148필지

조선인 소유

🇯🇵

2필지

일본인 소유

🇺🇸

1필지

미국인 소유

미국인 소유 1필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912년 당시 조선에 있던 미국인은 대부분 선교사, 외교관, 혹은 상인이었다. 도렴동은 경복궁과 가깝고 당시 주요 외교 공관들이 인근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이 미국인 소유지가 종교·외교 관련 기관이나 거주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인 소유 1필지는 단순한 외국인 거주 기록이 아니다. 1912년 조선에서 미국인이 특정 지역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지역이 외교·선교·상업 네트워크의 거점이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도렴동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닌 정치·외교적 요충지였음을 이 한 필지가 증명한다.

일본인 2필지는 앞서 살펴본 다른 종로구 동네들과 같은 맥락이다. 강제 병합 2년차, 식민지 경제 침투의 일부였다. 그런데 미국인과 일본인이 같은 동네에 공존했다는 사실이 1912년 도렴동의 복잡성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인·일본인·미국인이 한 골목을 나눠 쓰던 그 공간이 문화재 발굴의 시각에서 얼마나 풍부한 유물을 품고 있을지를 상상해볼 수 있다.



6.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의 이력을 추적하는 과학적 사전 절차다. 땅을 파지 않고도 지표면에서부터 문화재가 존재할 가능성을 판단한다. 건물을 짓기 전, 공사를 시작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도렴동처럼 조선 시대부터 중요 시설이 몰렸던 지역, 외교 공관과 가까운 지역, 그리고 미국인·일본인 소유지까지 있었던 복합 문화권 지역은 지표조사에서 매우 풍부한 정보가 나올 수 있다. 조선식 유구, 근대식 건축 구조물, 서양식 생활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함께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가장 독특한 발굴 대상지 중 하나다.

도렴동은 조선식·일본식·서양식 세 가지 문화권의 물질 흔적이 같은 땅에 공존할 가능성이 있는 매우 드문 발굴 대상지다. 서울 어느 동네에서도 이런 조합의 유물이 함께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7. 도렴동 인근 성공 사례 — 경희궁 터가 바꾼 것

도렴동 인근에서 진행된 발굴 성공 사례 중 가장 극적인 것이 경희궁 터 복원 사업이다. 시굴조사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쏟아져 나오면서 서울시가 개발 계획을 전면 재검토했고, 그 결과 경희궁이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지금 시민들이 방문할 수 있는 역사 공간이 됐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발굴이 개발을 막은 게 아니라, 개발의 방향을 더 나은 쪽으로 바꿨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의 건물 터, 백자 조각, 생활 유물이 발견되면서 단순한 재개발 구역이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만약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강행했다면 그 역사는 콘크리트 속에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경희궁 터 복원 사례처럼 발굴조사가 도시계획 자체를 바꾸는 경우, 그 결과는 단순한 유물 보존을 넘어 도시 브랜딩과 문화 관광 자원으로 이어진다. 도렴동도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다.



8. 지금이 조사를 시작해야 할 타이밍인 이유

도렴동은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아도 될 땅'이 아니다. 오히려 서울의 정체성을 복원할 수 있는 열쇠를 쥔 땅일 수 있다. 조선인, 일본인, 미국인이 공존하던 이 복합 문화권의 흔적이 땅 아래에 그대로 잠들어 있다면, 그것은 서울 어느 동네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역사 자료가 된다.

무엇보다 도렴동 일대는 현재도 정부 기관과 행정 시설이 집중되어 있어 개발과 보수 공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발굴 없이 진행되는 공사는 역사를 지우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서울 도심에서 문화재 발굴이 이루어지면 지역 브랜딩, 관광 자원화, 역사 교육 자료로 무한한 가치 창출이 가능하다. 조사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9. 서울에서 발굴조사를 의뢰하려면

서울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의뢰하고 싶다면 국가유산청 허가를 받은 전문 조사기관을 통해 정식 절차를 밟으면 된다. seoulheritage.org는 서울 지역 문화유산 발굴조사에 특화된 전문 플랫폼으로, 현장 컨설팅부터 보고서 작성까지 체계적으로 지원한다.

개발사업자, 건축주, 지방자치단체, 일반 시민 누구든 조사 의뢰가 가능하다. 단 한 필지라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도렴동의 151필지처럼, 그 중 한 필지가 미국인 소유였던 것처럼 말이다. 단 한 필지의 기록이 동네 전체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10. 마무리 — 그냥 덮고 가지 말고, 한 번 들춰보라

오늘 도렴동 근처를 지나게 된다면, 잠깐 멈춰서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김씨 가문의 넓은 대지였던 자리일 수도 있고, 선교사 혹은 외교관이었던 미국인의 거주지였을 수도 있다. 일본인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2필지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151필지, 24,568㎡. 이 숫자 뒤에는 조선인과 일본인과 미국인의 이야기가 한데 뒤섞여 있다.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같은 골목에서 공존하던 그 시간이 지금도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그냥 덮고 가지 말고, 한 번쯤 들춰보라." — 1912년 도렴동 지도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말



🏛️

조선인·일본인·미국인이 한 골목을 나눠 쓰던 1912년의 도렴동

151필지, 24,568㎡. 김씨 36필지의 마을, 미국인 1필지, 일본인 2필지. 지금 정부청사가 들어선 이 땅 아래에 조선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뒤섞이던 1912년의 기억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약속이다.



도렴동 인근에서 건축이나 공사를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지표조사 의뢰 방법 알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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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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