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동에도 숨겨진 역사가 있다고? 지금은 공항 근처의 평범한 동네지만, 1912년 방화동은 우리가 알지 못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 서울 HI
- 6월 9일
- 3분 분량
목차
하늘이 비추던 넓은 논, 방화동의 시작
오순도순 집들이 모였던 마을 풍경
과거를 묻은 땅, 소박한 무덤 이야기
숲속으로 사라진 길, 방화동의 작은 산들
다채로운 풍경이 숨겨진 잡종지
땅이 준 선물, 끝없이 펼쳐진 밭
방화동의 사람들, 성씨에 숨은 이야기
모두를 위한 공간, 국유지의 의미
하늘이 비추던 넓은 논, 방화동의 시작

지금 방화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김포공항이나 현대적인 아파트 단지일 거야.
하지만 약 100년 전, 방화동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어.
1912년 강서구 방화동은 전체 면적 4,031,115㎡ 중 절반 가까운 1,985,718㎡가 논이었다는 사실!
그 넓은 논은 332필지나 되었으니, 당시 방화동은 물결치는 논이 끝없이 펼쳐진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었을 거야.
한강과 맞닿은 방화동의 논에서는 바람이 물 위로 스쳐 지나가며 아름다운 물결을 만들었겠지.
농부들이 논에서 땀을 흘리며 벼를 심고 수확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절로 든다.
오순도순 집들이 모였던 마을 풍경
논 사이로 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주민들이 터를 잡고 살았어.
당시 방화동에는 총 60필지, 면적으로 133,729㎡의 집들이 있었어.
지금의 아파트 단지와는 달리 소박하고 낮은 흙집들이 모여 있던 방화동은 작은 마을의 정겨운 풍경을 품고 있었지.
해 질 무렵이면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마을 주민들이 오가며 나누는 정겨운 이야기들이 마을 곳곳에 울려 퍼졌을 거야.
이런 소소한 모습이야말로 역사의 진짜 매력이 아닐까?
과거를 묻은 땅, 소박한 무덤 이야기
방화동에도 조용히 숨겨진 공간이 있었어.
1912년의 기록을 보면 10필지, 15,619㎡의 분묘지가 존재했어.
당시 사람들은 삶의 터전 가까이에서 조상들을 기억하며 마음을 달래곤 했겠지.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과거의 주민들이 영원을 꿈꾸며 세운 이 작은 무덤들은 그 시절 삶과 죽음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남아 있는 거야.
숲속으로 사라진 길, 방화동의 작은 산들
지금 방화동에서 자연이라면 대부분 공원과 가로수지만, 1912년 방화동에는 푸른 숲이 우거진 작은 산들이 있었어.
방화동의 숲은 총 10필지, 면적 35,177㎡ 규모였지.
크지는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숲을 통해 나무를 얻고, 쉬기도 하며 삶의 휴식처로 활용했겠지.
숲길 사이로 햇빛이 비추는 풍경을 떠올리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어.
다채로운 풍경이 숨겨진 잡종지
방화동은 논과 밭, 산 말고도 특별한 공간이 있었어.
바로 11필지, 278,245㎡에 달하는 잡종지였지.
‘잡종지’란 이름은 조금 낯설지만, 다양한 용도로 쓰였을 공간이라는 의미야.
때론 시장이 들어섰거나, 마을의 공용 공간으로 쓰였을 수도 있고, 때론 소와 말이 쉬어가던 방목지였을지도 몰라.
이런 공간은 마을 주민들에게 필요한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 준 마법 같은 장소였지.
땅이 준 선물, 끝없이 펼쳐진 밭
1912년 방화동에서 논 다음으로 많았던 건 역시 밭이었어.
324필지, 무려 1,582,625㎡에 이르는 거대한 밭이 펼쳐져 있었어.
이곳에서 주민들은 온갖 곡식과 채소를 키우며 일년 내내 삶의 근본적인 먹거리를 마련했겠지.
봄이면 싹이 돋고, 여름이면 무성해지며, 가을이면 풍성하게 열매 맺는 풍경을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방화동의 사람들, 성씨에 숨은 이야기
방화동의 땅은 주민들의 성씨와 함께 살아 숨 쉬었어.
가장 많이 땅을 소유한 성씨는 심씨로 무려 129필지나 가지고 있었어.
뒤이어 권씨가 128필지, 김씨가 104필지, 이씨가 97필지, 최씨가 76필지를 소유하며 다양한 성씨들이 땅 위에 자신만의 역사를 써 내려갔지.
그 밖에도 노씨, 정씨, 강씨, 문씨, 윤씨, 장씨, 유씨, 황씨 등이 함께 어우러져 다양한 삶을 이루었어.
땅 위에 쓰여진 이 다양한 성씨들은 지금도 방화동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작은 이야기로 남아 있겠지.
모두를 위한 공간, 국유지의 의미
방화동에도 함께 쓰기 위한 공간이 있었어.
1912년 당시 18필지가 국유지로 지정돼 있었지.
이 땅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마을 공동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축제를 열거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거야.
이런 공간이 있었기에 주민들의 관계는 더 깊어지고 마을은 따뜻한 공동체로 성장했을 거야.
1912년 방화동을 이렇게 하나씩 따라가 보면, 지금 우리가 보는 도시 속에도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지금 우리가 걷는 길,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아래에도 이 특별한 역사가 숨 쉬고 있겠지?
방화동의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 우리가 쓰는 이야기 또한 미래의 누군가에게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거야.
역사를 기억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나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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