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강서구 방화동에도 숨겨진 역사가 있다고? 지금은 공항 근처의 평범한 동네지만, 1912년 방화동은 우리가 알지 못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 2025년 6월 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김포공항 옆 방화동, 100년 전엔 벼가 출렁이는 끝없는 들판이었다
1912년 강서구 방화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캐낸 땅과 사람의 이야기
지금 방화동에 서 있다면,
잠깐만 눈을 감아봐.
비행기 소음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벼 이삭 소리,
아스팔트 대신 맨발로 밟으면 촉촉한 논둑 흙길.
그게 불과 100년 전 이 땅의 진짜 모습이었다.

목차
하늘이 비추던 넓은 논, 방화동의 시작
오순도순 집들이 모였던 마을 풍경
과거를 묻은 땅, 소박한 무덤 이야기
숲속으로 사라진 길, 방화동의 작은 산들
다채로운 풍경이 숨겨진 잡종지
땅이 준 선물, 끝없이 펼쳐진 밭
방화동의 사람들, 성씨에 숨은 이야기
모두를 위한 공간, 국유지의 의미
방화동을 아는가. 강서구에 위치한 이 동네는 요즘 김포공항 인근 주거지로 알려져 있고, 9호선이 뚫리면서 서울 서쪽 끝자락의 평범한 아파트 밀집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특별히 역사적인 동네라는 인상은 없다. 그런데 1912년 기록을 펼쳐보는 순간, 그 인상이 완전히 뒤집힌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1912년 일제 토지조사부를 분석한 결과, 방화동은 당시 서울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큼 광활한 논과 밭이 펼쳐진 거대한 농경 지대였다. 그 숫자들이 이 동네를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든다. 지금부터 하나씩 들어가 보자.
1. 하늘이 비추던 넓은 논, 방화동의 시작
1912년 강서구 방화동의 전체 면적은 4,031,115㎡였다. 여의도 면적의 약 1.4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리고 그 땅의 절반 가까운 1,985,718㎡, 332필지가 논이었다.
4,031,115㎡
방화동 전체 면적
332필지
논 (1,985,718㎡)
324필지
밭 (1,582,625㎡)
60필지
대지 (133,729㎡)
10필지
분묘지 (15,619㎡)
10필지
임야 (35,177㎡)
332필지의 논. 이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감이 오는가. 한 필지당 평균 5,981㎡, 그게 332개나 이어진 거다. 지금 방화동 어딘가에 남아 있는 아파트 단지 하나가 논 한 필지 안에 들어설 수 있을 크기다. 그런 논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고 상상해봐.
한강과 가까운 방화동의 지리적 특성은 논농사에 최적이었다. 강에서 끌어다 쓸 물이 풍부했고, 평지가 넓어 논의 경계를 잇는 두렁이 촘촘히 이어졌을 거다. 봄에 모내기가 시작되면 온 마을이 들썩이고, 가을 추수 때면 황금빛 벼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던 그 방화동이 지금의 이 콘크리트 동네와 같은 땅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광활한 논이 있던 지역은 수리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을 끌어들이던 수로, 논의 경계를 표시하던 두렁, 농기구를 보관하던 창고 터 같은 것들이 땅 아래 층위에 기록되어 있을 수 있다. 논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2. 오순도순 집들이 모였던 마을 풍경
그 드넓은 논과 밭 사이로 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1912년 방화동에는 60필지, 133,729㎡에 달하는 대지가 있었다. 지금의 아파트 동네와는 비교도 안 되게 소박한 규모지만, 그 집들 하나하나에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초가지붕 아래 작은 마당, 그 마당에 줄지어 선 장독대, 저녁이면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지금은 상상도 하기 어렵지만, 그게 당시 방화동 60개 필지 위에서 펼쳐지던 하루하루의 일상이었다. 이웃집 담장 너머로 나물 반찬 하나 건네고, 농번기엔 서로 품앗이하며 논을 함께 갈던 그 공동체가 이 땅에 살아 있었다.
지금 방화동의 빌라와 아파트가 들어선 그 자리 어딘가에, 1912년의 집터가 남아 있을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중요한 유구다. 아궁이의 재층, 기와 조각, 토기 파편, 부뚜막 흔적 같은 것들이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복원해주기 때문이다. 집은 사라져도 삶의 흔적은 남는다.
"집은 사라졌지만, 그 집에서 밥을 짓고 아이를 재우던 이야기는 땅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3. 과거를 묻은 땅, 소박한 무덤 이야기
1912년 방화동에는 분묘지가 있었다. 10필지, 15,619㎡. 논과 밭 사이, 마을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 잡은 조상들의 무덤이 10필지에 걸쳐 퍼져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무덤은 지금과 전혀 다른 의미였다. 멀리 떨어진 공원묘지가 아니라, 마을 가까이에 선조들을 모시는 게 자연스러웠다. 명절이면 온 가족이 함께 무덤을 찾아 벌초를 하고, 제사를 올리고, 그 앞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가족의 유대를 확인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그 방식이, 당시 방화동의 일상이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는 특별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영역이다. 조선 시대 묘에서는 피장자의 신분과 생활상을 알려주는 유물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백자 제기, 금속 장신구, 의복 조각, 비석 등. 이 10필지 어딘가에 그런 유물이 아직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발굴 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거다.

4. 숲속으로 사라진 길, 방화동의 작은 산들
1912년 방화동에는 임야가 10필지, 35,177㎡ 있었다. 논과 밭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숫자지만, 이 작은 숲이 마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겨울을 나려면 땔감이 필요했다. 전기도 가스도 없던 시절, 아궁이에 넣을 나무는 숲에서 직접 구해와야 했다. 방화동의 임야 10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연료를 공급하는 생존의 공간이었다. 봄가을엔 버섯과 나물을 캐러 가는 아이들의 발소리가 그 숲길에 가득했을 테고, 여름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땀을 식히는 농부들이 있었을 거다.
지금 그 숲은 찾아볼 수 없다. 오래전에 벌목되고 개발됐을 테니까. 하지만 토양 분석을 통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과거 임야였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나무뿌리가 분해된 토양층, 숯 조각, 낙엽이 퇴적된 층위. 숲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땅속에 층위로 남아 있다.
5. 다채로운 풍경이 숨겨진 잡종지
1912년 방화동 토지 기록에서 흥미로운 항목이 하나 있다. 잡종지, 11필지에 278,245㎡다. 논도 밭도 집도 아닌 이 땅은 과연 어떤 용도였을까.
'잡종지'라는 명칭은 용도가 딱 하나로 정해지지 않은 복합적인 공간을 뜻한다. 시장이 열리던 공터였을 수도 있고, 소와 말을 방목하던 목초지였을 수도 있다. 마을 공동 우물 주변의 공간이거나, 마을 제사를 올리던 당집 터였을 가능성도 있다. 278,245㎡라는 꽤 넓은 면적이니, 어쩌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함께 쓰는 광장 같은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잡종지는 특히 주목해야 할 공간이다.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시장이 있었다면 거래에 쓰인 도기와 동전, 목초지였다면 동물 뼈와 관련 도구, 종교 공간이었다면 제기와 불상 파편 같은 것들. 용도가 불분명한 땅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수 있다.
6. 땅이 준 선물, 끝없이 펼쳐진 밭

방화동에서 논 다음으로 넓은 땅은 밭이었다. 324필지, 1,582,625㎡. 논과 합치면 방화동 전체 면적의 약 88%가 농경지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1,582,625㎡의 밭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는가. 축구장 약 220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면적이다. 그 땅에서 봄이면 씨앗이 뿌려지고, 여름이면 초록이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수확의 계절이 왔다. 콩, 보리, 고추, 배추, 무. 방화동 밭에서 자란 작물들이 이 동네 사람들의 일 년 먹거리를 책임졌을 거다.
324필지의 밭은 그 주인도 다양했을 거다. 큰 땅을 가진 지주도 있었고, 작은 밭 한 뙈기로 가족을 먹여 살리던 소농도 있었을 거다. 그 크고 작은 차이가 당시 방화동의 사회 구조를 만들었고, 그 구조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 땅은 단순한 경제 단위가 아니었다. 그건 삶 그 자체였다.
7. 방화동의 사람들, 성씨에 숨은 이야기
1912년 방화동 토지 기록을 보면 수많은 성씨들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건 심씨로 129필지였다. 심씨 다음으로 권씨 128필지, 김씨 104필지, 이씨 97필지, 최씨 76필지 순이었고, 노씨·정씨·강씨·문씨·윤씨·장씨·유씨·황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함께 이 땅에서 살았다.
129필지
심씨
128필지
권씨
104필지
김씨
97필지
이씨
76필지
최씨
심씨 129필지. 청송 심씨나 풍산 심씨 계열이라면, 조선 시대부터 강서 일대에 뿌리를 내린 가문일 가능성이 있다. 권씨 128필지도 마찬가지다. 특정 본관의 권씨 일가가 방화동 일대를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다면, 그 가문의 선산과 문중 기록이 이 지역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다.
흥미로운 건 1위와 2위인 심씨와 권씨가 단 1필지 차이라는 거다. 129 대 128. 두 가문이 방화동 땅을 두고 거의 대등하게 분포했다는 건, 어쩌면 두 집안이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거나, 각자의 영역을 나눠 공존하는 관계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성씨 기록은 단순한 족보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성씨 분포를 지도 위에 올리면 당시 마을 공동체의 사회적 구조가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어느 성씨가 어느 구역의 논을 가졌고, 어느 구역에 집을 지었는지. 그 공간 패턴이 유물의 귀속을 특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8. 모두를 위한 공간, 국유지의 의미

1912년 방화동 토지 기록의 마지막 항목은 국유지다. 18필지가 국가 소유로 등록되어 있었다.
당시 국유지는 어떤 땅이었을까. 도로와 수리 시설처럼 공공 목적으로 쓰이는 땅이 대부분이었다. 방화동처럼 논이 많은 지역에서는 관개 수로와 제방 같은 물 관리 시설 부지가 국유지로 관리됐을 가능성이 높다. 332필지의 논에 물을 대려면 체계적인 수리 시스템이 필요했을 테니까.
또한 마을 주민 모두가 함께 쓰는 공유지 성격의 공간도 국유지로 분류됐을 수 있다. 마을 회의를 열거나, 명절에 함께 모여 행사를 치르는 공터 같은 곳. 지금으로 치면 마을 광장이나 공원 같은 역할이다. 그 18필지 위에서 방화동 사람들이 함께 웃고 이야기 나눴을 장면이 그려진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국유지는 민간 소유 땅과 또 다른 가능성을 품는다. 공공 시설이 있던 자리라면 관련 기물이나 건축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고, 공유지였다면 마을 공동체의 행사와 관련된 유물이 나올 수도 있다. 작은 단서 하나가 당시 방화동 공동체의 문화와 생활 방식 전체를 복원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건설 공사가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에 매장된 문화재가 있는지 미리 확인하는 사전 조사. 사업 면적 3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설 공사는 법적으로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 조사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방화동처럼 광대한 농경지가 있던 지역은 그 아래에 다양한 역사 층위가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 지표조사의 중요성이 특히 크다.

1912년 방화동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오다 보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땅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품고 있는지 느껴진다. 332필지의 논, 324필지의 밭, 60필지의 집, 10필지의 무덤, 10필지의 숲, 11필지의 잡종지, 18필지의 국유지. 이 숫자들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바로 이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개발이 모든 것을 지워버리기 전에, 그 땅이 살아온 시간을 먼저 읽어내는 것. 그게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시굴조사이고, 발굴조사의 존재 이유다.
방화동은 지금도 계속 변하고 있다. 낡은 건물이 헐리고,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넓어지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기억하는 가장 성실한 방법이 바로 지표조사이고 발굴 기록이다. 방화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방화동을 지나칠 때, 딱 한 번만 멈춰서봐.
지금 네 발 아래, 심씨 가문의 논이 있었고,
권씨 집안의 밭이 있었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조상이 잠들어 있었다.
그 땅에서 태어나고, 일하고, 늙어가던
방화동 사람들의 시간이 아직 거기 있다.
역사는 과거에 있지 않다.
지금 네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바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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