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구 천호동에도 1912년의 역사가 살아있다!
- 2025년 6월 8일
- 5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롯데백화점이 서 있는 그 땅, 100년 전엔 한강 물이 드나들던 논이었다
1912년 강동구 천호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캐낸 흙과 사람의 이야기
지금 천호역 4번 출구를 나서는 순간,
한 가지만 기억해줬으면 해.
네 발 밑 이 땅이, 100년 전엔
한강 물을 머금은 촉촉한 논이었다는 것.
그 논에서 누군가의 1년 치 밥이 자랐다.

목차
시작은 흙과 물, 천호동의 숨겨진 논 이야기
사람의 온기가 머물던 작은 집들의 흔적
시간의 흔적, 소박하지만 특별한 무덤의 존재
자연이 품은 산, 천호동의 숨겨진 숲길
흙에서 피어난 생명, 밭의 광활한 이야기
땅에 담긴 성씨들, 그들이 남긴 자취
모두의 땅, 국유지의 이야기
천호동 하면 뭐가 먼저 떠오르는가. 천호역, 롯데백화점, 이마트, 북적이는 상권. 강동구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 바로 천호동이다. 그런데 딱 110년 전, 이 땅의 풍경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고층 빌딩도, 지하철역도, 백화점도 없었다. 대신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벼 이삭이 흔들리고, 밭두렁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던 조용한 농촌 마을이 있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을 따라가면, 지금의 천호동이 전혀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시간여행을 지금 시작해보자.
1. 시작은 흙과 물, 천호동의 숨겨진 논 이야기
1912년 강동구 천호동의 전체 면적은 1,856,943㎡였다. 그리고 그 안에 논이 102필지, 508,529㎡ 펼쳐져 있었다. 전체 면적의 약 27%가 논이었다는 뜻이다.
1,856,943㎡
천호동 전체 면적
102필지
논 (508,529㎡)
344필지
밭 (1,087,631㎡)
35필지
임야 (230,814㎡)
43필지
대지 (23,791㎡)
2필지
분묘지 (5,176㎡)
508,529㎡의 논. 여의도 면적의 약 5분의 1에 달하는 논이 천호동에 있었다. 한강과 맞닿은 천호동은 물을 끌어다 쓰기 좋은 지리적 조건 덕분에 논농사에 유리했다. 봄이면 모내기로 온 마을이 바빴고, 여름이면 초록빛 벼가 무성하게 자랐고, 가을이면 황금빛 들판이 천호동 전체를 감쌌을 거다.
지금 천호역 주변의 그 번잡한 거리가 당시엔 물 위에 하늘이 비치는 논이었다는 사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동시에 묘하게 아름답기도 하지 않은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옛 논의 흔적은 토양 층위 분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논의 독특한 점토질 퇴적층은 수백 년이 지나도 지층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이 닿고 흙이 품었던 그 논에서, 이름 모를 천호동 사람들의 밥이 자라났다."
2. 사람의 온기가 머물던 작은 집들의 흔적

논과 밭 사이로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1912년 천호동의 대지는 43필지, 23,791㎡. 전체 면적에서 보면 아주 작은 비율이지만, 그 43개 필지 하나하나에 가족의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집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흙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거나 볏짚으로 지붕을 만든 소박한 집들이었을 거다.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에 우물이 있었을 테고, 여름이면 마루에 앉아 부채질하며 이웃과 담소를 나눴을 거다. 겨울이면 아궁이 불빛 아래에서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그 풍경이 천호동 43필지 위에 있었다.
지금 천호동 어딘가에 아파트가 들어선 그 자리에, 100년 전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핵심 유구 중 하나다. 아궁이의 재층, 온돌 구조, 기와 파편, 생활 도기 조각들이 층층이 쌓여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복원하는 단서가 된다. 집은 사라져도 삶의 온기는 흙 속에 남는다.
3. 시간의 흔적, 소박하지만 특별한 무덤의 존재
1912년 천호동에는 분묘지가 2필지, 5,176㎡ 있었다. 논이나 밭에 비하면 눈에 띄지 않는 숫자지만, 이 두 필지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당시 천호동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조상을 마을 가까이에 묻었다. 그건 단순히 땅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조상을 곁에 두고 기억하는 것, 제사 때마다 찾아가 절을 올리는 것, 그게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 분묘지 2필지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을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는 특히 신중하게 다루는 영역이다. 조선 시대 묘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신분과 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종종 나오기 때문이다. 백자 제기, 청동 거울, 목관 흔적, 비석 조각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이 두 필지 어딘가에 그런 이야기가 아직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발굴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거다.
4. 자연이 품은 산, 천호동의 숨겨진 숲길
천호동에 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1912년 기록에는 임야 35필지, 230,814㎡가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230,814㎡. 축구장 약 32개를 채울 수 있는 숲이 천호동에 있었다. 그 숲에서 마을 사람들은 겨울 땔감을 구했고, 봄엔 나물을 캤고, 여름엔 그늘 아래서 쉬었다. 아이들은 그 숲속 흙길을 맨발로 뛰어다니며 자랐을 거다. 지금 천호동 어딘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그 구릉이 어쩌면 그 숲의 자리였을지 모른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임야였던 지역은 흥미로운 가능성을 품는다. 숲속에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숲 가장자리에 작은 사당이나 제단 같은 종교적 공간이 있었던 경우도 있다. 토양층에 남은 나무뿌리 흔적, 숯 조각, 낙엽 퇴적층은 그 땅이 숲이었다는 걸 수백 년이 지나도 증명해낸다.

5. 흙에서 피어난 생명, 밭의 광활한 이야기
천호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건 밭이었다. 344필지, 무려 1,087,631㎡. 전체 면적의 58%가 넘는 땅이 밭이었다.
1,087,631㎡. 서울 월드컵공원 면적과 맞먹는 크기의 밭이 천호동에 있었다. 그 땅에서 배추, 무, 콩, 보리, 고추가 자랐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잡초를 뽑고, 가을에 수확을 하고, 겨울에 김장을 담그는 일이 이 344필지 위에서 해마다 반복됐다. 그게 천호동 사람들의 달력이었고, 리듬이었다.
344필지의 밭을 일군 사람들은 대부분 소농이었을 거다. 큰 지주도 있었겠지만, 한 뙈기 두 뙈기 작은 밭을 갈아 가족의 겨울 식량을 마련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거다. 그 손이 닿은 흙이 지금도 아파트 지하 어딘가에 층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층위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6. 땅에 담긴 성씨들, 그들이 남긴 자취
1912년 천호동 토지 기록에는 수많은 성씨들이 등장한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건 이씨로, 183필지를 소유했다. 그다음은 김씨 81필지, 심씨 72필지였고, 구씨·유씨·우씨·정씨·안씨·신씨 등이 각각 수십 필지씩 소유하며 천호동의 토지 지형도를 만들었다.
183필지
이씨
81필지
김씨
72필지
심씨
구씨·유씨
각 수십 필지
이씨 183필지라는 숫자가 인상적이다. 전체 필지의 상당한 비율을 한 성씨가 차지하고 있다는 건, 이씨 일가가 천호동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들의 선산, 문중 사당, 족보 기록이 이 땅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천호동의 역사를 훨씬 풍부하게 복원할 수 있을 거다.
심씨 72필지도 눈에 띈다. 이씨와 김씨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은 땅을 가진 심씨 집안이 누구인지 추적할 수 있다면, 방화동에서 등장했던 심씨와 같은 계열인지도 확인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서울 곳곳에 퍼진 성씨 분포를 연결하면, 조선 후기 서울 동쪽 지역 사회의 구조가 입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성씨 기록은 실용적인 도구가 된다. 어느 구역에 어느 성씨가 살았는지 알면, 그 지역 출토 유물의 귀속을 특정 가문과 연결할 수 있다. 비석 하나, 도기 파편 하나가 성씨 기록과 만나면 이름 없는 조각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7. 모두의 땅, 국유지의 이야기

1912년 천호동에는 국유지가 21필지 있었다. 개인 소유 땅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두의 땅이었던 공간이다.
21필지의 국유지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도로, 제방, 수리 시설 같은 공공 기반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천호동이 한강과 가까운 지역인 만큼, 홍수 때 강물이 넘치지 않도록 막는 제방 부지나 논에 물을 대는 수로 관리 시설이 국유지로 운영됐을 거다. 그 시설들 덕분에 102필지의 논이 안정적으로 벼를 키울 수 있었을 테니까.
마을 공동체의 공유 공간으로 쓰인 땅도 있었을 거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 넓은 공터, 명절에 온 마을이 모여 씨름판을 벌이고 음식을 나누던 그 자리가 국유지로 관리됐을 수 있다. 지금의 공원이나 광장 같은 역할을 했던 거다.
문화재 지표조사 — 왜 중요한가
건설 공사 시작 전 해당 지역의 매장문화재 유무를 확인하는 사전 조사다. 사업 면적 3만 제곱미터 이상이면 법적 의무 사항이다. 조사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 순으로 이어진다. 천호동처럼 논·밭·임야·분묘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지역일수록 지표조사의 가치가 크다. 개발 전에 그 땅의 역사 층위를 미리 파악해야, 되돌릴 수 없는 손실을 막을 수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런 기록들을 동네 단위로 쌓아가며, 서울 전체의 역사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천호동의 기록도 그 지도의 한 조각이다. 102필지의 논, 344필지의 밭, 35필지의 산, 2필지의 무덤, 43필지의 집, 21필지의 국유지. 이 숫자들 하나하나가 당시 천호동을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이다.
지금 천호역을 나서며 롯데백화점 앞을 지날 때, 그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 아래를 한번 생각해봐. 그 아래 어딘가에 1912년 이씨 집안의 밭이 있었고, 심씨 가문의 논이 있었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조상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그 이야기들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천호동을 걸을 때, 딱 한 번만 멈춰서봐.
그 번화한 거리 아래,
이씨 가문의 논이 있었고,
심씨 집안의 밭이 있었고,
이름 모를 두 집안의 무덤이 있었다.
그 땅에서 태어나고, 일하고, 늙어가던
천호동 사람들의 시간이 아직 거기 있다.
역사는 교과서 안에만 있지 않다.
지금 네가 걷는 이 거리가, 그 자체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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