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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암사동, 너는 과연 100년 전의 암사동을 상상해본 적 있어?

  • 2025년 5월 24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조사강동구 역사암사동선사유적지

신석기 유적 위에 황금 들판이 있었다,1912년 암사동의 놀라운 민낯

1912년 강동구 암사동 토지대장으로 읽는 잊혀진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자료

암사동 선사유적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땅.


신석기인이 움집을 짓고 살던 바로 그 위에,



1912년에는 653필지의 논과 밭이 넘실댔고,


이씨, 김씨, 양씨의 삶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수천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이 땅,


그 진짜 이야기를 지금 꺼낸다.


목차

  1. 강동구 암사동, 1912년의 비밀스런 초대

  2. 드넓은 황금 들판 — 171필지 논의 풍요

  3. 마을을 가득 채운 생명력 — 386필지의 밭

  4. 사람이 살던 집터 49필지, 그 온기의 기록

  5. 조상과 이어지는 공간 — 무덤 11필지의 이야기

  6. 신비로운 숲의 기억 — 36필지 임야의 자연

  7. 성씨로 읽는 암사동의 사람들

  8. 국유지 15필지와 문화재 발굴의 연결고리

  9.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암사동에 주목하는 이유

  10. 과거에서 미래로, 암사동의 시간여행을 마치며



01 — 강동구 암사동, 1912년의 비밀스런 초대

강동구 암사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들이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떠올릴 것이다. 서울에서 신석기 시대의 삶이 가장 온전히 보존된 그 유적지. 움집 터와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어 교과서에도 실리는 그 장소. 그런데 그 선사유적지 위에, 1912년의 암사동은 또 다른 층의 역사를 쌓고 있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공개한 기록에 따르면, 1912년의 강동구 암사동은 총 653필지, 2,532,077㎡의 규모를 가진 마을이었다. 250만 제곱미터가 넘는 이 넓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 87%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 광활한 땅에 논과 밭이 넘실대고, 집과 무덤이 자리 잡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농사일 소리가 가득했다.

암사동의 땅은 그래서 특별하다. 신석기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수천 년의 인간 역사가 층층이 쌓인 이 땅은 서울 어느 곳보다도 풍부한 문화재 유존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 땅의 1912년 기록을 지금부터 함께 들여다보자.

총 필지

653필지

1912년 기준

총 면적

2,532,077㎡

여의도의 약 87%

밭(전)

386필지

1,417,913㎡

논(답)

171필지

623,123㎡


02 — 드넓은 황금 들판, 171필지 논의 풍요

1912년 암사동에는 171필지, 623,123㎡의 논이 펼쳐져 있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암사동은 예로부터 물을 끌어오기 좋은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어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봄이면 못자리에서 싹을 틔운 모종이 논에 옮겨 심기고, 여름이면 초록빛 벼가 한강 바람을 맞으며 물결쳤다. 그리고 가을이면 황금빛 이삭이 고개를 숙이는 수확의 계절이 왔다.

이 논들은 당시 암사동 사람들의 생존 그 자체였다. 쌀은 단순한 먹을거리를 넘어서 세금을 내고, 물건을 사고, 관계를 맺는 경제의 기본 단위였다. 논 한 필지의 수확량이 한 가족의 한 해 삶을 좌우했다. 그렇기에 논을 가진다는 것은 이 마을에서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암사동의 논 지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논은 습기가 많아 유기물 보존율이 높고, 지층이 잘 분리되어 서로 다른 시대의 문화층이 뚜렷이 구별된다. 특히 암사동처럼 신석기 유적이 확인된 지역에서는 논 지층 아래에 선사 시대 이후 여러 시기의 유물이 복합적으로 분포할 가능성이 크다. 발굴조사 기관들이 이 지역을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03 — 마을을 가득 채운 생명력, 386필지의 밭

암사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것은 밭이었다. 386필지, 1,417,913㎡. 전체 면적의 약 56%가 밭이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면적이 아니다. 386필지의 밭은 수백 가구의 생계를 직접 책임지던 삶의 현장이었다.

봄에는 고추와 참깨 모종을 심고, 여름에는 콩과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랐다. 가을이면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 준비를 했고, 겨울에는 다음 해를 위한 거름을 만들었다. 사계절 내내 사람의 손길이 끊이지 않던 이 밭들은 암사동 사람들의 삶의 리듬 그 자체였다. 밭 고랑을 따라 걷던 발자국, 흙을 일구던 손의 감촉이 이 땅 어딘가에 여전히 배어 있다.

밭 지대는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다양한 생활 유물이 출토되는 구역이다. 토기 파편, 철제 농기구, 씨앗류 등이 밭의 경작 층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서울 일대 발굴 현장에서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특히 암사동처럼 선사 시대 유적이 이미 확인된 지역에서는 밭을 갈던 조선 시대 사람들이 신석기 유물을 위로 끌어올린 경우도 있어, 밭 지층 분석이 더욱 신중하게 이루어진다.


04 — 사람이 살던 집터 49필지, 그 온기의 기록

논과 밭이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는 가운데, 49필지 79,230㎡의 집터가 마을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섞인 한옥들이 언덕 자락과 논 사이에 자리 잡고, 좁은 골목이 집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아침이면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깨고,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아침밥을 지었다. 마당 한쪽에는 장독대가 줄지어 서 있고, 처마 끝에는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49필지의 집터는 수십 가구가 함께 이루어 살던 공동체의 핵심 공간이었다. 그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은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함께했다.



집터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풍부한 생활 유물이 출토되는 지점이다. 온돌 아궁이 흔적, 기와 조각, 백자와 분청사기 파편, 철제 생활 도구들이 그 집에서 살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말을 건네온다. 서울 도심 집터 지대 발굴 현장에서 조선 중기 이전의 유물층이 꾸준히 확인되는 것을 감안하면, 암사동의 49필지 집터 역시 그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다.


05 — 조상과 이어지는 공간, 무덤 11필지의 이야기

마을 어딘가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공간이 있었다. 1912년 암사동의 분묘지는 11필지, 6,033㎡였다. 다른 동네에 비해 필지 수가 많은 편이다. 암사동이 한강변 오래된 마을인 만큼,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무덤이 쌓여온 것이다.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무덤은 단순한 매장 공간이 아니었다. 봄과 가을로 성묘를 올리고, 제삿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예를 표하는 공동체의 의례 공간이었다. 11필지의 분묘지 안에는 암사동에 뿌리를 둔 여러 집안의 조상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후손들의 발길은 해마다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분묘지

11필지

6,033㎡

임야

36필지

405,777㎡

집터(대지)

49필지

79,230㎡

국유지

15필지

별도 관리

분묘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별한 관리 대상이다. 묘비 파편, 청동 제기류, 도자기 부장품 등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암사동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의 분묘지 아래에는, 때로 조선 시대 이전의 유물층이 함께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11필지라는 상대적으로 많은 분묘지 필지는 암사동이 얼마나 오래되고 두터운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06 — 신비로운 숲의 기억, 36필지 임야의 자연

논과 밭, 집터 너머에는 숲이 있었다. 36필지, 405,777㎡에 달하는 임야는 암사동 전체 면적의 약 16%를 차지했다. 이 숲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땔감을 구하러 가고, 약초를 캐러 가고, 아이들이 뛰어놀러 가는 공간이었다.

한강 변의 구릉지에 자리 잡은 암사동의 숲은 지형적으로도 중요했다. 강바람을 막아주고, 홍수 때 마을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봄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어나고, 여름에는 짙은 초록 그늘이 마을을 시원하게 감싸주었다.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면 눈 쌓인 숲이 고요히 마을을 지켰다. 지금의 암사동에 그 숲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땅 아래에 남아 있다.



07 — 성씨로 읽는 암사동의 사람들

토지대장에 남겨진 성씨들은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이다. 1912년 암사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보유한 성씨는 이씨였다. 이씨가 194필지를 소유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김씨가 101필지, 양씨가 93필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씨 194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한 토지 소유 현황이 아니다. 그것은 이씨 집안이 암사동에 오랜 세월 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흔적이다. 대를 이어 논을 갈고, 밭을 일구며, 마을 공동체의 중심을 이루어온 그 삶의 기록이다. 양씨 93필지 역시 흥미롭다. 전국적으로 흔하지 않은 성씨인 양씨가 암사동에서 상당한 비중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특정 씨족 공동체가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94필지의 이씨, 101필지의 김씨, 93필지의 양씨. 이 세 집안이 암사동의 절반 이상을 일구며 살아갔다. 그들의 후손이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성씨별 토지 분포는 문화재 지표조사 기관들이 지역 조사 시 반드시 검토하는 자료다. 특정 씨족의 집중 거주 구역에는 그 문중의 제사 공간, 사랑채, 창고, 집단 주거지가 밀집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912년의 이 성씨 분포 자료는 암사동의 어느 구역에서 어떤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지를 사전에 추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08 — 국유지 15필지와 문화재 발굴의 연결고리

1912년 암사동의 국유지는 15필지였다. 전체 653필지 중 15필지, 비율로는 약 2.3%다. 숫자 자체는 크지 않지만, 그 위치와 성격이 중요하다. 국유지는 역참, 관아 부속지, 군사 관련 시설, 혹은 왕실 소유지가 국가로 이관된 토지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국유지 구역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1925년 한강 홍수 때 빗살무늬 토기가 처음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6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신석기 시대 집터 수십 기가 확인되었다. 이 발굴이 가능했던 배경 중 하나가 해당 토지가 이미 국가 소유지였다는 점이다. 민간 소유였다면 발굴 자체가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1912년의 15필지 국유지 기록은 그래서 단순한 부동산 현황이 아니다. 그것은 이후 암사동에서 이루어진 문화재 발굴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행정적 사전 기록이다. 땅의 소유 역사가 문화재의 보존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암사동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09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암사동에 주목하는 이유

암사동은 대한민국 문화재 발굴의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다. 신석기 시대의 집터와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된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수천 년의 역사 위에 서 있음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다. 그리고 그 유적지 위에 1912년의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은, 이 땅이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의 삶을 품어온 공간임을 보여준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매장유산 조사는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암사동처럼 이미 선사 유적이 확인된 지역에서는 지표조사 단계에서 유존 가능성이 매우 높게 평가되며, 어떤 공사든 착공 전 반드시 사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암사동 인근에서 이루어진 발굴 사례들은 신석기 층 위에 청동기,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유물층이 복합적으로 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암사동 1912년 토지 통계 요약

밭(전)386필지 / 1,417,913㎡ (전체의 56%)

논(답)171필지 / 623,123㎡ (전체의 25%)

임야36필지 / 405,777㎡ (전체의 16%)

집터49필지 / 79,230㎡

분묘지11필지 / 6,033㎡

국유지15필지

최다 성씨이씨 194필지, 김씨 101필지, 양씨 93필지

암사동 선사유적지의 발굴 성공 사례는 문화재 지표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1967년 첫 발굴이 시작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 시대 집터 수십 기, 빗살무늬 토기, 뼈로 만든 낚시 바늘, 불에 탄 도토리 등 당시 생활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단계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10 — 과거에서 미래로, 암사동의 시간여행을 마치며

이렇게 1912년의 암사동을 한 바퀴 돌아왔다. 653필지 2,532,077㎡의 땅 위에서 우리는 황금빛 벼를 수확하던 농부들을 만났고, 밭 고랑을 일구던 사람들을 만났다. 숲에서 땔감을 하던 노인과 아이들, 분묘 앞에서 조상에게 예를 올리던 후손들, 그리고 이씨, 김씨, 양씨의 이름으로 남은 수백 개의 필지들.

그 모든 이야기가 지금 우리 발밑에 잠들어 있다. 신석기인의 움집 위에, 조선 말기 농부의 논 위에, 1912년의 집터 위에. 암사동의 땅은 수천 년의 시간을 층층이 품고서 오늘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방문할 때 우리는 그 가장 아래 층의 이야기를 만난다. 하지만 그 위에 쌓인 수천 년의 이야기들도 여전히 그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지우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새 건물을 올리기 전에, 새 도로를 내기 전에 먼저 그 땅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암사동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바로 그것이다. 땅은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억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미래가 열린다.

다음에 암사동을 지나거나 선사유적지를 방문할 때,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자. 지금 내 발아래 이 땅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그 질문 하나가 우리를 수천 년의 역사 속으로 이어주는 가장 짧고 강력한 다리가 된다.

신석기인이 움집을 짓고, 조선 농부가 벼를 심고,


수천 년의 사람들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갔다.



그 모든 삶이 지금 우리 발아래에 잠들어 있고,


암사동의 땅은 지금도 그 기억을 품고 있다.



선사유적지를 걸을 때, 강동구 어딘가를 지날 때,


이 땅이 전하는 수천 년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닿기를.



땅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미래를 제대로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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