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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작구 편1912년 서울 동작구 대방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산 두 자락과 논 한 배미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3일 전
  • 7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작구 편

1912년 서울 동작구 대방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산 두 자락과 논 한 배미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3필지

전체 국유지 필지 · 시리즈 최소급

8,211㎡

전체 국유지 면적

77.1%

임야 비중 · 시리즈 최고

1,884㎡

단 하나뿐인 국유 논

산 두 자락, 그리고 논 한 배미. 1912년 대방동의 국유지 장부는 딱 세 줄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세 줄이 시리즈의 기록판을 갈아치웠습니다. 임야 비중 77.1%. 지금까지 1위였던 마장동의 74.2%를 넘어서는 숫자입니다. 가장 짧은 장부 중 하나가, 가장 극단적인 비율을 품고 있었습니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 지금은 보라매공원의 너른 잔디와 학교들,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아파트가 들어선 동네입니다. 하지만 이 동네의 옛 이름은 번대방리. 노량진 나루 서쪽, 한강의 모래벌이던 여의도를 강 건너로 마주 보던 물가의 마을이었습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의 측량원이 이 동네를 다 돌고 국유지 항목에 남긴 것은 단 세 필지. 오늘은 이 짧고 극단적인 장부를 펼쳐, 그 안에 접힌 이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목차

  1. 핵심 요약, 1912년 대방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 지목별 현황표와 그래프로 보는 대방동 국유지

  3. 임야 77.1%, 시리즈 기록을 갈아치운 두 자락의 산

  4. 단 한 배미의 국유 논 1,884㎡는 어떤 땅이었을까?

  5. 세 필지뿐인 장부가 그리는 대방동의 옛 얼굴

  6.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7.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절차 한눈에 보기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땅이 돌려준 역사

  9.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1핵심 요약, 1912년 대방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는 국유지 3필지, 총 8,211㎡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임야가 2필지 6,327㎡, 논이 1필지 1,884㎡였습니다.

즉, 대방동 국유지는 면적의 77.1%가 임야로,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서울의 국유지 가운데 임야 비중이 가장 높은 기록이며, 필지 수로는 시리즈에서 손꼽히게 단출한 사례입니다.

검산부터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임야 2필지와 논 1필지를 더하면 정확히 3필지. 6,327㎡와 1,884㎡를 더하면 정확히 8,211㎡. 필지도 면적도 완전히 일치하는 깔끔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단출한 세 줄을 비율로 바꾸는 순간, 대방동은 시리즈의 기록판 맨 위에 이름을 올립니다.



2지목별 현황표와 그래프로 보는 대방동 국유지

먼저 전체 구조를 표로 정리합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기록을 기준으로 한 대방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입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필지당 평균

임야

2필지

6,327㎡

77.1%

약 3,164㎡

1필지

1,884㎡

22.9%

1,884㎡

전체 국유지

3필지

8,211㎡

100%

약 2,737㎡

지목별 필지 수와 면적의 합이 전체 국유지와 완전히 일치하는 기록입니다.

대방동 국유지 지목별 면적 비중

임야6,327㎡

77.1%

논1,884㎡

22.9%

막대는 두 개, 구도는 명쾌합니다. 짙은 자줏빛 막대 하나가 화면의 4분의 3을 넘게 차지합니다. 임야 77.1%. 이 시리즈에서 임야 비중이 가장 높았던 동네는 목장의 기억을 품은 성동구 마장동으로, 74.2%였습니다. 대방동은 그 기록을 조용히 넘어섭니다. 필지 수는 겨우 셋. 서대문구 냉천동의 1필지에 이어 시리즈에서 손꼽히게 짧은 장부가, 가장 극단적인 산림 편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임야 77.1%, 시리즈 기록을 갈아치운 두 자락의 산

한 자락 평균 3,164㎡, 마을 뒷산의 크기

임야 2필지에 6,327㎡. 한 필지 평균이 3,164㎡, 약 957평입니다. 마장동의 국유 임야가 필지당 평균 17,460㎡의 거대한 산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방동의 국유림은 훨씬 아담합니다. 목재를 대량으로 베어내던 자원의 산이 아니라, 마을 뒤에 병풍처럼 앉은 뒷동산 두 자락. 그 정도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대방동의 지형을 떠올려 보면 이 산자락들의 자리가 짐작됩니다. 대방동은 한강 남쪽, 노량진 나루의 서쪽에 자리한 물가의 동네였습니다. 강변의 낮은 평지 뒤로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땅. 지금 보라매공원과 학교들이 앉아 있는 그 언덕들이 바로 그 구릉의 후손입니다. 1912년의 국유 임야 두 필지는 이 구릉 어딘가의 숲이었을 것입니다.

왜 이 산들은 나라의 것으로 남았을까

마을의 산이 국유로 남는 경로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소유가 불분명한 무주공산이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국유로 편입되는 경우가 가장 흔합니다. 조선시대의 산림은 원칙적으로 개인이 사사로이 차지할 수 없는 공유의 공간이었고,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하고 낙엽을 긁던 뒷산은 누구의 것도 아닌 채로 수백 년을 내려왔습니다. 1912년의 측량은 그 오랜 관습에 소유자란이라는 낯선 칸을 들이밀었고, 주인을 증명할 수 없던 마을의 산들은 국유라는 도장이 찍힌 채 새 장부에 올랐습니다.

대방동의 두 산자락도 그렇게 장부에 남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제까지 온 마을이 함께 쓰던 뒷동산이, 하루아침에 총독부가 관리하는 재산이 된 것입니다. 나무 한 짐을 하러 오르던 언덕이 남의 소유가 되는 경험. 임야 77.1%라는 시리즈 최고 기록의 이면에는, 그런 상실의 풍경이 접혀 있습니다.



4단 한 배미의 국유 논 1,884㎡는 어떤 땅이었을까?

장부의 마지막 줄, 논 1필지 1,884㎡. 약 570평의 논 한 배미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국유 논은 대개 무리를 지어 나타났습니다. 서초동에서는 필지당 평균 12,144㎡의 초대형 논 열 배미가, 염곡동에서는 평균 5,067㎡의 논 열여섯 배미가 관유 농장의 위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대방동의 국유 논은 단 하나, 그것도 570평의 아담한 크기입니다. 대규모 역둔토 농장의 그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논은 잔편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노량진은 조선의 큰 나루였고, 나루의 운영을 받치던 관유 전답이 일대에 흩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팔리고 나뉘고 흩어진 끝에, 대방동 몫으로는 이 한 배미가 남았다는 시나리오. 혹은 주인이 끊겨 신고되지 못한 논이 조사 과정에서 국유로 정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록은 1,884라는 숫자만 남기고 침묵하지만, 물가 마을의 논 한 배미가 나라의 장부에 홀로 적혀 있는 풍경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입니다. 이 논에도 물을 대고 모를 심던 손이 있었다는 것. 장부의 주인이 조선에서 총독부로 바뀐 1912년에도, 그 손은 같은 논에서 같은 새벽을 맞았을 것입니다. 소작료가 흘러가는 방향만 소리 없이 바뀐 채로 말입니다.



5세 필지뿐인 장부가 그리는 대방동의 옛 얼굴

이제 세 줄의 장부를 뒤집어 읽어 보겠습니다. 국유지가 세 필지뿐이었다는 것은, 대방동 땅의 대부분에 이미 민간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독법은 앞서 서대문구 냉천동에서 한 번 연습한 적이 있습니다. 국유지가 단 1필지였던 냉천동은 도성 코앞의 성저십리 동네로, 민간의 집과 밭이 땅을 빼곡하게 덮고 있었습니다. 대방동도 결이 비슷합니다. 노량진 나루를 코앞에 둔 한강변의 마을. 나루를 오가는 사람들, 강에서 생계를 잇는 사람들, 물가의 기름진 땅을 일구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뿌리내린 동네였습니다. 번대방리라는 옛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이 동네의 논밭과 집터는 대대로 민간의 재산으로 상속되고 거래되어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방동의 국유지 세 필지는 거꾸로 선명해집니다. 민간의 소유가 미치지 않은 마지막 자리, 곧 주인 없는 뒷산 두 자락과 어쩌다 남은 논 한 배미. 국유지의 많고 적음이 그 동네의 성격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대방동의 거울에 비친 것은 나루터 곁에서 오래도록 자기 힘으로 살아온 민간 마을의 얼굴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동작구 대방동 국유지는 총 3필지 8,211㎡였으며, 임야 2필지 6,327㎡가 면적의 77.1%를 차지해 이 시리즈에서 임야 비중이 가장 높은 기록을 세웠고, 나머지는 논 1필지 1,884㎡가 전부인 단출한 장부였습니다.


6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라매공원 일대의 정비, 학교와 주거지의 재건축. 대방동은 지금도 크고 작은 개발이 이어지는 동네입니다. 이런 곳에서 114년 전 세 줄짜리 장부는 뜻밖의 실무 가치를 지닙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법률 제2074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합니다. 3만㎡ 이상의 사업 면적은 지표조사가 의무이고, 그보다 작은 사업이라도 유존 지역 여부나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따라 조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2026년 1월부터는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른 조사 기준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대방동의 기록이 문화재발굴기관 조사원들에게 건네는 힌트는 두 갈래입니다. 첫째는 국유 임야 두 자락이 있던 구릉지입니다. 낮은 구릉은 어느 시대든 사람들이 살림터와 무덤 자리로 선택해 온 지형입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대방동의 언덕이라면 선사시대의 생활 흔적부터 조선시대의 분묘까지, 여러 시대의 층위가 겹쳐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강변의 구릉지들은 서울 고고학의 단골 무대였습니다. 둘째는 논 한 배미와 그 주변의 옛 물가 저지대입니다. 경작층 아래에는 더 오래된 시기의 유구가 봉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나루 배후의 마을이었던 만큼 생활 유물의 밀도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세 필지의 장부는 짧지만, 조사의 눈으로 보면 대방동이라는 동네의 지형과 역사를 압축한 지도입니다. 개발을 준비하는 쪽에는 공사 지연과 비용의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안전장치가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공원의 잔디밭 아래 잠든 나루터 시대의 대방동을 건져 올릴 그물이 됩니다.



7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절차 한눈에 보기

문화유산 조사는 법이 정한 단계를 밟아 점점 깊이 들어가는 절차입니다. 대방동에서 조사가 진행된다면 다음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문헌조사와 지표조사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옛 기록을 분석하고, 조사원이 지표면을 직접 걸으며 유물 산포 여부와 지형을 확인합니다. 땅을 파지 않는 단계로, 개발 사업의 첫 관문입니다.

표본조사

지표조사 결과 유존 가능성이 있는 구역에서, 사업 면적의 2% 이내를 선별해 굴착하여 문화층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시굴조사

유구의 분포 범위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사업 면적의 10% 이내에서 트렌치를 넣어 확인합니다. 대방동이라면 옛 국유 임야가 있던 구릉지 일대가 관심 구역이 됩니다.

발굴조사

유구가 확인되면 전면 발굴로 전환합니다. 유구와 유물을 기록하고 수습하며, 조사 결과에 따라 보존 조치나 이전 복원이 결정됩니다.

보고서 작성과 활용

조사 성과는 보고서로 남아 학계와 시민에게 공유되고, 지역의 역사 콘텐츠로 다시 태어납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글도 그 활용의 한 형태입니다.


8실제 발굴 성공 사례, 땅이 돌려준 역사

작은 장부라고 발견까지 작으란 법은 없습니다. 서울 도심의 세 장면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사례 1 · 동대문

야구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사시설

동대문운동장 부지를 공원으로 재개발하던 중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서울성곽의 일부와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하도감 터, 물길을 다스리던 이간수문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함성이 울리던 그라운드 아래에 조선의 국방 시스템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발견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옆 유구전시장으로 살아남아 지금도 시민을 맞고 있습니다.

사례 2 ·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깨어난 백제의 왕성

송파구 풍납동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실시된 조사는 한국 고고학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흙벽 둔덕으로만 여겨지던 풍납토성이 조사 결과 한성백제의 도읍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대한 왕성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한강변의 평범해 보이던 땅에서 한 나라의 수도가 통째로 돌아온 이 사건은, 같은 한강변 마을인 대방동의 땅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사례 3 · 인사동

공사장 항아리에서 나온 세종시대의 금속활자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는 항아리 하나가 출토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고,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한글 활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항아리가 묻힌 자리는 몇 평이 되지 않았습니다. 발굴의 가치는 면적이 아니라 시간의 밀도로 결정된다는 것을, 세 필지의 대방동에 건네고 싶은 교훈입니다.

동대문도, 풍납동도, 인사동도,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공사 예정지였습니다. 대방동의 두 산자락과 논 한 배미 아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기록은 이미 어디를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9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동작구 대방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3필지였으며, 전체 면적은 8,211㎡였습니다.

1912년 대방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임야는 2필지, 6,327㎡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약 77.1%에 해당하며,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국유지 가운데 임야 비중이 가장 높은 기록입니다.

1912년 대방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논은 1필지, 1,884㎡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약 22.9%에 해당하는, 대방동의 유일한 국유 논이었습니다.

대방동 국유지가 3필지뿐이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대방동 땅의 대부분이 민간 소유였다는 뜻입니다. 노량진 나루 곁의 한강변 마을로서 오랜 세월 민간의 논밭과 집터가 뿌리내렸고, 나라 몫으로는 뒷산 두 자락과 논 한 배미만 남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1912년의 지목과 필지 기록은 땅속 매장유산의 위치와 성격을 예측하는 기초자료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지표조사가 의무이며, 옛 국유 임야가 있던 한강변 구릉지는 여러 시대의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지형입니다.

1912년 동작구 대방동 국유지 3필지 8,211㎡는 시리즈에서 가장 높은 임야 비중 77.1%를 기록한 단출한 장부였고, 그 세 줄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가 대방동의 언덕을 다시 읽는 출발점이 됩니다.

세 줄의 유산

나루로 가는 길가 마을에


나라의 몫은 세 줄뿐이었다



땔감을 내어주던 산 두 자락과


저녁 하늘을 담던 논 한 배미



온 마을이 함께 오르던 뒷동산에


낯선 도장이 찍히던 해에도



도끼질 소리와 물꼬 트는 소리는


같은 언덕, 같은 물가에서 이어졌다



지금 그 언덕에 공원의 웃음이 피고


아이들의 연이 하늘로 오르지만



세 줄의 장부는 아직 기억한다


이 땅이 누구의 손으로 일구어졌는지를


그리고 조용히 기다린다


우리가 그 이름들을 물어봐 주기를

대방동 일대 개발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00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함께합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임야·논),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미지 설명: 본문 표는 1912년 대방동 국유지 현황으로, 임야 2필지 6,327㎡, 논 1필지 1,884㎡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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