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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회현동1가, 숫자로 드러난 식민지 도시의 민낯

1월 3일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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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차갑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뜨겁다 — 1912년 중구 회현동1가 문화재 지표조사로 보는 식민지 서울의 민낯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중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회현동1가 203필지·147,438㎡에 담긴 소유의 역사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의 의미를 풀어냅니다.


1912년 회현동1가는 조용한 주거지가 아니었습니다. 발밑의 땅이 지금도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옛 서울 지도를 펼치다 보면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필지 수, 면적, 그리고 소유자. 1912년 중구 회현동1가는 203필지 147,438㎡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 안을 들여다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203필지 중 151필지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도 있었고, 영국인과 덴마크인의 이름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미 국제 자본의 시선 안에 완전히 들어온 공간이었습니다. 이 기록이 단순한 행정 자료가 아닌 이유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눈으로 함께 읽어봅니다.

203

총 필지 수


(1912년 회현동1가)

147,438

총 면적(㎡)


회현동 시리즈 최대

151

일본인 소유


(전체의 74%)

3

서양·기관 소유


(영국·덴마크·동척)



한 장의 지도에서 시작된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란

옛 서울 지도를 펼쳐 놓고 눈을 가늘게 뜨면, 거리나 건물보다 먼저 숫자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필지 수, 면적, 소유자 이름. 이 숫자들은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닙니다. 당시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떤 구조로 재편되어 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체계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의 지면 위와 아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이 어떤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일입니다. 이 조사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로, 이후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정리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중구 회현동1가는 그 기록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강렬한 소유 구조를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203필지 147,438㎡, 그리고 151필지 일본인 소유. 이 숫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열어보겠습니다.

숫자는 차갑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뜨겁습니다. 1912년 회현동1가의 기록이 바로 그렇습니다.


1912년 회현동1가의 전체 풍경 — 203필지가 말해주는 것

1912년 중구 회현동1가의 전체 규모는 회현동 시리즈 중 가장 큽니다. 총 203필지, 면적은 147,438㎡. 같은 시기 회현동2가(85필지 66,208㎡)나 회현동3가(13필지 13,795㎡)와 비교하면 규모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회현동1가는 이 일대에서 사실상 중심부에 해당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남산 자락 아래, 도성 바깥에 위치했던 이곳은 조선 시대부터 서울의 외곽 생활권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다 개항 이후 철도와 상업 인프라가 발달하면서 이 지역의 위상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남대문역(현 서울역)과 가까운 위치, 남산 북쪽 기슭이라는 지형적 특성이 상업과 거주의 수요를 동시에 끌어들였습니다. 1912년의 203필지는 그 변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중구 회현동1가


총 필지 수: 203필지 / 총 면적: 147,438㎡


대지: 197필지, 142,466㎡ (전체의 약 97%)


도로: 4필지, 439㎡ / 밭(전): 2필지, 4,532㎡


국유지: 5필지 / 법인 소유: 1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1필지 / 영국인: 1필지 / 덴마크인: 1필지


일본인 소유: 151필지 (전체의 약 74%)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중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 규모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필지가 많고 면적이 클수록, 그 아래에 더 다양하고 두꺼운 역사 층위가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현동1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이 살았고, 도시화가 진행되었으며, 소유 구조가 급격히 바뀐 공간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는 지역은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가장 주목하는 유형입니다.



집이 많았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 — 대지 197필지의 의미

203필지 중 197필지가 대지였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97%에 가깝습니다. 이건 단순히 집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동네가 이미 완성된 도시 공간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빈 땅이 거의 없었습니다. 생활 기반 시설이 갖춰졌고, 상업과 주거가 함께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남산 자락 아래의 이 공간은 이미 근대 도시 서울의 핵심 일부였습니다.

대지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도 가집니다. 토지 수요가 집중된 공간이었다는 뜻이고, 그만큼 토지를 둘러싼 투기와 이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시기 서울 도심의 핵심 변화는 거창한 신도시 건설이 아니라, 이렇게 기존 생활 공간 안에서 조용하지만 빠르게 진행되는 소유 구조의 전환이었습니다. 회현동1가의 197필지 대지는 그 전환이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진 공간 중 하나였습니다.

1912년 회현동1가 토지 구성 (203필지 기준)

대지

97% · 142,466㎡

197필지

도로

1%

4필지

밭(전)

1%

2필지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고밀 대지 지역은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오랜 기간 건물이 세워지고 철거되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에서 지하의 이전 층위가 훼손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전 시기 구조물의 기초와 생활 유구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존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부터 형성된 골목 구조가 근대 이후에도 유지된 지역에서는, 그 골목 아래에 수백 년에 걸친 역사 층이 켜켜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회현동1가는 그런 가능성을 197필지 전체에 걸쳐 품고 있는 공간입니다.

집이 빼곡하다는 건 삶이 빼곡하다는 뜻입니다. 그 삶의 흔적이 지금도 이 땅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도로와 밭, 도시와 농촌의 경계 — 4필지 도로와 2필지 밭



203필지 중 도로는 단 4필지, 439㎡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믿기 어려울 만큼 좁은 도로 비율입니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당시 회현동1가는 넓은 가로가 아니라 골목 중심의 생활 구조였습니다. 집과 집 사이의 좁은 통로,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칠 수 있는 골목길이 이 동네 생활 동선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골목 중심 구조는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중요한 단서입니다. 골목은 집보다 훨씬 오래된 공간 구조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건물이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서도, 골목의 흐름은 수백 년에 걸쳐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골목 아래에는 이전 시기의 배수로, 포장 흔적, 소규모 시설물 기초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4필지의 도로 기록은 그 좁은 골목들이 이미 행정적으로 인식되고 관리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입니다.

한편 밭 2필지 4,532㎡라는 기록도 흥미롭습니다. 197필지의 대지와 비교하면 극히 작은 비중이지만, 이 두 필지는 회현동1가가 완전한 도시 공간으로 전환되기 직전, 아직 농경의 기억이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입니다. 대지와 밭이 경계를 맞댄 그 지점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특히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가지 토지 이용 방식이 만나는 경계는 생활 유구가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 지점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국유지와 법인 토지의 의미 — 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하다

회현동1가에는 국유지가 5필지 있었습니다. 충신동의 1필지나 통의동의 5필지와 유사한 수준이지만, 회현동1가의 전체 규모(203필지)를 감안하면 비율상으로는 작습니다. 그러나 이 5필지의 국유지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남산 인근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행정·군사 관련 공공 시설의 부속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 주목할 기록은 법인 소유 토지 1필지입니다. 이 한 필지는 회현동1가의 토지 소유 구조가 개인을 넘어 조직 단위로 이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법인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자본이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 시기 법인 소유 토지는 대개 상업 목적이나 투자 목적으로 취득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도시는 이렇게 개인의 손을 떠나 자본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이런 소유 구조 변화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유자가 개인에서 법인으로, 혹은 국유지로 전환되는 시점에는 대개 물리적인 공간 변화도 함께 이루어집니다. 기존 건물이 철거되고 새로운 목적의 건물이 세워지거나, 토지의 형질이 변경됩니다. 그 변환 과정에서 이전 시기의 구조물이 지하에 남겨지는 것이 발굴 현장에서 자주 관찰되는 패턴입니다. 회현동1가의 국유지 5필지와 법인 1필지가 바로 그런 변환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외국인 소유지 — 국제 자본의 흔적



회현동1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가 1필지 있었습니다. 통의동(1필지), 회현동2가(확인 기록 없음)에 이어 회현동1가에도 이 기관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숫자는 작아 보이지만 상징성은 그 어느 기록보다 무겁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1908년 설립한 식민지 토지·자원 수탈의 핵심 기관이었습니다. 조선 전역에 걸쳐 토지를 매입하거나 강제로 편입해 식민지 농업 자본과 일본인 이민자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에 영국인 소유 1필지, 덴마크인 소유 1필지가 더해집니다. 회현동2가에 미국인·덴마크인 소유가 있었던 것처럼, 회현동1가도 이미 다양한 국적의 소유자가 혼재하는 공간이었습니다. 1912년의 서울이 단순히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간이 아니라, 영국·덴마크 같은 유럽 국가의 자본과 사람들도 이미 진입해 있던 국제적 도시였음을 보여줍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필지


식민지 수탈 기관

🇬🇧영국인 소유

1필지


무역·외교 관련

🇩🇰덴마크인 소유

1필지


무역·선교 관련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이런 다국적 소유 공간은 독특한 유물 출토 가능성을 가집니다. 문화권이 다른 소유자는 그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다른 재료와 구조로 건물을 짓습니다. 실제 서울 도심 발굴 현장에서 서양식 도자기, 유리병, 금속 생활도구, 그리고 근대적 건축 재료들이 조선 시대 유구와 함께 출토된 사례가 있습니다. 회현동1가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필지와 영국인·덴마크인 소유 필지는 그런 복합적 문화 층위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공간입니다.


일본인 소유 151필지 — 압도적 비율이 만들어진 이유

이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는 단연 이것입니다. 전체 203필지 중 151필지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약 74%. 회현동2가(76%)와 유사한 수준이고, 회현동3가(92%)보다는 낮지만, 여전히 네 필지 중 세 필지가 일본인의 손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회현동 일대 전체에 걸쳐 일본인 소유 집중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1912년 회현동1가 토지 소유 구조 (203필지 기준)

일본인 151필지 (74%)

조선인 등

국유·기타

일본인 소유 (151필지)

조선인 등 (38필지)

국유·법인·서양인 (14필지)

151필지라는 숫자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리 없습니다. 1910년대 초 토지조사사업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근대적 법률 개념에 낯설었던 조선인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경작하고 거주해온 땅을 신고하지 못하거나, 신고 절차를 제대로 밟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거나, 법적 절차를 앞세운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회현동1가의 151필지는 그 과정의 결과물입니다.

이 과정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분명히 오랫동안 살아온 집인데, 서류상으로는 더 이상 내 집이 아닌 상황. 땅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삶은 계속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 이질적인 감각 속에서 회현동1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버텨냈을 겁니다. 문화재 발굴조사가 그 시간의 흔적을 땅속에서 꺼내줄 수 있습니다.

회현동 시리즈 일본인 소유 비율 비교


회현동3가: 12필지 / 전체 13필지 → 약 92%


회현동2가: 65필지 / 전체 85필지 → 약 76%


회현동1가: 151필지 / 전체 203필지 → 약 74%


→ 세 동네 모두 70% 이상 일본인 소유. 회현동 전체가 식민지 토지 집중의 핵심 지역이었음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이 기록을 읽는 이유

회현동1가의 기록을 꼼꼼히 읽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 기록이 지금의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답은 간단합니다. 회현동1가는 지금도 서울 도심에 존재하는 공간이고, 재개발과 도시 정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모든 개발 행위 앞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203필지 중 197필지가 대지였던 공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건물이 세워지고 철거되기를 반복한 공간에는 반드시 발굴조사가 필요한 역사층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서울 중구 일대의 여러 재개발 현장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선행한 결과, 조선 시대 생활유구와 근대 초기의 건물 기초가 함께 발견된 사례가 있습니다. 미리 조사한 덕분에 유구는 기록되었고, 사업은 큰 지연 없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가 공사 중 유구가 발견되어 공사가 수개월 중단된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에 의뢰해 지표조사를 선행하는 것이 사업자와 역사 모두에게 훨씬 현명한 선택입니다. 회현동1가처럼 소유 구조가 복잡하고 역사층이 두꺼운 공간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적 가능성 판단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회현동1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지금의 회현동을 걷다 보면 이런 과거는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넓어진 도로가 이어지며, 1912년의 골목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발밑의 땅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151필지가 넘어가던 그 시간, 골목 4필지가 기록되던 그 날, 밭 2필지가 마지막으로 흙을 드러내던 그 계절이 모두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습니다.

1912년의 회현동1가는 주거지였고, 투자처였고, 식민지 실험장이었습니다. 세 가지 성격이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작동했습니다. 이 기록을 읽는다는 건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닙니다. 재개발, 도시 정비,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를 고민하는 지금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질문이 이 기록 안에 있습니다. 이 땅은 누구의 것이었고, 누구의 것이어야 했는가. 그리고 그 아래에 남겨진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성실한 답입니다. 흙을 붓질하고, 기록하고, 보고서를 쓰는 그 묵묵한 과정이 이 도시의 기억을 보존합니다. 회현동1가의 203필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지금도 들을 수 있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회현동1가·2가·3가의 기록을 나란히 비교해 보세요.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숫자는 차갑습니다.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언제나 뜨겁습니다.151필지. 74%.이 숫자 뒤에는 집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고,땅을 빼앗긴 채 그 자리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들의 시간이 지금도 이 땅 아래에 남아 있습니다.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긴 글,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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