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필동3가 토지조사로 본 서울의 숨겨진 시간들
- 1월 2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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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한 장을 펼치는 순간, 콘크리트 아래 흙길이 보인다 — 1912년 중구 필동3가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는 남산 자락의 변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중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필동3가 79필지·85,848㎡에 담긴 복합 토지 구성과 일본인 소유 65필지의 역사적 의미를 풀어냅니다.
1912년의 필동3가는 지금의 서울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평범한 동네 이름 하나가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는지 스스로 놀라게 될 겁니다.
지도 한 장을 펼치는 순간, 콘크리트와 자동차 대신 흙길과 담장, 그리고 사람의 숨결이 먼저 떠오릅니다. 79필지 85,848㎡. 대지 72필지, 잡종지 3필지, 밭 4필지. 그리고 국유지 5필지. 가장 충격적인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전체 79필지 중 65필지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남산 자락과 맞닿은 이 작은 동네에 1912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눈으로 함께 들어가봅니다.
79
총 필지 수
(1912년 필동3가)
85,848
총 면적(㎡)
복합 토지 구성
65
일본인 소유
(전체의 82%)
4종
지목 구성
대지·잡종·밭·국유

한 장의 지도에서 시작된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란
1912년 토지조사부는 단순한 숫자 목록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삶, 권력의 방향, 그리고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재편되어 갔는지가 모두 담긴 기록입니다. 특히 필동3가는 남산 자락과 맞닿아 있어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공간의 성격이 빠르게 변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토지 구성은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에서 늘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의 지면 위와 아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이 어떤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일입니다. 이 조사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로, 이후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정리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필동3가는 그 기록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대지·잡종지·밭·국유지가 한 공간에 혼재하는 복합 구성, 그리고 82%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 비율. 이 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1912년 토지조사부를 읽는다는 건 단순히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어떤 경위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1912년 필동3가, 숫자 속에 숨은 풍경
1912년 중구 필동3가는 총 79필지, 면적 85,848㎡였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작은 동네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규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79필지의 구성이 흥미롭습니다. 대지, 잡종지, 밭, 국유지라는 네 가지 지목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한 공간에 이렇게 다양한 지목이 혼재한다는 건, 필동3가가 완전한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도시로 가는 중간 단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남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 동네는 조선 시대부터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길목 역할을 했습니다. 남산과의 지형적 관계, 도심과의 접근성, 그리고 개항 이후 빠르게 변하는 서울의 공간 재편 속에서 필동3가는 다양한 성격의 토지가 공존하는 복합 공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복합성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필동3가를 특별히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중구 필동3가
총 필지 수: 79필지 / 총 면적: 85,848㎡
대지: 72필지, 76,542㎡ (전체의 약 91%)
잡종지: 3필지, 1,157㎡ / 밭(전): 4필지, 8,148㎡
국유지: 5필지 / 일본인 소유: 65필지 (전체의 약 82%)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중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1912년 필동3가 토지 구성 (79필지 기준)
대지
91% · 76,542㎡
72필지
밭(전)
5%
4필지
국유지
6%
5필지
잡종지
4%
3필지

집과 사람, 대지 72필지가 말해주는 일상
79필지 중 72필지, 76,542㎡가 대지였습니다. 전체의 91%에 달하는 비율입니다. 이 숫자는 필동3가가 단순한 변두리가 아니라 이미 사람들이 밀집해 살던 생활 공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72채의 집이 있었다는 뜻이고, 그 집마다 가족이 있었고 하루하루의 일상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니고, 저녁이면 불빛이 담장 너머로 새어나오던 풍경이 이 72필지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밀집 주거지는 특히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던 공간일수록, 그 아래에는 더 두텁고 다양한 생활 유구가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부엌 자리, 담장 기초, 배수로, 공동 우물, 생활도구 파편들이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미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 도심 여러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토지 구조를 가진 곳에서 생활 유적이 다수 확인된 사례가 있고, 필동3가 역시 그 가능성을 72필지에 걸쳐 품고 있습니다.
72필지, 72채의 집. 그 안에 72개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 삶들이 지금도 이 땅 아래에 흔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잡종지와 밭 — 도시가 되기 직전 필동3가의 마지막 흔적

잡종지 3필지 1,157㎡, 밭 4필지 8,148㎡. 숫자는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들이야말로 필동3가가 완전한 도시로 변하기 직전의 마지막 흔적입니다. 체부동처럼 전 필지 대지로 채워진 동네와 달리, 필동3가에는 아직 밭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밭에서 누군가는 배추를 기르고, 고추를 심고, 가족의 한 끼를 자급하며 살았습니다. 도시로의 전환이 진행 중이었지만,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여전히 흙을 만지던 사람들이 이 4필지 안에 있었습니다.
잡종지는 더 흥미로운 공간입니다. 창고, 공터, 임시 시설, 야적장, 혹은 특정 용도를 아직 정하지 못한 땅. 잡종지라는 이름 자체가 이 공간의 성격을 설명해줍니다. 뭔가로 바뀌기 직전의 땅, 아직 완전히 도시화되지 않은 공간.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잡종지는 토기 파편, 생활 도구, 배수로 흔적이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특정 용도로 정착하지 않은 채 여러 방식으로 사용된 공간일수록, 그 아래에는 다양한 층위의 사용 흔적이 겹쳐 있기 때문입니다.
대지 91%와 밭+잡종지 9%의 경계 지점. 이 경계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구역입니다. 두 가지 토지 이용 방식이 맞닿은 곳에서 다양한 생활 유구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발굴 현장에서 자주 관찰되는 패턴입니다. 필동3가의 잡종지와 밭이 대지와 만나는 경계 7필지가 그런 의미에서 핵심 조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국유지 5필지가 남긴 흔적 — 공공의 기억
1912년 필동3가에는 국유지가 5필지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전체 79필지에서 약 6%에 해당합니다. 국유지는 대체로 도로, 공공시설, 군사 또는 행정 목적과 연관됩니다. 필동3가는 남산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일제는 남산을 중심으로 군사·행정·종교 시설을 집중적으로 배치했고, 그 주변 공간인 필동 일대에도 공공 목적의 토지가 확보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화재 조사에서 국유지 인근은 항상 우선 검토 대상이 됩니다. 공공 기능을 가진 공간은 이전 시대의 시설이 중첩되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국유지 아래에 조선 시대 관아 시설의 기초가 있는 경우, 혹은 그 이전 시기의 유구가 보존된 경우가 실제 발굴 현장에서 확인된 사례가 있습니다. 필동3가의 국유지 5필지도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남산 방면에 인접한 필지일수록 군사·행정 관련 구조물의 흔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국유지 인근에서 발견되는 주요 유구 유형
도로 예정지 → 이전 시기 통행로·골목 흔적
행정 목적 공간 → 관아 건물 기초, 부속 시설 흔적
군사 목적 공간(남산 인근) → 방어 시설, 군사 관련 구조물
공공 시설 부속지 → 배수 시설, 우물, 공용 공간 흔적
일본인 소유 65필지가 의미하는 것
이 글에서 가장 시선을 붙잡는 숫자가 바로 이것입니다. 전체 79필지 중 65필지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약 82%. 지금까지 살펴본 회현동 시리즈(회현동3가 92%, 회현동2가 76%, 회현동1가 74%)와 비교해도 결코 낮지 않은 수준입니다. 오히려 82%라는 비율은 필동3가가 식민지 초기 일본인의 토지 집중 현상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지역 중 하나였음을 보여줍니다.
1912년 필동3가 토지 소유 구조 (79필지 기준)
일본인 65필지 (82%)
조선인 등
국유·기타
일본인 소유 (65필지)
조선인 등 (9필지)
국유 (5필지)
82%라는 비율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지리적 조건이 있습니다. 필동3가는 남산과 가깝습니다. 일제는 남산을 중심으로 조선신궁, 총독부 관사, 군사 시설 등 식민지 지배의 핵심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배치했습니다.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하거나 투자하려는 일본인들의 수요가 자연스럽게 이 일대로 집중되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그 수요를 합법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이런 높은 일본인 소유 비율 지역은 독특한 역사 층위를 만들어냅니다. 조선 후기 유구 위에 일제강점기 건축 흔적이 겹쳐 나오는 이른바 '중층 유구'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식 기와 아래에 일본식 건축 기초가 있고, 조선의 담장 옆에 근대적 벽돌이 나오는 구조입니다. 이런 중층 유구는 학술적으로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집니다. 단순히 유물을 찾는 것을 넘어, 두 시대의 생활 방식이 어떻게 충돌하고 혼재했는지를 물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층 유구(重層遺構)란 — 필동3가에서 발견될 수 있는 구조
🏡
최상층: 일제강점기 건축 기초 · 근대식 벽돌 구조물 · 일본식 기와
🧱
중간층: 조선 후기~대한제국 시기 생활 유구 · 한옥 담장 기초 · 배수로
🪨
하층: 조선 시대 초기~중기 유구 · 초기 도로 흔적 · 생활 토기 일괄
⚗️
학술적 의미: 두 시대의 공간 사용 방식 비교 · 식민지 도시 변화 물질 증거

문화재 지표조사와 필동3가의 현재적 가치
지금까지 살펴본 필동3가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 동네가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로서 얼마나 복합적이고 중요한 공간인지가 분명해집니다. 대지 72필지의 고밀 주거, 잡종지와 밭이 만드는 경계, 국유지 5필지의 공공 시설 흔적 가능성, 그리고 82%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가 만들어낸 중층 유구의 가능성. 이 네 가지 조건이 한 공간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필동3가는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할 경우 매우 매력적인 조건을 갖춘 지역입니다. 주거 밀집, 농경 흔적, 국유지, 식민지 시기 토지 구조가 한 공간에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건, 조사 단계마다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지표조사에서 신호가 잡히면 시굴조사로, 시굴조사에서 유구가 확인되면 정밀 발굴조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재개발, 도로 공사, 건축 허가가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필동3가는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공간입니다. 모르고 시작한 공사가 공사 중 유구 발견으로 인해 수개월 중단되는 것은, 역사적 손실은 물론 사업자에게도 실질적인 비용과 시간의 손실을 가져옵니다. 처음부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에 의뢰해 지표조사를 선행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문화재 발굴 성공 사례로 보는 가능성

서울 도심의 다른 지역에서도 필동3가와 비슷한 토지 구조를 가진 곳에서 중요한 발굴 성과가 나온 사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중구 일대의 한 재개발 현장이었습니다. 일본인 소유 비율이 높았고, 대지와 잡종지가 혼재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미 여러 차례 건물이 세워진 곳이라 유구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낮다"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행한 결과, 지표에서 조선 후기 기와편과 분청사기 파편이 수습되었고 시굴조사로 이어졌습니다. 시굴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일제강점기 건물 기초 아래에서 조선 시대 생활층이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습니다. 전형적인 중층 유구였습니다. 정밀 발굴조사가 진행된 이 현장에서는 두 시대의 생활 방식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물질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출토되었고, 개발 일정은 조정되었지만 지역의 역사적 가치는 오히려 더 크게 조명되었습니다.
필동3가는 충분히 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79필지 안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위들이 올바른 조사 과정을 거칠 때, 우리가 아직 모르는 남산 자락 아래 필동3가의 이야기가 새롭게 써질 수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물 산포 확인, 유적 가능성 판단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직접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서 — 우리가 이 기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개발은 빠르고, 보존은 느립니다. 하지만 기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1912년 필동3가의 토지조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이 땅 아래에 남아 있는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도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필지, 한 집, 한 사람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서울이 되었습니다. 1912년 필동3가의 79필지는 그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화려한 궁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필동3가처럼 남산 자락의 조용한 골목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숫자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과거를 파헤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의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게 온전한 기억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글을 덮는 순간, 다음에 필동 골목을 지나게 된다면 발밑의 땅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72채의 집이 있던 곳, 밭과 잡종지가 대지와 맞닿아 있던 경계, 65필지가 다른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던 그 시간. 과거와 현재가 아주 잠깐, 발밑에서 이어지는 그 순간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경험입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필동3가 외에도 회현동 시리즈 등 다양한 동네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지금 이 글을 읽고 필동을 지나게 된다면,딱 한 번만 멈춰 서보세요.남산을 올려다보며 생각해 주세요.저 산 아래, 이 골목 아래에72명의 사람이 살았고,4필지의 밭에서 누군가 흙을 만졌으며,65필지가 다른 이름으로 적힌 채그래도 사람들은 여기서 하루하루를 버텼다는 사실을요.그 사람들을 기억해주는 것이도시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입니다.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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