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중구 필동2가 토지로 읽는 서울의 숨겨진 진실

1월 1일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9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조사문화재 발굴 기관필동2가 역사중구 지역조사서울 문화유산남산 역사

이 골목 아래에 어떤 시간이 묻혀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 1912년 중구 필동2가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는 선택받은 땅의 기록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중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필동2가 134필지·172,265㎡에 담긴 복합 토지 구성과 일본인 소유 102필지의 역사적 의미를 풀어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 아래에 어떤 시간이 묻혀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아무 생각 없이 지나던 골목 하나가 사실은 100년 전 도시의 욕망과 선택이 겹겹이 쌓인 장소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1912년의 중구 필동2가는 단순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총 134필지, 무려 172,265㎡. 숫자만 봐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134필지 중 102필지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국유지도 14필지나 있었습니다. 이 글은 그냥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재개발, 건축, 그리고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끝까지 읽게 될 이야기입니다.

134

총 필지 수


(1912년 필동2가)

172,265

총 면적(㎡)


남산 자락 최대 규모

102

일본인 소유


(전체의 76%)

14

국유지 필지


시리즈 최고 수준



프롤로그 — 필동2가 땅이 말해주는 이야기

1912년 필동2가는 이미 도시로 숨 쉬고 있었습니다. 전체 134필지 중 127필지가 집이 있던 대지였고, 면적은 162,800㎡였습니다. 이 말은 곧 이 동네가 주거 중심지로서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서울 다른 지역을 보면 밭이나 임야 비중이 훨씬 큰 곳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필동2가는 달랐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생활이 돌아가고 있었고,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입지 때문입니다. 남산 자락, 도심 접근성, 행정과 상업 중심과 가까운 위치. 지금 우리가 좋은 동네라고 말하는 조건들이 1912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이 동네를 식민지 도시 구조의 핵심 실험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 동네를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중구 필동2가


총 필지 수: 134필지 / 총 면적: 172,265㎡


대지: 127필지, 162,800㎡ (전체의 약 95%)


밭(전): 4필지, 7,100㎡ / 잡종지: 3필지, 2,363㎡


국유지: 14필지 / 일본인 소유: 102필지 (전체의 약 76%)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중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선택받은 땅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1912년 필동2가가 선택받은 이유를 알면, 지금 이 땅이 왜 중요한지도 저절로 이해됩니다.



필동2가의 공간 구성 — 집과 삶의 밀도, 대지 127필지

127필지의 대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골목이 있었고, 마당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고, 사람들의 일상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당시 대지 면적 비율을 보면 필동2가는 이미 도시형 주거지였습니다. 농촌에서 막 벗어난 과도기가 아니라, 완성된 생활권에 가까운 공간이었습니다.

1912년 필동2가 토지 구성 (134필지 기준)

대지

95% · 162,800㎡

127필지

국유지

10%

14필지

밭(전)

3%

4필지

잡종지

2%

3필지

이런 지역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굉장히 민감하게 다뤄집니다. 집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유물도 많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생활 유구, 기초석, 배수로, 우물 흔적. 이런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할 때 가장 주의 깊게 보는 유형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대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지역입니다.

필동2가의 172,265㎡라는 면적도 눈에 띕니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동네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규모입니다. 면적이 크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층위의 역사가 쌓여 있을 가능성도 높다는 의미입니다. 넓은 공간에 걸쳐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밭과 잡종지 — 도시와 자연의 경계, 7필지의 의미

필동2가에는 밭도 있었습니다. 4필지 7,100㎡. 그리고 잡종지 3필지 2,363㎡. 전체 134필지에서 비율로는 작지만, 이 7필지가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습니다. 도시가 어떻게 확장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경계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밭(전) 4필지 · 7,100㎡

도시가 밀려오기 직전의 마지막 여백. 생계를 위한 경작지이자 도시와 자연의 경계선. 이 필지에서 임시 구조물·창고·소규모 시설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잡종지 3필지 · 2,363㎡

창고, 공터, 임시 시설 등 아직 용도가 확정되지 않은 과도기 공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 흔적이 겹쳐 있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히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구간.

밭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닙니다. 도시가 밀려오기 직전의 마지막 여백입니다. 이런 공간은 임시 건물, 창고, 비공식 구조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반드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구간입니다. 실제로 많은 발굴 사례에서 밭으로 기록된 필지에서 중요한 유구가 발견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지표 교란이 적어 이전 시기 유구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잡종지는 더 흥미롭습니다. 특정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채 여러 방식으로 활용된 공간. 그 유연한 사용 방식이 오히려 다양한 층위의 흔적을 남깁니다. 필동2가의 밭과 잡종지가 대지와 만나는 경계 지점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구역입니다.

밭 4필지. 도시가 완전히 도달하기 직전의 마지막 숨결. 그 경계에서 역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국유지 14필지의 존재 — 무엇을 의미했을까

필동2가에는 국유지가 14필지나 있었습니다. 이 수치는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동네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충신동 1필지, 체부동 법인 2필지, 청진동 2필지, 필동3가 5필지. 이 흐름에서 필동2가의 14필지는 압도적입니다. 이건 그냥 행정용 땅이 아닙니다.

필동2가 국유지 14필지 — 가능한 용도와 문화재 조사 의미

🛣️

도로 및 통행로 → 이전 시기 골목·통행 구조물 흔적 존재 가능성

🏛️

공공시설 부속지 → 행정 관련 건물 기초·부속 시설 유구 발견 가능성

⚔️

군사 관련 시설(남산 인근) → 방어 구조물·군사 관련 유구 존재 가능성

📋

행정 관리 목적 부지 → 장기 관리로 인한 지층 안정성 높음, 조사 우선 대상

국유지가 많다는 건 그 지역이 이미 국가 단위에서 관리 대상이었다는 뜻입니다. 필동2가는 남산과 가깝습니다. 일제는 남산을 중심으로 군사·행정·종교 시설을 집중 배치했고, 그 주변 공간에 공공 목적의 토지가 확보되어 있었습니다. 14필지라는 높은 수치는 필동2가가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식민지 행정 체계 안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문화재 조사에서 국유지 인근은 항상 우선 검토 대상이 됩니다. 공공 기능을 가진 공간은 위치가 크게 변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이전 시대의 시설 흔적이 중첩되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땅의 기억이 가장 오래 남는 곳이 바로 이런 공공 목적 공간입니다. 필동2가의 14필지 국유지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조사의 방향이 크게 달라집니다.


일본인 토지 소유 102필지가 남긴 흔적



이 숫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습니다. 102필지. 전체 134필지 중 76%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회현동 시리즈(74~92%)나 필동3가(82%)와 비슷한 수준으로, 필동2가 역시 식민지 토지 집중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공간이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개인 소유가 아닙니다. 식민지 도시 전략의 결과입니다.

1912년 필동2가 토지 소유 구조 (134필지 기준)

일본인 102필지 (76%)

조선인 등

국유 14필지

일본인 소유 (102필지)

조선인 등 (18필지)

국유지 (14필지)

도심 요지, 주거 밀집지, 향후 개발 가치가 높은 곳. 이런 곳부터 집중적으로 토지를 확보하는 것이 식민지 도시 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필동2가는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식민지 도시 구조의 핵심 실험장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산이라는 상징적 거점과 가까운 위치, 도심 접근성, 그리고 이미 완성 단계에 있는 주거 밀집 구조. 이 세 가지가 102필지를 만들어낸 배경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런 높은 일본인 소유 비율 지역은 독특한 역사층을 만들어냅니다. 조선인의 생활 흔적 위에 일본식 구조물이, 그 위에 다시 광복 이후 변화의 흔적이 겹쳐집니다. 혼합 양식 유구, 서로 다른 건축 방식의 기초 구조물, 두 시대의 생활 도구들이 같은 땅에서 출토되는 것이 이런 지역의 특징입니다. 학술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이유입니다.

필동2가 국유지 비율 시리즈 비교


충신동: 국유지 1필지 / 214필지 (0.5%)


청진동: 국유지 2필지 / 302필지 (0.7%)


통의동: 국유지 5필지 / 147필지 (3.4%)


필동3가: 국유지 5필지 / 79필지 (6.3%)


필동2가 ★: 국유지 14필지 / 134필지 (10.4%) — 시리즈 최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이 중요한 이유

이제 왜 이 이야기가 중요한지 감이 옵니다. 필동2가 같은 지역에서 건축이나 개발을 계획한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는 선택이 아닙니다. 필수입니다. 지표조사에서 토기 파편 하나, 기와 조각 하나, 석축 흔적 하나만 나와도 시굴조사로,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사전 준비의 여부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처음부터 선행한 사업자는 조사 결과에 따라 설계를 수정하고 일정을 조율할 여유가 생깁니다. 반면 조사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가 공사 중 유구가 발견되면, 모든 것이 멈춥니다. 시간, 비용, 그리고 역사적 손실까지. 필동2가처럼 국유지 14필지와 일본인 소유 102필지가 혼재한 복합적인 공간에서는 그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필동2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 이유


대지 95% → 오랜 생활 역사층, 생활 유구 집약 가능성


국유지 14필지(시리즈 최고) → 행정·군사 관련 구조물 흔적


밭·잡종지 경계 7필지 → 전환기 시설 흔적, 지표 교란 적음


일본인 소유 76% → 조선·일제 혼합 층위의 중층 유구


남산 인근 위치 → 장기 역사층 보존, 군사·행정 유구 가능성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이런 지역을 만나면 긴장하면서도 기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필동2가처럼 복합적인 조건을 가진 공간에서는 한 번의 조사로 여러 시대를 동시에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발굴 결과가 도시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자료가 됩니다.


실제 성공 사례로 보는 문화재 조사의 힘



서울 도심의 한 재개발 지역에서 초기 문화재 지표조사를 성실하게 진행했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유구가 확인됐지만, 초기 단계에서 대응했기 때문에 결과가 달랐습니다. 설계 변경과 보존 후 활용으로 방향을 바꾼 이 현장은 오히려 지역 브랜드 가치가 올라갔습니다. 문화재를 피한 게 아니라 문화재를 자산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사례에서 핵심은 타이밍입니다. 지표조사를 처음부터 선행했기 때문에 조사 결과에 따른 설계 변경이 가능했고, 발굴된 유구가 지역의 역사적 가치로 재탄생했습니다. 만약 공사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시점에 유구가 발견됐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랐을 겁니다. 필동2가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지역입니다. 국유지 14필지와 복합 토지 구성이 말해주는 역사적 가능성을 먼저 파악하고 조사하는 것이, 개발과 보존 모두에 유리한 선택입니다.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닙니다. 미래의 리스크를 줄이고, 도시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필동2가의 땅이 조용히 그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물 산포 확인, 유적 가능성 판단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직접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필동2가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1912년의 필동2가는 이미 도시였고, 이미 경쟁의 대상이었고, 이미 선택받은 땅이었습니다. 그 선택의 흔적은 지금도 땅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를 바라볼 때 그냥 오래된 동네라고 보면 안 됩니다. 시간이 겹겹이 쌓인 장소, 기억이 잠들어 있는 땅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이미 이 땅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이해하는 순간 지금의 선택이 달라지고, 도시는 조금 더 단단해집니다. 134필지 안에 쌓인 127채의 집, 14필지의 국유지, 그리고 102필지에 걸쳐 새겨진 역사. 필동2가는 그 모든 것을 조용히 품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지금 필동 골목을 걷고 있다면, 발밑을 한 번 떠올려보세요. 수백 채의 집, 수백 명의 생활,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오늘의 서울.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이 계속되는 한, 필동2가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필동2가 외에도 필동3가, 회현동 시리즈 등 다양한 동네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필동 골목을 지나다 남산을 올려다볼 때,딱 한 번만 발밑을 떠올려주세요.127채의 집이 있었고,14필지의 국유지가 있었으며,102필지가 다른 이름으로 적힌 채그래도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루를 살아냈습니다.그 선택받은 땅 위에지금의 서울이 서 있습니다.기억해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댓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