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충정로1가 토지로 읽는 서울의 시작, 외국인 소유까지 한눈에 정리
- 2025년 12월 2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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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국·프랑스·일본·중국이 한 동네에 공존했다 — 1912년 중구 충정로1가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는 국제 도시 서울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중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충정로1가 103필지·57,315㎡에 담긴 5개국 외국인 소유 구조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의 의미를 풀어냅니다.
1912년의 충정로1가는 이미 완성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는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일본인, 중국인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103필지 57,315㎡. 102필지가 대지. 단 1필지만이 밭이었습니다. 이미 도시로서 완성 단계에 있던 이 공간에 5개국의 외국인 소유 토지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미국인 3필지, 영국인 4필지, 프랑스인 1필지. 여기에 일본인 5필지, 중국인 3필지까지. 이 조합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왜 지금도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근거가 되는지, 함께 읽어봅니다.
103
총 필지 수
(102필지 대지)
57,315
총 면적(㎡)
1912년 기준
8
서양 3개국 소유
(미국·영국·프랑스)
5
개국 외국인
소유 혼재

숫자로 시작되는 1912년 충정로1가의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란
1912년 중구 충정로1가는 103필지, 총면적 57,315㎡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이 안에는 이미 도시로 기능하고 있던 서울의 초상이 담겨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이 밭이나 임야였던 시기임에도, 충정로1가는 예외에 가까운 완성형 도시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 다섯 개 나라의 외국인 소유 토지가 함께 존재했습니다.
이 기록을 읽어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의 지면 위와 아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이 조사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로, 이후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정리해 이 조사의 기초 자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충정로1가는 그 기록 안에서 이 시리즈의 다른 어떤 동네보다 많은 국적의 외국인 소유 토지를 가진 공간입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다섯 개 나라의 이름이 103필지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다양성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읽어봅니다.
도시는 기억 위에 세워질 때 가장 단단해집니다. 충정로1가의 1912년 기록이 바로 그 기억의 첫 페이지입니다.
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 — 대지 102필지의 의미
102 / 103
1912년 충정로1가 103필지 중 102필지가 대지였습니다.
나머지 1필지는 밭. 도시 한복판에 남은 마지막 여백이었습니다.
이미 주거와 상업이 혼합된 완성형 도심 구조였습니다.
전체 103필지 중 무려 102필지, 면적으로는 54,512㎡가 집이 있던 대지였습니다. 이미 주거와 상업이 혼합된 도심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의 충정로는 길이 있었고, 사람들이 모였고,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도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충정로1가는 그 과정을 가장 빨리 겪은 동네 중 하나였습니다.
102필지 대지라는 수치는 이 시리즈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전 필지 대지였던 체부동, 청진동, 태평로1가와 달리 충정로1가에는 밭 1필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99.03% 대지 구성. 거의 완전히 도시화되었지만, 마지막 한 필지만이 그 이전 시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구성이 문화재 발굴 가능성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중구 충정로1가
총 필지 수: 103필지 / 총 면적: 57,315㎡
대지: 102필지, 54,512㎡ (전체의 99%) / 밭(전): 1필지, 2,803㎡
국유지: 3필지 / 미국인: 3필지 / 영국인: 4필지 / 프랑스인: 1필지
일본인: 5필지 / 중국인: 3필지
이씨: 16필지 / 김씨: 15필지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중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밭 1필지가 말해주는 풍경 — 마지막 여백
밭은 단 1필지, 2,803㎡뿐이었습니다. 이 한 필지는 오히려 상징적입니다. 도시 한복판에 남아 있던 마지막 여백이었기 때문입니다. 102필지가 모두 집으로 채워진 가운데, 딱 1필지만이 아직 흙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 땅은 도시화의 물결이 완전히 닿기 직전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소규모 농경지는 절대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경작 행위는 표층을 교란하지만, 그보다 깊은 층위는 비교적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102필지의 대지들 사이에 홀로 남아 있던 이 1필지는, 주변 건물들이 세워지는 동안에도 지표가 덜 교란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땅은 훗날 가장 먼저 개발 대상이 되거나, 중요한 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밭 1필지. 103필지 중 유일한 비대지. 도시가 완전히 완성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숨을 쉬던 여백이었습니다.
국유지와 도시 관리의 흔적 — 3필지가 남긴 의미
충정로1가에는 3필지의 국유지가 존재했습니다. 국유지는 도로, 관청 부지, 공공시설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이 지역이 이미 행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훗날 충정로가 주요 도로축으로 발전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국가가 이 공간을 이미 시선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재 조사에서 국유지 인근은 항상 우선 확인 구역입니다. 공공 목적으로 사용된 공간에는 이전 시기 시설의 기초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정로1가의 3필지 국유지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첫 번째 확인 사항이 됩니다. 이 동네가 이미 행정과 교통의 축으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연결해서 읽으면, 국유지의 위치가 더 선명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씨로 본 토지 소유 구조 — 이씨와 김씨
성씨별 토지 소유를 보면 당시 사회 구조가 보입니다. 이씨가 16필지, 김씨가 15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합계 31필지로 전체 103필지의 30%를 차지합니다. 특정 성씨가 독점하지 않고 비교적 분산된 구조였습니다. 체부동(김씨 42필지)이나 충신동(김씨 48필지)처럼 특정 가문이 집중 거주하는 형태와는 달랐습니다.
1912년 충정로1가 주요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李
이씨 16필지
金
김씨 15필지
이씨가 김씨보다 1필지 많다는 것도 이 시리즈에서 눈에 띕니다. 대부분의 동네에서 김씨가 가장 많은 필지를 차지했지만, 충정로1가에서는 이씨가 1위입니다. 이는 이 지역에 이씨 성을 가진 관료나 상인 계층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상업 활동과 임대가 활발했을 가능성이 높고, 특정 가문의 세대 거주보다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경제적 활동 공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미국·영국·프랑스까지 — 서양 외국인 토지의 의미

충정로1가는 국제적인 공간이었습니다. 미국인 소유 토지 3필지, 영국인 소유 토지 4필지, 프랑스인 소유 토지 1필지. 합산 8필지, 전체의 7.8%에 달하는 서양 외국인 소유 토지가 이 동네 안에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 전체에서 서양 외국인 소유 합계가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미국인 소유
3필지
선교·외교 관련
🇬🇧영국인 소유
4필지
외교·상업 관련
🇫🇷프랑스인 소유
1필지
가톨릭·외교 관련
8
서양 3개국 합산 8필지. 이 시리즈 전체 최고 수준입니다.
선교 시설, 외교 관련 공간, 근대식 건물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특히 영국인 4필지는 이 시리즈에서 영국인이 등장한 첫 번째 사례입니다.
충정로 일대는 조선 말기부터 선교사들의 활동 공간이었습니다. 미국 감리교 계열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학교와 병원을 세웠고, 영국과 프랑스 관련 인물들도 이 일대에 거주했습니다. 이런 서양 외국인 소유지에서는 문화재 발굴조사 시 서양식 건축 기초, 벽돌 구조물, 유리 파편, 서양 생활용품 같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아래 조선인 생활 유구와 겹쳐져 출토된다면, 충정로1가의 복합 문화 층위가 실물로 확인되는 순간이 됩니다.
일본·중국인 소유 토지가 남긴 도시 변화
일본인 소유 토지는 5필지였습니다. 중국인 소유 토지도 3필지 확인됩니다. 이는 충정로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국제 교류의 거점이었음을 뜻합니다. 상점, 사무소, 숙소가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복합적 성격은 지표조사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일본인 소유
5필지
행정·상업 관련
🇨🇳중국인 소유
3필지
상업·교역 관련
1912년 충정로1가 토지 소유 구조 (103필지 기준)
조선인 등 (79필지, 77%)
서양 8필지
일본 5필
중국 3필
국유 3
조선인 등 (79필지)
서양 3개국 (8필지)
일본인 (5필지)
중국인 (3필지)
국유지 (3필지)
5개국 외국인 소유를 합산하면 16필지입니다. 전체 103필지의 15.5%에 달합니다. 조선인 등이 77%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23%가 5개 나라의 이름으로 분산되어 있었다는 구조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국제적인 소유 구성을 보여줍니다. 태평로2가(일본 24%+중국 19%)처럼 일본과 중국이 압도적이지 않고, 서양·아시아가 고루 분산된 형태. 충정로1가만의 독특한 특성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충정로1가

이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 우선 검토 대상지로 분류할 만합니다. 대지 중심의 토지 구조, 서양 3개국 외국인 소유 8필지, 아시아 2개국 외국인 소유 8필지, 국유지의 존재가 동시에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조건을 가진 지역에서 근대 건축 기초와 생활 유물이 다수 발견된 사례가 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됐다면 사라졌을 역사입니다.
충정로1가의 복합 문화 층위는 이 시리즈의 다른 동네들과 다른 방향의 발굴 가능성을 가집니다. 회현동처럼 일본인 소유가 압도적인 곳에서는 조선·일제 중층 유구가 기대됩니다. 하지만 충정로1가처럼 영국·미국·프랑스·일본·중국이 고루 분산된 곳에서는 각국의 건축 방식과 생활 용품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복합 문화층은 학술적으로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집니다.
충정로1가 문화재 지표조사 핵심 특성
대지 99% → 조선 시대부터 이어온 밀집 생활 역사층
서양 3개국 8필지(시리즈 최고) → 선교·외교·상업 관련 서양식 유물 출토 가능성
일본·중국 8필지 → 아시아 다국적 상업 활동 흔적
밭 1필지(도시 한복판 마지막 여백) → 하층 유구 보존 가능성
이씨·김씨 분산 소유 → 다양한 계층 생활 유구 혼재
발굴조사가 필요한 이유와 성공 사례

서울 도심의 한 재개발 현장에서는 사전 문화재 조사를 통해 근대 배수시설과 외국인 거주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조사는 공사를 멈추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설계를 보완하고 지역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발굴 결과는 지역 역사 전시로 재탄생했고, 충정로처럼 국제적 역사를 가진 공간임이 밝혀졌습니다. 충정로1가 역시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조사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처음부터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행한 사업자는 공정 지연 없이 사업을 이어갔고, 발굴 결과가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자산이 되었습니다. 반면 조사 없이 시작한 현장은 공사 중 유구 발견으로 수개월 중단이라는 비용을 치렀습니다. 충정로1가처럼 서양·아시아 외국인 소유가 복합적으로 혼재한 공간에서 이 차이는 더욱 클 수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물 산포 확인, 유적 가능성 판단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직접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오늘의 충정로1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면
지금의 충정로1가는 바쁩니다. 하지만 땅 아래에는 1912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집이 가득했던 동네, 영국인과 미국인이 오가던 거리, 마지막 밭 1필지가 남아 있던 풍경. 이씨 16필지와 김씨 15필지가 이웃해 있던 골목. 일본인과 중국인의 상점이 섞여 있던 거리. 이 모든 장면이 103필지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도시는 기억 위에 세워질 때 가장 단단해집니다. 읽는 당신이 오늘 충정로를 지난다면, 발밑의 시간을 한 번쯤 떠올려보길 바랍니다. 그 순간, 이 글은 제 역할을 다한 셈입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충정로1가 외에도 태평로1가·2가, 회현동 시리즈 등 다양한 동네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충정로를 걷다 잠깐 멈춰보세요.이 땅 아래에미국인의 집이 있었고, 영국인의 사무소가 있었으며, 이씨와 김씨의 골목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시 한복판의 밭 한 필지에서 누군가는 마지막 흙을 만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들이지금 당신의 발밑에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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