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충무로5가 토지조사로 본 식민지 도시의 민낯
- 2025년 12월 28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서울 도시사
당신이 걷는 그 골목, 사실은 누군가의 빼앗긴 땅 위에 서 있다 — 1912년 충무로5가 토지 기록이 드러내는 충격적인 진실
지금 이 순간, 서울 충무로를 걷는다면 화려한 간판과 극장, 세련된 카페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그 반짝이는 거리 밑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2년, 이 땅의 88개 필지 중 무려 79필지의 주인이 일본인이었다. 거의 전부였다. 문화재 발굴 기관과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이 땅을 주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목차
01 숫자로 시작되는 불편한 진실 — 88필지의 기록
02 충무로5가의 토지 구조 — 무엇이 어떻게 나뉘어 있었나
03 집이 많다는 건, 사람이 많다는 뜻일까 — 소유권의 역설
04 밭과 산이 남아 있던 도심의 경계 — 과도기의 풍경
05 국유지와 도로 — 지배 구조가 남긴 흔적
06 일본인 소유 79필지가 말해주는 것 — 선점과 수탈의 구조
07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읽는 충무로5가
08 오늘 우리가 이 기록을 봐야 하는 이유

숫자로 시작되는 불편한 진실
1912년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조금 묵직해진다. 그 해는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는 이 기록이다. 충무로5가, 총 88필지, 총면적 45,613㎡. 숫자만 보면 건조하게 느껴지지만, 이 숫자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집이 있었고, 생계가 있었고, 삶이 있었다.
88
총 필지 수
45,613㎡
총 면적
79필지
일본인 소유
1912년
조사 기준 연도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이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주목한 첫 번째 포인트가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토지 면적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시 지배 구조의 설계도가 이 안에 담겨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충무로 일대를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하는 이유도 여기서 시작된다. 땅의 역사가 곧 그 위에 묻힌 것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02
충무로5가의 토지 구조 — 무엇이 어떻게 나뉘어 있었나
88개 필지는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지(집), 전(밭), 임야(산), 도로, 그리고 국유지. 이 다섯 가지 조합이 1912년 충무로5가의 공간 구성을 만들어냈다.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건 대지였는데, 77필지에 30,730㎡가 집터로 분류되어 있었다. 전체 필지의 87.5%가 대지였다는 이야기다.
대지 (집)
77필지 · 30,730㎡
87.5%
전 (밭)
6필지 · 12,324㎡
6.8%
임야 (산)
4필지 · 2,370㎡
4.5%
국유지
3필지
3.4%
도로
1필지 · 188㎡
1.1%
이 비율이 흥미로운 건, 도로가 단 하나의 필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188㎡, 가로 한 블록도 되지 않는 면적이다. 지금의 충무로가 사통팔달로 뻗은 넓은 도로를 가진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1912년 시점에는 도시 기반 시설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고, 이는 역설적으로 그 이후에 이루어진 개발이 얼마나 급격하고 계획적이었는지를 암시한다.

집이 많다는 건, 사람이 많다는 뜻일까 — 소유권의 역설
77필지에 집이 있었다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나온다. 집이 많다는 건 정말로 사람이 많이 산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단순히 건물이 많다는 뜻일까? 그리고 더 결정적인 질문, 그 집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1912년 충무로5가에서 거주하거나 영업하던 조선인들은 실제로 상당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땅의 법적 소유권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살고는 있지만 소유하지는 못하는 상태, 이것이 당시 조선인들이 처했던 현실이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부동산 이슈가 아니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사업을 할 수 있는지,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의미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전문가들은 이 시기의 토지 기록을 분석할 때, 소유권의 분포가 당시 사회 구조의 거울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땅의 소유 구조가 바로 그 시대의 권력 지형이기 때문이다.
실제 사례를 들어보면 더 생생하게 와닿는다. 충무로 일대에서 오랫동안 포목 장사를 했던 조선인 상인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들은 몇 대에 걸쳐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이어왔지만, 토지조사사업 이후 땅의 소유권이 정리되면서 졸지에 세입자 신세가 되거나 쫓겨나는 경우가 속출했다. 집이 있다는 것, 가게가 있다는 것과 그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밭과 산이 남아 있던 도심의 경계 — 과도기의 풍경
지금의 충무로를 생각하면 밭이나 산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1912년 당시 충무로5가에는 밭이 6필지, 무려 12,324㎡나 있었다. 이 면적을 쉽게 환산하면 축구장 약 1.7개에 해당한다. 도심 한복판에 농경지가 그 정도 규모로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임야까지 4필지, 2,370㎡가 더해진다. 산이다. 지금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곳에 나무가 서 있었고, 누군가가 그 땅을 갈아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 장면이 단순히 낡은 풍경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서울 한복판에서 흔들리고 있던 시대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경작지와 임야가 있었다는 것은 그 아래 토층이 상대적으로 교란이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건물 기초를 파내거나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땅일수록, 그 아래에 오래된 유구나 유물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것이 서울 도심 발굴 기관들이 충무로 일대의 농경지·임야 분포를 먼저 파악하는 이유다.
국유지와 도로 — 지배 구조가 남긴 흔적
1912년 충무로5가에는 도로가 단 1필지, 188㎡에 불과했다. 이 숫자가 처음에는 단순한 통계로 보일 수 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수십 개의 집과 밭이 있는 공간에 도로가 하나뿐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오고 갔을까. 사실 이 시기에는 별도로 도로로 등록하지 않은 골목길들이 실제 통로 역할을 했다. 공식적인 도로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이후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도로 정비가 얼마나 급격한 공간 재편을 의미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국유지는 3필지가 확인된다. 국유지, 특히 이 시기의 국유지는 단순한 공공 시설 용지가 아니었다. 식민 통치 초기에 지정된 국유지는 경찰 파출소, 행정 기관, 군사 목적의 창고나 막사 등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이 3필지가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지정되었는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지만, 당시의 맥락상 이 땅들이 식민 통치의 물리적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서울 도심 문화재 발굴 사례들을 보면, 국유지로 지정됐던 구역에서 일제강점기 이전과 이후 시기의 층위가 한꺼번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행정과 통제의 공간은 그 자체로 역사의 층을 겹겹이 쌓아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소유 79필지가 말해주는 것 — 선점과 수탈의 구조
가장 충격적인 통계는 역시 이것이다. 88필지 중 79필지가 일본인 소유였다는 사실. 89.7%다. 거의 전부다. 이게 우연일 수 없다는 건, 당시 충무로 일대가 어떤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는지를 알면 더 분명해진다.
충무로는 한양 시절부터 중요한 상업로 중 하나였다. 그리고 강제병합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주도하는 오락과 상업의 중심지로 빠르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영화관이 들어서고, 인쇄소가 생기고, 상점들이 줄지어 자리를 잡았다. 이 모든 변화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이미 토지의 소유권이 특정 집단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토지조사사업의 실체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가 있다. 오래전부터 특정 지역에서 생활해온 조선인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해온 땅, 공동 경작지, 선산(先山) 등이 서류 미비를 이유로 국유지로 편입되거나 외부인에게 넘어가는 과정이 전국에 걸쳐 반복됐다. 충무로5가의 79필지는 그 전국적인 패턴이 서울 도심에서 구체적인 숫자로 드러난 사례다.
한 가지 성공 사례를 덧붙이자면, 최근 서울시와 문화재 조사 기관들이 협력해 이 시기의 토지 기록과 지적도를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2020년대 이후 충무로와 인근 을지로 일대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조선 후기 유물층이 확인된 사례가 이미 여러 건 나왔다. 토지 기록에서 시작한 단서가 실제 땅 속의 역사를 꺼내는 데 유의미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읽는 충무로5가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 공사나 건축 허가 전에 해당 지역에 문화재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사전에 평가하는 과정이다. 지상에 남아 있는 역사 기록, 지형, 토양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발굴 여부를 결정하는 필수 단계다. 쉽게 말하면, 땅을 파기 전에 그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를 예측하는 작업이다.
충무로5가는 이 기준으로 볼 때 지표조사의 우선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첫째, 조선 시대부터 도심 기능을 유지해온 역사적 연속성이 있다. 둘째, 일제강점기 초기의 토지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어 현재와의 비교 분석이 가능하다. 셋째,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개발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집중됐기 때문에, 일부 지하 구조물이나 유구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서울 도심 발굴의 성공 사례들을 살펴보면, 이와 유사한 조건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온 경우들이 있다. 종로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는 조선 후기 골목 구조와 생활 유구가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확인됐다. 중구의 한 재개발 구역에서는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유물층이 시굴조사로 이어지면서 중요한 성과를 낸 사례도 있다. 이런 경험들이 지표조사의 중요성을 현장에서 다시 한번 증명해주고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1912년 토지 기록을 분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의 토지 구성, 특히 밭과 임야의 분포, 국유지의 위치, 도로망의 부재 등은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얼마나 잘 보존되어 있을지를 예측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지표조사는 단순히 현재의 지표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 기록 속의 단서들을 함께 읽어내는 복합적인 작업이다.

오늘 우리가 이 기록을 봐야 하는 이유
1912년 충무로5가의 토지 기록은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도시를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매일 걷는 거리, 익숙하게 드나드는 골목, 편의점과 카페가 가득한 그 공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시의 피상적인 표면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보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위함이 아니다. 과거를 정확하게 이해할 때 비로소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설계할 수 있다. 문화재 발굴 기관과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이 일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땅을 파는 것은 단순히 유물을 꺼내는 행위가 아니라, 그 땅에 깃든 시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88필지, 45,613㎡, 79필지의 일본인 소유. 이 숫자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안에 살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을 기억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땅 문서에는 이름이 적히지 않았지만, 그 땅 위에서 아이를 키우고, 장사를 하고, 하루를 버텼던 사람들이 있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이 그 흔적들을 찾아내는 작업이라면, 이 기록을 읽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역사 참여다.
도시는 기억 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을 위한 공간이 된다. 충무로5가를 다음에 걷게 된다면, 한번쯤 발밑을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 단단한 아스팔트 아래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는지를.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누군가가 살아냈던 시간의 총합이다.그것을 기억하는 것이지금 이 도시를 진짜로 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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