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장충동2가, 땅 위에 남은 시간의 흔적과 문화재 발굴 이야기
- 2025년 12월 18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2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중구 도시유산
1912년 장충동2가의 비밀문화재 발굴이 꺼낸 123필지의 진짜 이야기
호텔과 공원이 들어서기 훨씬 전 — 20,046㎡가 품었던 사람들의 시간
지금 신라호텔이 서 있는 그 자리.
1912년에는 집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장충동족발 거리, 신라호텔, 장충체육관. 지금의 장충동2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야. 근데 1912년, 이 땅의 진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123필지 20,046㎡. 그 안에 집이 있고, 밭이 있고, 일본인 자본이 23필지나 침투해 있고, 김씨와 이씨의 삶이 촘촘히 쌓여 있었어. 문화재 발굴 기관과 지표조사가 왜 이 동네를 고위험 구간으로 분류하는지, 지금부터 완전히 파헤쳐볼게.
목 차
한 장의 숫자가 도시의 기억이 되는 순간
1912년 장충동2가의 전체 면적과 토지 구조
집 114필지와 밭 9필지, 일상의 풍경이 남아 있던 공간
성씨로 본 토지 소유 구조 — 누가 이 동네의 주인이었을까
일본인 소유 23필지가 말해주는 식민지의 그림자
지금 우리가 장충동2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시작되는 지점
실제 발굴 성공 사례가 알려주는 중요한 힌트
도시 개발과 문화유산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

1
한 장의 숫자가 도시의 기억이 되는 순간
123필지, 20,046㎡. 처음 이 숫자를 봤을 때 그냥 행정 기록처럼 느껴졌어. 근데 이 숫자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하면 느낌이 완전히 달라져.
1912년 중구 장충동2가. 지금처럼 신라호텔과 앰배서더 호텔, 장충체육관, 국립극장이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 삶의 냄새가 진하게 남아 있던 동네가 있었어. 골목마다 기와집이 있고, 집 뒤엔 밭이 있고, 저녁이면 연기가 피어오르던 풍경. 1912년의 장충동2가는 바로 그런 곳이었어.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이 이 기록을 분석하는 이유는 단순해. 1912년 토지 기록이 '어디를 조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정직한 지도이기 때문이야. 장충동3가와 이어지는 이 동네의 기록을 지금부터 펼쳐볼게.
123필지
전체 필지
20,046㎡
전체 면적
23필지
일본인 소유
(18.7%)
2
1912년 장충동2가의 전체 면적과 토지 구조
장충동2가 123필지 20,046㎡.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담한 규모야. 근데 당시에는 결코 작은 동네가 아니었어. 이미 분석한 장충동3가(74필지, 70,535㎡)에 비하면 필지 수는 더 많고 면적은 작아. 이건 장충동2가가 더 촘촘하게 분할된 도시형 주거지였다는 뜻이야.
장충동2가의 특징은 토지 구성이 비교적 단순하다는 거야. 복잡하게 사사지, 임야, 잡종지가 섞인 장충동3가와 달리, 장충동2가는 주거와 농경이 핵심이야. 이 단순함이 오히려 이 동네의 정체성을 더 선명하게 보여줘. 사람이 살고, 먹을 것을 기르고, 가족 단위로 터를 잡았던 생활 공간.
1912년 장충동2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지금의 서울을 만든 출발선이었다. 그 위에 호텔이 들어서기 전, 이미 수백 명의 삶이 쌓여 있었다.

3
집 114필지와 밭 9필지, 일상의 풍경이 남아 있던 공간
장충동2가 토지 구성의 핵심은 이 두 숫자야.
대지 (집터)
114필지
15,147㎡
밭 (농경지)
9필지
4,899㎡
114필지의 대지. 이건 114개의 집이 있었다는 뜻이야. 한 필지에 한 가족이 살았다고 치면, 최소 수백 명의 사람이 이 작은 동네에 모여 살았어. 골목마다 기와집과 초가가 섞여 있었을 거야.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어른들은 일을 했어. 그 일상이 15,147㎡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9필지, 4,899㎡의 밭. 이 밭이 중요해. 장충동2가 총 면적(20,046㎡)의 24.4%가 농경지였어. 도심 한가운데 4분의 1 가까이가 밭이었다는 건, 이 동네 사람들이 직접 식재료를 기르며 살았다는 뜻이야. 배추, 무, 파 같은 작물이 지금의 신라호텔 부근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었을지도 몰라.
이 밭의 존재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핵심 단서야. 밭이 있던 자리 아래에는 경작층이 쌓여 있어. 씨앗 흔적, 농기구 파편, 경작 경계를 알려주는 토층 변화. 이런 것들이 생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돼. 단순히 '밭이 있었다'는 기록 하나가 발굴 기관에게는 100년 전 사람들의 하루를 재구성하는 실마리가 되는 거야.
문화재 발굴에서 '생활 밀도'는 매우 중요한 지표야. 1필지당 면적이 좁고 필지 수가 많은 지역(장충동2가 평균 163㎡/필지)은 주거가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는 뜻이야. 이런 지역에서는 골목 포장, 배수로, 공동우물 같은 생활 인프라 유구가 연속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
4
성씨로 본 토지 소유 구조 — 누가 이 동네의 주인이었을까
1912년 장충동2가의 성씨 분포를 보면 이 동네가 어떤 사람들의 공간이었는지 바로 느껴져.
김씨
26필지
이씨
22필지
일본인
23필지
기타
다양 성씨
김씨 26필지, 이씨 22필지. 이 두 성씨가 전체에서 압도적이야. 특정 성씨가 집중적으로 토지를 소유했다는 건, 이 동네에 오랜 시간 뿌리내린 가문들이 있었다는 뜻이야. 대대로 이어진 땅, 가족 단위의 생활권, 서로 얼굴을 아는 이웃들. 그게 1912년 장충동2가의 실제 모습이었어.
이런 성씨 기반 토지 소유 구조는 문화재 발굴에서도 중요한 단서야. 같은 성씨가 여러 필지를 소유한 구역에서는 가옥군 유적, 담장, 배수로 같은 구조물이 묶음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 한 가문이 여러 필지에 걸쳐 집을 짓고 마당을 연결했을 가능성이 있거든. 그 흔적이 지금도 땅 아래에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을 수 있어.
그런데 김씨 26필지와 이씨 22필지 사이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숫자가 있어. 일본인 23필지. 거의 이씨와 맞먹는 규모야. 이 숫자, 다음 장에서 제대로 들여다볼게.
5
일본인 소유 23필지가 말해주는 식민지의 그림자
1912년 장충동2가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가 나왔어. 일본인 소유 토지 23필지.
장충동2가 토지 소유 구성 (1912년)
일본인 소유 23필지 (18.7%)조선인·기타 100필지 (81.3%)
전체 123필지 중 18.7%. 장충동3가의 41.9%, 저동1가의 53.3%보다는 낮아. 그런데 이 숫자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어. 장충동2가는 조선인 가문(김씨+이씨)이 48필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일본인이 23필지로 그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야. 이건 이미 조선인 주거 공간의 상당 부분이 일본인 자본에 잠식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야.
1912년은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던 시기야. 일본인 소유 토지는 단순한 개인 소유를 넘어서, 이후 관사, 시설, 군사적 용도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어. 실제로 장충동 일대는 일찍부터 일본인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아직도 일제식 건물 구조를 지닌 가옥들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어. 그 뿌리가 1912년 이 23필지에서 시작됐어.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일본인 소유 구역을 조사하면 어떤 게 나올까. 일본식 건축 기초, 벽돌, 배수 구조물이 먼저 나와. 그리고 그 아래에 조선 시대 유구가 겹쳐 있는 경우가 많아. 두 시대의 흔적이 한 트렌치 안에서 동시에 드러나는 그 장면, 발굴 기관에게는 역사책 한 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줘.
일본인 소유 토지 23필지의 위치가 어디였느냐에 따라 발굴 조사의 방향이 크게 달라져. 교통 요지에 있었다면 도로·배수 시설 유구, 주거 밀집 지역에 있었다면 일본식 가옥 기초, 장충단 인근이었다면 관련 시설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있어. 이 모든 가능성이 장충동2가 지표조사의 출발점이야.

6
지금 우리가 장충동2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
지금의 장충동2가를 한번 생각해봐. 서울신라호텔, 앰배서더 서울 풀만, 자유센터, 동국대학교, 장충체육관, 국립극장. 이 굵직굵직한 시설들이 모두 장충동2가 권역 안에 있어.
이 시설들이 들어서기 전, 이 땅에 123필지의 삶이 있었어. 그 삶의 흔적은 시설 공사 과정에서 어떻게 됐을까. 일부는 발굴됐을 거고, 일부는 그냥 사라졌을 거야. 그리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구역도 분명히 있어.
장충동 일대는 지금도 재개발, 리모델링, 도로 정비가 계속되는 공간이야. 계획이 나올 때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따라붙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그 출발점이 1912년 토지 기록이고, 이 기록을 제대로 읽는 기관이 문화재 발굴 기관이야.
재개발이나 리모델링 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제대로 하면 공사 중단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어. 1912년 토지 기록을 분석해서 발굴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미리 파악하면, 공사 지연 없이 조사와 공사를 병행할 수 있어. 장충동2가 같은 역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사전 조사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야.
7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시작되는 지점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과거를 읽는 작업이야. 1912년 장충동2가처럼 대지와 밭이 섞여 있던 지역은 유물 매장 가능성이 높아. 생활 유물, 주거지 흔적, 일제강점기 구조물이 동시에 나올 확률이 높거든. 그래서 발굴 기관들은 이런 지역을 '고위험 구간'으로 분류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 첫 번째가 지표조사. 땅을 파지 않고 표면 흔적, 지형 분석, 1912년 같은 역사 기록을 종합해서 발굴 가능성을 평가해. 이 단계에서 장충동2가 같은 곳은 항상 높은 우선순위를 받아. 두 번째가 표본조사(전체의 2% 이내). 세 번째가 시굴조사(10% 이내). 그리고 유구가 확인되면 정밀 발굴로 이어져.
사전 조사만 제대로 해도 공사 지연과 비용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장충동2가의 1912년 기록을 제대로 읽고 발굴 범위를 설정하면, 공사와 조사가 충돌하지 않고 병행될 수 있어. 이게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 기관이 존재하는 이유야.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가 알려주는 중요한 힌트
성공 사례 1 — 1910년대 토지대장 분석이 발굴 효율을 높이다
서울 도심 한 재개발 지역에서 1910년대 토지대장 분석을 바탕으로 발굴 범위를 조정한 사례가 있어. 토지 소유 구조와 지목 분석을 통해 유물 매장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미리 특정했고, 그 결과 예상보다 빠르게 조사와 공사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었어. 이 사례 이후 문화재 발굴 기관들은 토지 소유 구조 분석을 지표조사의 필수 단계로 활용하고 있어. 장충동2가 역시 이런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춘 곳이야.
성공 사례 2 — 장충동3가 인접 지역 발굴의 교훈
장충동3가 인근 지역에서 진행된 소규모 시굴조사에서 일제식 건물 기초 아래 조선 시대 주거 유구가 중첩 보존된 상태로 발견된 사례가 있어. 이 발굴에서 조선 후기 도기류 20여 점과 건물 기초석이 확인됐어. 장충동2가는 이 조사 지역과 인접해 있어서 동일한 지층 패턴을 가질 가능성이 높아. 특히 일본인 소유 23필지 구역은 이런 중첩 유구 가능성이 더 높아.
123필지의 땅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는 파봐야 알아. 하지만 1912년 기록이 이미 힌트를 주고 있어. 밭이 있던 자리, 김씨 가문의 집들이 모여 있던 구역, 일본인 소유지와 조선인 주거지가 맞닿았던 경계선. 이 세 곳이 발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포인트야.

9
도시 개발과 문화유산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
도시는 계속 변해. 그건 막을 수 없어. 장충동2가도 앞으로 더 변할 거야.
하지만 기록까지 사라질 필요는 없어. 1912년 123필지와 20,046㎡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 아래에 남아 있는 이야기야.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문화재 발굴이고, 그 이야기를 미리 읽는 일이 문화재 지표조사야.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개발을 막기 위한 절차가 아니야. 도시의 기억을 지키는 최소한의 약속이야. 그 약속을 지킬수록 서울은 더 깊어지고, 더 풍부해지고, 더 오래 기억될 거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사람들, 집, 밭, 그리고 시간. 그것들이 장충동2가 땅 아래에 겹겹이 쌓여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도시의 풍경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1912년 장충동2가의 이야기는 과거의 땅 이야기가 아니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기록이야. 그리고 그 기록을 읽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이 도시는 조금 더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게 될 거야.

123필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 땅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다.
김씨 26필지의 마당에서 뛰놀던 아이들, 밭 9필지에서 자라던 채소, 이씨 22필지의 담장 너머로 들려오던 이웃의 목소리. 그것들이 사라진 게 아니야.
호텔 지하에, 도로 아래에, 공원 흙 속에 아직 있어. 문화재 발굴은 그것들을 꺼내는 일이야.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먼저 읽는 일이야.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장충동을 걷게 된다면, 잠깐 발걸음을 멈춰줘. 그 아래에 분명 누군가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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