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장충동2가, 땅 위에 남은 시간의 흔적과 문화재 발굴 이야기
- 서울 HI
- 14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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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 장의 숫자가 도시의 기억이 되는 순간
1912년 장충동2가의 전체 면적과 토지 구조
집과 밭, 일상의 풍경이 남아 있던 공간
성씨로 본 토지 소유 구조, 누가 이 동네의 주인이었을까
일본인 소유 토지가 말해주는 식민지의 그림자
지금 우리가 장충동2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시작되는 지점
실제 발굴 성공 사례가 알려주는 중요한 힌트
도시 개발과 문화유산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
1912년 장충동2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지금의 서울을 만든 출발선이었다.
한 장의 숫자가 도시의 기억이 되는 순간
123필지, 20,046㎡.
이 숫자를 처음 보면 그냥 행정 기록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숫자 안에는 사람들이 살았고, 밭을 일궜고, 또 누군가는 이 땅을 차지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12년, 중구 장충동2가는 지금처럼 호텔과 도로, 공원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었다.
당시의 장충동2가는 삶의 냄새가 진하게 남아 있는 동네였다.

1912년 장충동2가의 전체 면적과 토지 구조
1912년 중구 장충동2가는 총 123필지, 20,046㎡ 규모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담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결코 작은 동네가 아니었다.
토지 구성만 봐도 이곳이 생활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체 필지 중 대부분이 사람이 살기 위한 땅이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구조는 이후 장충동 일대가 빠르게 도시화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집과 밭, 일상의 풍경이 남아 있던 공간
1912년 장충동2가에는 집이 있었던 대지가 114필지, 15,147㎡였다.
숫자로만 보면 딱딱하지만, 이건 곧 114개의 삶의 터전이 있었다는 뜻이다.
골목마다 기와집과 초가가 섞여 있었고,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은 일을 했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밭도 있었다.
9필지, 4,899㎡의 밭.
이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었다.
도심과 생활이 맞닿아 있던 경계 공간이었고, 자급자족의 흔적이었다.
지금 재개발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면 이런 생활 유적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성씨로 본 토지 소유 구조, 누가 이 동네의 주인이었을까
토지대장을 들여다보면 성씨 분포가 보인다.
1912년 장충동2가에서는 김씨가 26필지, 이씨가 22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특정 성씨가 집중적으로 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은, 이 동네에 오랜 시간 정착해 살아온 집단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런 성씨 기반의 토지 소유 구조는 발굴조사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같은 성씨가 여러 필지를 소유한 구역에서는 가옥군 유적, 담장, 배수로 같은 구조물이 묶음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토지 소유 기록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다.
일본인 소유 토지가 말해주는 식민지의 그림자
1912년 장충동2가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일본인 소유 토지가 23필지나 존재했다는 점이다.
전체 123필지 중 적지 않은 비율이다.
이 시기는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던 때다.
일본인 소유 토지는 단순한 개인 소유를 넘어, 이후 관사, 시설, 군사적 용도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 구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하면 일본식 건축 기초, 벽돌, 배수 구조물이 함께 나오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금 우리가 장충동2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
이제 질문이 생긴다.
왜 100년도 넘은 장충동2가 이야기를 지금 다시 해야 할까.
답은 분명하다.
지금의 장충동 일대는 개발과 보존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재개발, 리모델링, 도로 정비가 계획될 때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수로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바로 이런 1912년 토지 기록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시작되는 지점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과거를 읽는 작업이다.
1912년 장충동2가처럼 대지와 밭이 섞여 있던 지역은 유물 매장 가능성이 높다.
생활유물, 주거지 흔적, 일제강점기 구조물이 동시에 나올 확률이 크다.
그래서 발굴 기관들은 이런 지역을 ‘고위험 구간’으로 분류한다.
사전 조사만 제대로 해도 공사 지연과 비용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실제 발굴 성공 사례가 알려주는 중요한 힌트
서울 도심의 한 재개발 지역에서는, 1910년대 토지대장 분석을 바탕으로 발굴 범위를 조정한 사례가 있다.
그 결과, 예상보다 빠르게 조사와 공사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었다.
이 사례 이후 문화재 발굴 기관들은 토지 소유 구조와 지목 분석을 더욱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다.
장충동2가 역시 이런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도시 개발과 문화유산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
도시는 계속 변한다.
하지만 기록까지 사라질 필요는 없다.
1912년 장충동2가의 123필지와 20,046㎡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 아래에 남아 있는 이야기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개발을 막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도시의 기억을 지키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장충동2가의 길을 걷게 된다면 한번쯤 땅을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사람들, 집, 밭, 그리고 시간이 그 아래에 겹겹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 이야기는 과거의 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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