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입정동, 땅이 들려준 비밀… 사라진 골목과 성씨들의 이야기

목차

1. 마음을 붙잡는 한 문장, 입정동을 다시 보게 된 순간

2. 1912년 입정동의 전체 윤곽 – 274필지의 작은 도시

3. 누가 이 골목을 지배했나 – 김씨·이씨·박씨·최씨 성씨 지도

4. 일본인과 중국인의 토지 소유, 식민지의 그림자가 번지던 시기

5. 오늘의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 조사로 다시 읽는 입정동

6. 성공 사례처럼 남은 골목의 기억과 우리가 해야 할 일

7. 마무리 – 오래된 땅이 결국 사람에게 알려준 따뜻한 메시지

────────────────────────

이 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울 한복판을 걸어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어떤 골목은 지나칠 때마다 묘하게 마음이 붙잡힐까.

왜 오래된 동네 이름 하나가 사람을 멈춰 세울까.

입정동을 처음 자료로 접했을 때가 딱 그런 순간이었다.

1912년이라는 시간, 그때 입정동에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밟았던 대지의 온도까지 상상되면서 갑자기 시간의 층위가 한 겹 더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땅이 오랫동안 삼켜온 기억을 발굴 현장에서 ‘토층’처럼 하나씩 드러내는 것처럼.

그 시작은 아주 작은 숫자였다.

274필지, 30,578㎡.

숫자만 보면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작은 공간 안에 그 시대의 숨결, 갈등, 변화, 그리고 누군가의 희망까지 응축돼 있었다.

놀랍게도 1912년 당시 입정동의 토지는 전부 대지, 다시 말해 모든 필지가 ‘사람이 머물며 살아가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사라진 집들, 변형된 길, 개발로 자취를 감춘 마당들….

그 모든 것이 그해 토지대장 한 페이지 속에서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입정동의 가장 흥미롭던 장면은 성씨별 토지 분布였다.

도시 한가운데 어떤 성씨가 얼마나 뿌리 내렸는지 보면 그 마을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 자료 속에서 가장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름은 김씨 46필지였다.

바로 뒤이어 이씨 36필지, 그리고 박씨 23필지, 최씨 16필지가 이 작은 입정동을 구성하는 주요 축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도 특정 골목들에 같은 성씨의 문패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듯, 당시 입정동도 가족 네트워크 기반의 거주 문화가 강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집터가 여러 세대에 걸쳐 유지된 흔적을 발견할 때 느껴지는 그 묘한 연속성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입정동의 1912년은 단순한 주민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이 시기, 일본인 소유 필지가 34필지나 존재했다는 사실은 도시의 공기를 바꿨다.

일제강점기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던 그 무렵, 토지조사사업과 맞물린 일본인의 도시 침투는 결국 서울의 골목 구조와 토지 소유 체계까지 흔들어 놓았다.

입정동은 그 변화가 가장 빠르게 확장된 지역 중 하나였고, 일본인의 소유 필지는 ‘권력이 형태를 바꾸어 땅에 기록된 흔적’처럼 보였다.

중국인 소유 토지도 2필지 존재해 당시 경성의 다문화적 흐름을 미세하게 보여준다.

청계천 인근 중국 상인들의 활동, 동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교역의 확대는 결국 입정동의 토지 흐름에도 작게나마 영향을 준 셈이다.

이제 시선을 오늘로 가져와 보자.

문화재 발굴조사나 지표조사를 하다 보면 이런 역사적 토지 기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결정적 단서가 된다.

누가 어디를 소유했는지, 어느 시점에 구조가 바뀌었는지, 그 지점에서 어떤 건축 흔적이 나오는지까지 연결되기 때문이다.

입정동이 개발되기 전 이 자료를 검토했다면, 도시의 ‘지층’을 파고 들어가는 발굴조사 계획도 훨씬 정교해졌을 것이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런 토지 기록은 지하의 정보와 땅 위의 역사를 잇는 스토리텔링의 핵심 실마리다.

재미있게도 최근 서울 도심 개발 사업 중 한 곳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토지대장 분석을 먼저 진행하고, 그 위에 발굴조사를 더해 1920년대 생활 흔적을 복원해낸 프로젝트였는데, 결과적으로 시민 전시 프로그램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과거 입정동 분석도 단순한 ‘옛 동네 공부’가 아니라 현재 도시 문화재 행정의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입정동 이야기의 마지막은 결국 사람으로 귀결된다.

이 작은 동네를 채웠던 성씨들, 일본인 필지의 그림자, 중국인의 존재, 274필지의 집들이 쌓아 올린 일상의 결.

시간은 흘렀고, 집들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덮고 다시 지어진 건물들 아래에는 여전히 1912년의 입정동이 잠들어 있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발굴을 하면 땅은 반드시 증거를 들려준다.

누가 이 골목을 걸었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어떤 상처가 지나갔는지.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조용히 말해주고 싶다.

도시는 절대 혼자 자라지 않는다고.

우리가 무심히 걷는 길들은 누군가의 삶 위에 덧칠된 또 다른 삶이고, 1912년의 입정동은 지금도 누군가의 발걸음 아래 아주 작은 떨림으로 남아 있다고.

이 작은 동네의 역사를 들여다본 오늘이, 당신에게도 어느 골목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