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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을지로7가의 땅을 펼쳐보니: 잊힌 도심의 얼굴과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어낸 진짜 이야기

목차

1. 사라진 을지로7가의 얼굴을 다시 불러낸 순간

2. 대지 13,583㎡가 말해주는 도심의 삶

3. 잡종지 50,691㎡, 거대한 빈터가 숨기고 있던 비밀

4. 밭 12,162㎡, 도심 속 농경지가 존재했다는 사실

5. 김·이·박씨가 지켜낸 토지와 사람들의 흔적

6. 일본인 16필지 소유가 드러내는 일제강점기 초입의 구조

7. 지금 우리가 지표조사를 통해 읽어내야 하는 이유



1장 사라진 을지로7가의 얼굴을 다시 불러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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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을지로7가의 기록을 펼쳐보는 순간,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잠겨 있던 서랍을 열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걸어 다니는 거리 아래에 이렇게 다른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이, 예상보다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다. 도심 한복판에서 120여 년 전의 숨결을 느낀다는 건 묘하게 사람을 흔들어놓는다. 한때는 시장과 공장, 사람들의 삶이 겹겹이 쌓여 있던 공간이었고, 지금은 빌딩과 간판으로 가득 찬 골목이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걸 찾아내는 게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고, 발굴이 가진 힘이다.

그래서 오늘은 1912년 중구 을지로7가의 토지대장을 바탕으로, 그 시절 사람들은 어떤 땅 위에서 살았는지, 누가 이곳을 지켜왔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역사가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2장 대지 13,583㎡가 말해주는 도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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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7가에는 120필지, 총 13,583㎡의 대지가 있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한눈에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대를 상상해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좁은 필지 위에 빽빽하게 지어진 작은 한옥들, 서로의 지붕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삶의 거리. 방 한 칸, 마루 몇 칸의 공간에서 가족들이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대지는 곧 일상의 무대였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빨래가 나부끼고 장사 준비하는 손길들이 움직이던 곳. 현재의 을지로가 공업과 상업의 도시라면, 1912년의 을지로는 그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냄새가 진하게 묻어 있던 생활 중심지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대지 영역은 매우 중요한 단서다. 생활유구, 주거유적, 작은 폐기물층까지 모두 당시의 삶을 증명하는 흔적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땅은 사람을 기억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3장 잡종지 50,691㎡, 거대한 빈터가 숨기고 있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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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7가의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바로 1필지 50,691㎡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의 잡종지였다. 잡종지라고 하면 그냥 ‘애매한 땅인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912년 기준으로 이 정도 규모라면 말 그대로 도심 개발의 핵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도 부지, 도로 예정지, 군사용 빈터, 창고부지 등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땅이었고, 실제로 당시 기록을 보면 이 지역은 도심 재편의 중심축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표본조사나 시굴조사에서 이런 잡종지는 의외의 유물이 쏟아지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곳’이 오히려 과거의 흔적을 통째로 품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굴조사기관에서도 가장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지점이 바로 이런 대규모 잡종지다.



4장 밭 12,162㎡, 도심 속 농경지가 존재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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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를 생각하면 절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밭이다. 1912년 토지대장에는 21필지, 12,162㎡의 밭이 을지로7가에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밭이 있었다는 건, 당시 도시 경계가 지금만큼 확고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동네 가까운 공간에서 직접 먹거리를 길러냈고, 계절마다 서로 수확을 나누며 살아갔다.

이런 농경 유적의 존재는 지표조사 보고서에서도 굉장히 가치 있게 다뤄진다. 농기구 조각이나 탄화미 등 농업 흔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은 밭들은 도심이 성장하기 전, 이 땅이 가진 ‘원래의 숨결’을 보여주는 창문 같은 존재다.



5장 김·이·박씨가 지켜낸 토지와 사람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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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을지로7가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성씨는 김씨(27필지), 그 뒤를 이씨(17필지), 박씨(10필지)가 이었다. 이 세 성씨만 합쳐도 상당한 양의 땅이 이 지역에 귀속되어 있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단순히 ‘누가 땅을 많이 가졌는가’를 넘어서, 당시 을지로7가가 어떤 공동체 구조를 갖고 있었는지가 보인다. 특정 성씨가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 지역에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린 집안이 존재했다는 의미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는 이런 성씨별 토지 구조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동일 성씨의 가족묘지, 공공 시설, 마을 공동체 흔적 등이 함께 나타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이름은 땅 위에, 그리고 땅 아래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6장 일본인 16필지 소유가 드러내는 일제강점기 초입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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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에 띄는 기록은 일본인의 토지 소유였다. 일본인은 1912년 기준 16필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는 곧 일제강점기 초기 도시 지배 구조가 이미 을지로7가에 스며들고 있었다는 증거다.

일본인 소유지는 대부분 상업적 목적이나 군사·행정 필요로 확보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토지 위치를 추적하면 당시 도시 정책의 흐름까지 읽어낼 수 있다.

지금도 발굴조사기관에서는 이런 일본인 소유 토지를 중심으로 건물 잔해, 생활유구, 상점 유적 등 다양한 흔적을 확인하고 있다. 을지로7가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7장 지금 우리가 지표조사를 통해 읽어내야 하는 이유

을지로7가의 1912년 토지대장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이곳이 단순한 도심 상권이 아니라 수백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단순한 절차가 아니다.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듣는 과정이다. 한 시대의 흔적을 잡아내고, 우리가 잃어버릴 뻔한 기억을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지금 이 거리 위를 걷는 우리는 모르지만, 땅은 알고 있다. 누가 살았고,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이 사라져갔는지를. 그래서 지금도 발굴조사기관의 조사원들은 이 같은 토지 기록을 기반으로 현장을 찾아가고, 그 흔적을 다시 세상 위로 올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얻는 건 단순한 유물 몇 점이 아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떤 도시를 살아가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은 너에게 꼭 말하고 싶다.

우리가 걷는 길 위에는 늘 오래된 시간이 따라온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사라진 건 하나도 없다. 단지 우리가 다시 꺼내 읽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걸 발견하려는 마음 하나가, 도시 전체를 다르게 바라보게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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