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을지로1가, 시간의 층위를 걷다 – 서울 도심 속 숨은 문화재 발굴 이야기
- 서울 HI
- 11월 6일
- 3분 분량
목차
서두 – “시간이 멈춘 거리, 을지로1가에서 다시 깨어나다”
1912년 을지로1가의 기록 – 219필지의 이야기
조선의 이름, 일본의 그림자, 그리고 중국 상인의 흔적
문화재 발굴이 시작되는 순간 –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과정
서울 도심 속 문화재발굴, 성공사례로 배우다
문화재발굴단의 하루 – 발굴조사원들이 지켜낸 시간의 조각들
을지로의 내일을 위한 발굴,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이유
해시태그 & 출처
1. 서두 – “시간이 멈춘 거리, 을지로1가에서 다시 깨어나다”
서울 한복판, 번쩍이는 네온사인 아래에서 누군가 삽을 들고 흙을 살짝 걷어낸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건 돌멩이가 아니다. 그건 시간의 파편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콘크리트 아래 잠들어 있던 을지로1가의 땅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우리가 매일 오가는 골목들, 카페와 인쇄소, 조명 가게가 빼곡한 그 거리는 사실 1912년의 기록을 품고 있다. 그때의 을지로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지만, 그 속엔 수많은 이야기들이 얽혀 있었다.
서울의 문화유산 발굴조사는 단순히 옛 돌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의 언어를 다시 해독하는 일이다.

2. 1912년 을지로1가의 기록 – 219필지의 이야기
1912년의 을지로1가는 지금보다 훨씬 소박했다.
총 219필지, 면적 46,877㎡, 지금의 도심 중심부라기보다 사람 냄새와 흙냄새가 가득한 생활의 골목이었다.
그곳엔 대지가 219필지 모두를 차지했고, 논밭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서울이 산업의 도시로 변해가던 첫 시점, 바로 그 전환의 한가운데가 을지로였다.
국유지 3필지, 나머지는 개인의 손에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씨가 40필지, 김씨가 39필지, 박씨가 14필지를 소유했다는 사실이다.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이 세 성씨는, 지금까지도 서울의 오래된 집성촌과 연관이 깊다.

3. 조선의 이름, 일본의 그림자, 그리고 중국 상인의 흔적
그러나 그 땅의 주인은 모두 한국인이 아니었다.
1912년 을지로1가에는 일본인 소유지가 51필지, 중국인 소유지가 8필지 있었다.
이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1910년대는 식민지 조선의 첫 시기였다. 일본 상인들과 거류민단이 중심가에 진출하며 서울 도심의 토지를 점유하기 시작했다.
을지로1가의 토지는 경제력과 권력의 상징이었고, 이 땅을 통해 도시의 주도권이 바뀌어 갔다.
이와 동시에, 중국 상인들도 이 거리에 발을 들였다. 청상(淸商)이라 불리던 그들은 주로 약재상과 무역상으로 활동하며 조선과 중국의 경제 교류를 이어갔다.
을지로1가의 8필지 중국인 토지는, 단순한 거래 이상의 문화적 연결고리였다.

4. 문화재 발굴이 시작되는 순간 –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과정
오늘날 우리가 이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건 문화재발굴과정 덕분이다.
서울의 문화재는 대부분 도심 속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다.
건물을 짓기 전에, 땅을 파기 전 반드시 거치는 단계가 있다. 바로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다.
지표조사는 말 그대로 땅의 겉을 살피는 일이다.
지도와 문헌을 통해 과거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실제로 현장을 조사해 그 가능성을 판단한다.
시굴조사는 작은 구덩이를 파서 유물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곳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이때 발굴조사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흙 한 줌에도 시간을 읽고, 조각 하나에도 이야기를 찾는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는 생각보다 첨단이다.
GPS 측량기, 드론, 정밀 레이저 스캐너, 수중 금속탐지기까지.
이 모든 도구가 묻혀 있던 역사를 다시 빛으로 꺼내는 열쇠가 된다.

5. 서울 도심 속 문화재발굴, 성공사례로 배우다
서울은 세계적으로 드문 ‘역사 위의 도시’다.
지하를 파면 조선시대 유구가, 그 아래로는 고려와 백제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 사례로, 을지로 인근의 공사현장에서 조선 후기 상인 주거지와 백자 조각, 금속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다.
그 발굴로 인해 공사 일정이 잠시 지연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현장은 도심형 역사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개발과 보존이 충분히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문화재발굴은 결국 도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사라진 이야기를 복원하고, 그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입히는 일.
을지로의 발굴조사는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6. 문화재발굴단의 하루 – 발굴조사원들이 지켜낸 시간의 조각들
문화재발굴단은 아침 일찍 현장에 모인다.
그들의 하루는 한 삽으로 시작해, 한 줄 기록으로 끝난다.
햇빛과 먼지 속에서도 그들의 눈은 섬세하다.
흙의 색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지점을 찾아내고, 조심스럽게 붓으로 유물을 털어낸다.
한 발굴조사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찾는 건 유물이 아니라, 사람의 흔적이에요.”
그 말처럼 발굴 현장은 인간의 역사와 감정이 뒤섞인 공간이다.
그 속엔 웃음도, 슬픔도, 수백 년의 기다림도 함께 묻혀 있다.
그들은 유적발굴의 최전선에서, 서울의 시간을 되살리고 있다.
그들의 손끝에서 다시 깨어난 조각들은, 우리의 문화가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가졌는지를 증명한다.

7. 을지로의 내일을 위한 발굴,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이유
을지로1가의 발굴조사는 단지 과거를 되찾는 일이 아니다.
그건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서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빌딩이 세워지고, 오래된 건물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 땅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를 잊기 쉽다.
그러나 문화재발굴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딛고 있는 이 땅, 그 아래의 이야기를 알고 있나요?”
을지로1가의 땅 아래엔 219개의 서사가 있고, 그 안엔 수많은 이름이 살아 있다.
그 이름들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서울을 사랑하는 가장 깊은 방식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는 오늘도 그 사명을 이어간다.
그리고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미 그 여정의 일부가 된 것이다.
8. 해시태그 & 출처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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