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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예관동, 땅 아래에 숨겨진 시간의 기록 – 서울 문화재발굴로 되살아난 도시의 기억”

목차


  1. 서문: 그날의 서울, 지금은 사라진 예관동의 풍경

  2. 예관동의 땅이 말하다 – 133필지 대지의 이야기

  3. 조용한 성역, 사사지 한 필지의 의미

  4. 밭 세 필지에서 피어난 삶의 흔적

  5. 일본인 소유 74필지, 식민지의 그림자가 드리우다

  6. 문화재발굴, 유물발굴작업으로 되살린 잃어버린 기록

  7. 서울 유적발굴단의 현장 – 지표조사에서 발굴조사로

  8. 발굴조사원들의 하루 – 땅속에서 역사와 대화하다

  9. 성공사례로 본 서울 문화재발굴과정의 의미

  10.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 장비보다 뜨거운 마음

  11. 마무리: 과거를 품은 도시, 미래를 향한 발굴

  12. 이미지 구성 안내





본문


“그날의 서울, 땅은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서울의 길 위엔, 아무 표식도 없는 돌 하나, 흙 한 줌에도 역사가 잠들어 있다.

100년 전, 1912년의 예관동(禮官洞). 지금의 중구 한복판, 고층 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선 이곳은 한때 사람들의 삶과 믿음, 그리고 식민의 그림자가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이 작은 동네의 기록 속에는 단 137필지, 31,696㎡의 면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한 도시의 변천사가 농축되어 있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이 이 지역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땅은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이다.




1. 예관동의 땅이 말하다 – 133필지 대지의 이야기


1912년, 예관동에는 133필지 28,105㎡의 대지가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지금의 충무로 일대에 해당하며,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상업과 주거가 혼재한 지역이었다.


서울문화재발굴조사 현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단순한 건축 잔해가 아니라 그 아래 층층이 쌓인 유물발굴의 흔적이다.

기와 조각, 토기편, 옹기 파편, 목탄층, 심지어 당시 일본식 가옥의 기단석까지.

유적발굴단은 땅속의 단면을 통해 ‘도시의 성장 과정’을 복원해낸다.


그 과정은 결코 단순한 ‘공사 전 조사’가 아니다.

이는 ‘도시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가장 과학적이고 감성적인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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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용한 성역, 사사지 한 필지의 의미


예관동에는 단 하나의 사사지(寺社地)가 있었다.

면적은 393㎡, 지금으로 따지면 소규모 사당이나 제단이 있었던 자리다.

이 작은 공간은 당시 서울의 종교적 풍경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문화재발굴과정에서 종종 발견되는 사사지는 단순히 ‘종교 시설 부지’가 아니다.

삶과 죽음, 믿음과 공동체를 잇는 공간이었다.

발굴조사원들은 이 땅을 조사하며 작은 석불의 머리 조각이나 제기(祭器)로 추정되는 청동편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 순간, 백 년의 시간이 무너지고 한 시대의 기도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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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밭 세 필지에서 피어난 삶의 흔적


예관동에는 밭 3필지, 총 3,196㎡가 있었다.

도심 속 밭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당시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서도 보리, 조, 채소를 길렀고, 유물발굴작업 중에는 농기구 손잡이, 탄화된 곡물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서울도 농업의 기억을 품은 도시’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가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잊었던 일상의 풍경을 다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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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인 소유 74필지, 식민의 그림자가 드리우다


가장 충격적인 기록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예관동의 137필지 중 74필지가 일본인 소유였다.

1912년은 한일병합 직후, 식민 행정이 뿌리를 내리던 시기였다.

토지는 권력의 상징이었고, 예관동의 땅은 일본 자본의 첫 투자처 중 하나였다.


서울 유적발굴단은 이 지역 발굴에서 일본식 주택의 기단과 벽돌구조, 수입 타일 파편을 발견했다.

당시 건축 자재의 출처를 통해 일본 상인의 주거지였음을 확인했다.

이는 유적발굴조사가 단순한 발굴을 넘어 ‘도시 식민사 복원’의 근거가 된 대표적인 사례다.




5. 문화재발굴, 유물발굴작업으로 되살린 잃어버린 기록


서울의 도심 발굴조사 현장은 매일같이 ‘발견’의 연속이다.

발굴조사원들은 철근이 얽힌 공사 현장 옆에서 수백 년 된 도자기 조각 하나에 숨을 멈춘다.

문화재발굴은 단순히 과거를 파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흔적을 존중하는 일이다.


유물발굴작업 중에는 작은 돌 하나에도 이름을 붙인다.

기록, 분석, 보존, 복원 – 이 네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역사는 오늘로 돌아온다.




6. 서울 유적발굴단의 현장 – 지표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예관동 발굴은 지표조사에서 시작됐다.

지표조사는 발굴 전 단계로,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와 유물 분포를 파악하는 과정이다.

지표조사를 통해 문화재 가능성이 확인되면, 이후 시굴조사와 본격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서울문화유산 조사기관들은 최첨단 문화재발굴조사장비를 사용해 미세한 흙 입자, 자갈층, 탄화물의 변화를 감지한다.

이 데이터는 GIS(지리정보시스템)와 연동돼, 과거의 땅 위에 정확한 시공간적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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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발굴조사원들의 하루 – 땅속에서 역사와 대화하다


현장의 주인공은 언제나 ‘사람’이다.

발굴조사원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비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흙을 쓴다.

그들의 손끝에서 유적은 다시 살아난다.


한 조사원은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과거와의 대화예요.

백 년 전 누군가의 손길을 느낄 때, 그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기억의 공간’이 됩니다.”



8. 성공사례로 본 서울 문화재발굴과정의 의미


예관동뿐 아니라 인근 을지로, 충무로, 저동 일대에서도 문화재발굴이 이어졌다.

특히 서울지하철 공사 중 발견된 조선 후기 주거지 유적, 일제강점기 공공건물 터의 발굴은 도시 역사의 재조명을 이끌었다.

서울문화유산 연구기관들은 이를 바탕으로 지역 맞춤형 ‘역사해설 탐방로’를 조성하며, 시민 참여형 발굴문화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9.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 장비보다 뜨거운 마음


문화재발굴조사장비가 정밀해질수록, 사람의 마음도 더 섬세해진다.

기계는 기록을 남기지만, 마음은 이야기를 남긴다.

발굴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그 속에는 ‘서울의 기억’을 지키려는 모든 이들의 열정이 깃들어 있다.



10. 마무리: 과거를 품은 도시, 미래를 향한 발굴


예관동의 땅은 말없이 백 년을 견뎠다.

그 흙 아래엔 사람의 손길, 땀, 꿈, 그리고 역사가 있었다.

오늘 우리가 그 땅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단순히 ‘발굴’이 아니라 ‘회복’이다.

서울의 문화재발굴은 결국 사람의 역사, 도시의 기억,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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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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