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북창동에서 펼쳐진 사람과 땅의 서사시
- 서울 HI
- 9월 18일
- 4분 분량
목차
서울 한복판, 북창동이라는 이름의 무게
159필지, 44,357㎡로 본 도시 공간의 풍경
단 하나의 국유지, 그리고 그 의미
성씨별 땅 소유 현황 – 김씨와 이씨, 권력의 흔적
외국인의 발자취 –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 프랑스인의 땅 이야기
일본인 47필지 소유가 남긴 역사적 상흔
중국인 18필지와 북창동 상권의 형성
프랑스인과 미국인의 땅 – 작은 흔적, 큰 상징성
당시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생활상 상상하기
북창동을 통해 본 근대 서울의 국제성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현재적 의미
성공 사례 – 문화재 조사로 밝혀진 또 다른 서울 이야기
북창동이 던지는 질문 –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과거에서 미래로, 문화유산 보존의 길

서울의 심장부, 북창동. 지금은 빌딩과 상권으로 가득한 번화가지만, 1912년 그곳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1. 서울 한복판, 북창동이라는 이름의 무게
북창동은 단순히 지리적 명칭이 아닙니다. 남대문 인근, 경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행정, 경제, 문화적 중심지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지금의 서울 중구는 금융, 상업, 행정기관이 모여 있는 핵심 공간인데,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북창동의 토지 기록이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1912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며 토지 소유권을 새롭게 규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북창동의 모습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당시 서울 사람들의 삶과 외국인의 진출, 권력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었습니다.
2. 159필지, 44,357㎡로 본 도시 공간의 풍경
당시 북창동은 159필지, 총 44,357㎡의 면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형 쇼핑몰과 오피스 빌딩 여러 개가 들어설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이 땅 위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을까요? 당시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보면, 작은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일부는 상점이나 창고로 활용되었습니다. 한 필지는 가족 단위의 삶을 품고 있었고, 또 다른 필지는 장사꾼들의 손때가 묻어 있었으며, 일부는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 국제적인 교류의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3. 단 하나의 국유지, 그리고 그 의미
159필지 중 단 1필지가 국유지였습니다. 얼핏 보면 작아 보이지만, 국유지가 있다는 것은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했던 특별한 용도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관청이나 군사적 목적의 건물이었을 수도 있고, 세금과 관리 체계의 중심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이런 국유지 기록을 단서로 삼아 발굴을 진행합니다. 실제로 서울 곳곳에서 과거 관청 터나 군영이 발굴되면서 그 흔적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4. 성씨별 땅 소유 현황 – 김씨와 이씨, 권력의 흔적
당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한국인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씨 가문은 무려 22필지를 소유하며 북창동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이씨 가문이 11필지를 소유했습니다. 이 두 성씨는 단순한 거주민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특정 성씨의 집중적 토지 소유는 곧 재산권, 사회적 지위, 정치적 영향력을 의미했습니다. 북창동은 단순한 동네가 아니라, 권력과 재산이 교차하는 무대였던 셈입니다.
5. 외국인의 발자취 –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 프랑스인의 땅 이야기
북창동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땅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인: 4필지를 소유하며 북창동에 자리했습니다. 주로 선교사나 외교관, 혹은 무역업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작은 숫자지만, 미국의 문화적·종교적 영향력이 이미 서울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인: 47필지를 소유했습니다. 이는 전체의 약 30%에 달하는 규모로, 일제강점기의 그림자를 생생히 보여 줍니다. 단순한 거주 목적이 아니라, 경제적 지배와 상업적 진출을 위한 전략적 소유였습니다.
중국인: 18필지를 소유했습니다.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중국 상인들의 흔적이 북창동까지 이어진 셈입니다. 교역과 상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스인: 단 1필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흔적이 상징하는 바는 큽니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남대문 일대에 거주하며 학교와 병원을 세우던 움직임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6. 일본인 47필지 소유가 남긴 역사적 상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일본인의 47필지 소유입니다. 이는 단순히 ‘많이 가졌다’는 의미를 넘어, 북창동이 식민지 도시 구조의 일부로 변모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인의 땅을 헐값에 수탈하거나, 법적 장치를 통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북창동 역시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일본 상인과 기업가, 행정 관리들이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7. 중국인 18필지와 북창동 상권의 형성
중국인의 땅 소유도 주목할 만합니다. 당시 명동, 남대문 일대에는 중국 상권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북창동의 18필지는 그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상업 활동을 하며 한국인 상인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했습니다. 오늘날 명동의 중국 음식점 거리나 차이나타운 흔적은 바로 이런 역사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8. 프랑스인과 미국인의 땅 – 작은 흔적, 큰 상징성
프랑스인의 1필지, 미국인의 4필지는 숫자로는 작지만, 상징성은 매우 큽니다. 이는 북창동이 이미 국제적 교류의 공간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선교사, 외교관, 상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며 서울의 근대화를 촉진했습니다.
9. 당시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생활상 상상하기
북창동의 집들은 대부분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인 형태였습니다. 좁은 골목길에는 장사꾼들이 북적였고, 일본인 상점과 중국인 음식점, 한국인의 한약방이 서로 경쟁했습니다.
밤이 되면 등잔불이 거리를 비췄고, 외국인의 언어가 섞여 들려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한 글로벌 도시 서울의 초석이 이미 그곳에서 다져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10. 북창동을 통해 본 근대 서울의 국제성
북창동은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이 한데 섞여 살던 공간이었습니다. 이 풍경은 서울이 단순히 조선의 수도가 아니라, 이미 국제적 도시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11.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현재적 의미
이 기록들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닙니다. 오늘날 건축 공사나 도시 개발 과정에서 반드시 참고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과거 토지 소유와 건물 위치를 확인하고, 필요할 경우 발굴조사를 진행해 유적을 보존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 광화문 일대 개발 과정에서 옛 한양도성 유구가 발굴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성공 사례는 북창동 같은 지역의 조사 필요성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12. 성공 사례 – 문화재 조사로 밝혀진 또 다른 서울 이야기
서울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도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조선시대 상가터와 다리 흔적들이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개발이 과거의 역사를 되살려 주는 순간은 많습니다. 북창동 역시 조사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지금껏 잊혀졌던 근대 서울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 북창동이 던지는 질문 –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1912년의 북창동은 단순한 땅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이 땅을 가졌는가? 왜 일본인이 그렇게 많은 땅을 차지했는가? 중국인과 서양인의 발자취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기억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가?
14. 과거에서 미래로, 문화유산 보존의 길
북창동의 기록은 서울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제 우리의 몫은 그 기억을 지켜내는 일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지표조사, 시굴조사 같은 절차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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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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