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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봉래동4가의 땅과 사람들, 그리고 서울의 100년 이야기

목차

1. 봉래동4, 서울 도심의 작은 역사 지도

2. 1912 봉래동4가의 집과 대지, 삶의 무대

3. 밭과 , 토지 이용의 모습

4. 땅을 가진 성씨들의 분포와 속의 권력

5. 국유지와 법인 소유지, 시대의 구조

6. 일본인과 프랑스인의 소유, 식민과 교류의 흔적

7. 봉래동4가에서 읽는 서울의 변천사

8. 오늘날 문화재 발굴·지표조사가 중요한 이유

9. 봉래동4가가 던지는 메시지와 우리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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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래동4, 서울 도심의 작은 역사 지도


1912년의 봉래동4가는 단순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행정 구획으로 기록된 이곳은 300필지, 193,858㎡라는 구체적인 수치로 남아 있는데, 이는 서울 도심의 축소판이라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서울역, 남대문시장과 가까운 지역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하나, , 한두 마지기가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시대 권력과 경제 구조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거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봉래동4가를 지날 그냥 빌딩과 도로를 보지만, 불과 100 이곳은 논밭과 , 그리고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가 뒤섞인 복잡한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기록을 다시 꺼내어 읽는다는 것은, 서울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속에 숨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과 같습니다.



2. 1912 봉래동4가의 집과 대지, 삶의 무대


봉래동4가의 대지는 247필지, 83,451㎡였습니다.

이는 당시 전체 면적의 40% 차지할 만큼 비중이었으며, 이곳이 주거지로 이미 확고히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집들은 오늘날 아파트처럼 높게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한옥 혹은 작은 기와집 형태가 많았습니다. 골목마다 줄지어 집들은 이웃과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었고, 집과 사이의 담벼락 너머로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을 것입니다.


서울이 근대 도시로 변모하던 시기, 봉래동4가는 전통적 마을 구조와 근대 도시 공간이 교차하는 독특한 지점이었습니다. 집은 단순히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시대 사람들의 꿈과 생존을지탱하는 기반이었고, 서울 생활사 현장이었습니다.



3. 밭과 , 토지 이용의 모습


대지보다 넓었던 땅은 밭이었습니다. 무려 52필지, 110,136㎡에 달했는데 이는 봉래동4가가 단순한 주거지만은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밭은 주민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었고, 일부는 시장에 내다 팔리며 생계 수단이 되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흙을 일구며 농사에 의존했고, 이는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던 당시 서울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 산은 1필지, 271㎡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지역이 본래 산지보다는 평지였음을 보여주고, 농사와 거주에 적합한 땅이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 봉래동4가는농업 기반을 유지하면서도 도시화로 이동하는 과도기적 마을이었습니다. 밭과 집이 함께 존재하는 풍경은, 오늘날 고층 빌딩이 들어선 자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4. 땅을 가진 성씨들의 분포와 속의 권력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봉래동4가가 누구의 마을이었는지 짐작할 있습니다.

김씨가 67필지, 이씨가 38필지, 박씨가 20필지, 최씨가 19필지, 정씨가 17필지, 주씨가 12필지, 신씨가 11필지 다양한 성씨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았습니다.


특히 김씨와 이씨는 압도적인 소유 비중을 보였는데, 이는 단순히 땅만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까지 함께 차지했음을 의미합니다. 토지 소유는 경제적 권력, 나아가 사회적 지위를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포는 봉래동4가가 토박이들의 전통적 마을이었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서로 다른성씨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공동체적 유대와 경쟁이 얽혀 있던 삶의 현장을 상상하게합니다.



5. 국유지와 법인 소유지, 시대의 구조


봉래동4가에는 국유지 5필지와 법인 소유지 2필지가 있었습니다.

국유지는 도로, 관공서, 혹은 공공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국가가 이미이 지역을 도시 관리의 영역으로 삼았음을 보여줍니다.


법인 소유지는 당시 학교, 종교단체, 혹은 기업이 차지했을 있습니다. 이는 봉래동4가가단순한 주거·농업 공간을 넘어 교육과 종교, 산업적 기반이 들어선 곳이었음을 의미합니다.



6. 일본인과 프랑스인의 소유, 식민과 교류의 흔적


1912년의 봉래동4가에서 일본인은 24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 거주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 과정 속에서 토지 장악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으로 해석할 있습니다.


프랑스인의 경우 3필지를 소유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이는 서양인이 이미 서울 도심속에서 활동하며 거주하거나 사업 기반을 마련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프랑스인은 주로 선교사나 외교관, 혹은 교역 활동을 통해 서울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흔적이 봉래동4가에도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본과 프랑스인의 토지 소유는 봉래동4가가 국제적 흐름과도 연결된 공간이었음을알려줍니다.



7. 봉래동4가에서 읽는 서울의 변천사


봉래동4가의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당시 서울의 사회 구조가 보입니다.

대지와 ,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가 함께 얽혀 있는 작은 지역은 서울의縮圖이자, 근대서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농업과 도시 생활이 공존하고, 토박이 성씨들과 외국인의 땅이 나란히 존재하며, 국유지와 법인 소유지가 더해져 있던 모습은 오늘날 도시 개발 속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서울의 원형 드러냅니다.



8. 오늘날 문화재 발굴·지표조사가 중요한 이유


봉래동4가의 기록은 단순히 문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 지표조사, 표본조사 등을 통해 실제 속에서 확인될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서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입니다. 개발과 재건축 과정에서 수많은 땅이 파헤쳐지고, 그속에서 우리는 선조들의 흔적을 만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돌이나 기와 조각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삶을 증언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자미래를 위한 기록입니다.

서울 도심의 발굴 사례들은 우리에게 매번 새로운 통찰을 주며, 도시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역사적 층위 위에 세워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9. 봉래동4가가 던지는 메시지와 우리의 역할


봉래동4가의 이야기는 단순히 1912년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서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시의 정체성과 뿌리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걷는 거리와 건물은 사실 수많은 시간의 켜가 쌓여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봉래동4가의 땅을 누가 소유했는지, 어떤 밭이 있었는지, 어떤 외국인이 살았는지를 살펴보는일은 우리의 도시가 어디서 왔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문화재 발굴과 조사는 단순히 전문가들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서울의 미래 자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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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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