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봉래동3가, 잊힌 땅의 숨결을 되살리다 – 지표조사로 되돌아보는 그 날의 삶
- 서울 HI
- 9월 7일
- 4분 분량
목차
1. 마주한 기록, 1912년 봉래동3가의 땅 이야기
2. 집은 얼마나 있었나: 대지 232필지, 55,124㎡
3. 땅 위의 자연: 임야 1필지, 2,571㎡
4. 농경의 흔적: 밭 18필지, 53,620㎡
5. 국유지와 법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흔적
6. 성씨별 ‘누가’ 살았나: 김·최·이·박 등
7. 외국인의 흔적: 일본인 31필지, 중국인 2필지, 프랑스인 1필지
8. 왜 이 기록이 지금 의미 있을까? – 지표조사의 가치
9. 시굴조사와 발굴조사의 중요성과 실제 사례
10. 지표조사의 생생한 언어로 풀어내는 봉래동3가 이야기
11. 이야기의 마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저장소
그 오래된 땅, 중구 봉래동3가는 결코 잊히지 않았다.

서울의 중심부, 오늘날 회색빛 빌딩과 수많은 인파가 교차하는 중구 봉래동3가. 이곳이 100년 전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해본 적 있는가? 지금은 대기업 사무실과 호텔, 교통의 요지로 유명하지만, 1912년의 이 땅은 우리 조상들의 삶과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기억의 저장소’였다.
그 시절을 들여다보는 특별한 창, 바로 ‘지표조사’가 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기록이 발굴의 시작이 된다. 오늘 당신과 함께 펼쳐볼 이야기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서울의 한복판, 봉래동3가에서 시작된다.
1. 마주한 기록, 1912년 봉래동3가의 땅 이야기
1912년, 일제 강점기 시절. 당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전국의 땅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고, 중구 봉래동3가 역시 정밀하게 조사됐다. 지금은 고지도로만 남은 이 기록들은, 과거 사람들의 삶을 드러내주는 유일한 단서이자, 문화재 지표조사의 기초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당시 봉래동3가는 총 251필지, 111,316㎡라는 꽤 넓은 면적이었다. 이 수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지금의 고층 건물 아래, 사람들의 삶과 자연이 공존했던 역사 그 자체다.
2. 집은 얼마나 있었나: 대지 232필지, 55,124㎡
그 넓은 땅 중 절반에 가까운 232필지(55,124㎡)는 ‘대지’였다. 지금 말하는 집터다. 이는 곧, 봉래동3가가 주거지로서 활발히 이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전통 한옥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을 것이고, 작은 가게와 점방도 골목마다 존재했을 것이다.
20세기 초 서울의 도시화 초기 단계에서 이곳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의 일상은 어땠을까. 마당에서 장작을 패는 소리, 장독대 옆 고양이 울음, 아낙네들이 물동이를 이고 오가던 장면이 눈에 그려진다.
3. 땅 위의 자연: 임야 1필지, 2,571㎡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 봉래동3가에는 1필지의 임야, 즉 산림이 있었다. 면적은 2,571㎡. 작지 않다. 작은 뒷산 수준으로, 아마도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것이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고, 작은 새들이 지저귀며 계절의 변화를 알리던 그곳.
자연이 도시 안에 숨 쉬고 있었던 흔적은, 우리가 얼마나 자연과 함께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의 회색 도시 안에선 찾을 수 없는 풍경이다.
4. 농경의 흔적: 밭 18필지, 53,620㎡
놀랍게도, 당시 봉래동3가에는 18필지, 무려 53,620㎡의 밭이 존재했다. 거의 마을의 절반 이상이 경작지였다. 고구마를 캐고, 배추를 심고, 가을이면 곡식을 거두던 그 풍경이 도심 한복판에 존재했다는 사실. 믿겨지는가?
오늘날 이 자리는 고속버스터미널, KTX역, 수많은 교통망의 중심이지만, 1912년엔 사람들이 직접 땅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가던 터전이었다. ‘서울도 한때는 농촌이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5. 국유지와 법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흔적
1912년 기록에 따르면 봉래동3가에는 4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지금처럼 공공시설이나 군용지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존재다.
딱 1필지. 하지만 그 상징성은 크다. 동척은 일제의 대표적 식민지 수탈 기업이었다. 전국의 땅을 헐값에 강탈해 일본인에게 팔아넘기고, 한국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기업. 봉래동3가의 한 귀퉁이에 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1필지의 법인 소유 토지도 등장한다. 기업화, 조직화된 소유권이 1912년 서울 한복판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6. 성씨별 ‘누가’ 살았나: 김·최·이·박 등
가장 많이 땅을 소유한 성씨는 김씨, 총 49필지. 뒤를 이어 최씨 25필지, 이씨 22필지, 박씨 12필지가 있었다. 이름 없는 일반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을 이뤘던 것이다. 누군가는 쌀을 지어 먹고, 누군가는 국밥 장사를 했을 것이다. 그들 삶의 흔적이 지금 이 땅 위에 남아있다.
지금도 이 근방에 김씨, 이씨 후손들이 살고 있을까? 우리의 조상일지도 모른다. 이런 조사는 단순히 수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 계보와 기억을 잇는 ‘문화적 연결고리’가 된다.
7. 외국인의 흔적: 일본인 31필지, 중국인 2필지, 프랑스인 1필지
봉래동3가에는 일본인이 31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통치가 어떻게 서울 속 민간 소유까지 파고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수치다. 중국인은 2필지, 프랑스인은 1필지를 갖고 있었다.
이국적인 건물이 들어섰을 수도 있고, 외국 상점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는 ‘봉래동’이라는 지명이 국제교류의 한 거점이었음을 시사한다. 지금의 글로벌 서울은, 이미 100년 전부터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있었던 셈이다.
8. 왜 이 기록이 지금 의미 있을까? – 지표조사의 가치
이 모든 자료는 단순히 ‘과거의 통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서울시가 시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근거가 된다. 지표조사는 개발 또는 공사 이전, 지하에 묻힌 문화유산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한 1차 조사다.
봉래동3가처럼 기록이 풍부한 지역은 문화재 시굴조사로도 확장될 수 있으며, 이는 도시계획에도 영향을 미친다. 문화유산이 묻힌 땅을 보호하며, 미래세대에게도 역사를 이어주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9. 시굴조사와 발굴조사의 중요성과 실제 사례
서울 용산구의 한 오피스텔 신축 예정지. 공사 전 지표조사에서 조선 후기 가옥터가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즉각 시굴조사를 명령했고, 발굴조사 결과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건설사는 설계를 변경했고, 일부 유적은 보존되었다.
이처럼 지표조사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도시와 역사 사이의 접점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봉래동3가 역시, 재개발 또는 건축 전 이런 조사를 통해 역사의 중요한 퍼즐 조각을 되살릴 수 있다.
10. 지표조사의 생생한 언어로 풀어내는 봉래동3가 이야기
“그 땅 아래, 누군가의 발자국이 있었다.”
조사 담당자의 말이다. 땅 속엔 누군가의 식기, 누군가의 장독, 누군가의 나무빗장이 묻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봉래동3가가 ‘살아있는 유산’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문화재 조사라는 말이 어렵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는 일이다. 여러분이 걷는 길 한가운데에도 누군가의 삶이, 숨결이,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다.
11. 이야기의 마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저장소
1912년, 봉래동3가는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삶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그 모든 흔적은 지금의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려주는 지도와도 같다.
지표조사와 발굴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뿌리 찾기’다.
당신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어쩌면 당신 발밑에 ‘역사’가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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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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