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남산동2가의 이야기
- 서울 HI
- 6월 19일
- 2분 분량
[목차]
남산동2가, 조용한 동네에 스며든 낯선 이름
49필지의 집과 3필지의 산, 그 풍경의 이면
양씨 한 명, 일본인 마흔아홉 명
국유지, 제국의 그림자
남산 아래 우리가 잊은 이야기
서울 시굴조사가 중요한 이유
남산 아래, 낯선 사람들이 살아가던 그날의 서울
지금 남산을 오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서울의 스카이라인이죠.
하지만 100년 전, 남산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특히 1912년의 남산동2가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서울이 아니라, 잊고 싶었던 서울의 과거를 품고 있었죠.

1. 남산동2가, 조용한 동네에 스며든 낯선 이름
1912년, 중구 남산동2가는 총 52필지, 약 62,958㎡의 면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조용한 마을에는 예상치 못한 이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죠.
바로 일본인이었습니다.
전체 52필지 중 무려 49필지를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 초반, 일본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선의 중심을 장악해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죠.
2. 49필지의 집과 3필지의 산, 그 풍경의 이면
전체 면적의 대부분인 59,091㎡(49필지)는 대지였습니다.
집들이 들어선 터였죠.
하지만 이 집들이 우리 조선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모두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고, 남산 아래는 조용히 일본의 주거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임야도 있었습니다. 3필지, 총 3,867㎡의 면적.
자연을 그대로 둔 땅이었지만, 이마저도 조용히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3. 양씨 한 명, 일본인 마흔아홉 명
이 동네에서 조선인의 흔적은 정말 미미했습니다.
양씨가 단 1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이죠.
49필지를 소유한 일본인과, 단 1필지의 조선인.
이 수치가 말하는 건 단순한 인구 비율이 아니라, 주권과 삶의 중심을 빼앗긴 민족의 현실이었습니다.
양씨는 어떤 마음으로 이 동네를 지켰을까요?
매일 아침 문을 열고 나올 때마다 일본인 이웃들 사이에 홀로 선 기분은 어땠을까요?
4. 국유지, 제국의 그림자
남산동2가에는 2필지의 국유지도 존재했습니다.
이 역시 일본 제국의 손에 들어가 공공시설이나 행정 용도로 바뀌어갔겠죠.
‘국유지’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애매하지만, 그 국(國)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국은 땅 위에 깃발을 꽂고, 행정으로 제도를 바꾸고, 그 위에 자신들의 도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작점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산동2가였던 겁니다.
5. 남산 아래 우리가 잊은 이야기
지금 남산동2가를 걷다 보면, 겉으로는 아주 평범해 보입니다.
높은 빌딩, 아담한 주택가, 외국인 관광객도 간간이 오가는 길목.
하지만 그 땅 아래, 일제강점기의 기억이 묻혀 있습니다.
일본이 도시 한가운데 어떤 방식으로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 서울을 바꿔놓았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증거’들이죠.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죠.
6. 서울 시굴조사가 중요한 이유
바로 그래서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는 더 중요합니다.
땅 아래 묻힌 건 유물만이 아니라 기억입니다.
지워진 이야기, 잊힌 이름, 훼손된 공간의 원래 주인을 찾아내는 일이죠.
1912년의 남산동2가가 보여주듯, 서울은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서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아래 깔린 과거의 이야기를 반드시 함께 봐야 합니다.
서울문화유산의 발굴조사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걸어가야 할 작업입니다.
글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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