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효자동 토지조사 기록 도시 한복판에 숨겨진 집들의 이야기
- 1월 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서울 문화유산 심층 분석 · 종로구 편
1912년 효자동,거의 전부가 집이었던 동네
200필지 중 199필지가 대지였던 초고밀도 주거지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관점에서 읽는 경복궁 옆 동네의 진짜 기억
200총 필지 수
49,742㎡전체 면적
99.5%대지 비율
8필지일본인 소유
200필지 중 199필지가 집이었던 동네가 있었다. 그 땅 아래에 지금도 누군가의 부엌이 잠들어 있다.
효자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뭐가 먼저 떠오르나. 경복궁, 조용한 골목, 문화재 보호구역. 맞아. 근데 1912년 이 동네는 지금보다 훨씬 더 뜨겁게 살아 있었어. 200필지 중 199필지가 사람이 사는 집이었으니까. 그 빽빽한 삶의 흔적들이 지금 땅속 어딘가에 있어.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다음에 효자동을 걸을 때 발걸음이 달라질 거야.
CHAPTER 01
지금 우리가 걷는 효자동, 1912년에는 어떤 곳이었을까

효자동. 이름만 들어도 뭔가 반듯하고 고요한 느낌이 드는 동네야. 경복궁 바로 옆에 붙어 있고, 지금도 차분한 주거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어. 그런데 1912년으로 시간을 돌리면, 이 동네는 생각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었어.
기록에 따르면 1912년 종로구 효자동의 전체 필지는 200필지, 면적은 49,742㎡야. 얼핏 보면 그냥 숫자처럼 보이지만, 이 숫자 안에 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 전체가 담겨 있어. 50,000㎡에 가까운 땅, 200개의 필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집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살았는지 상상해봐.
더 놀라운 건 토지의 성격이야. 문화재 지표조사를 준비할 때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게 바로 이 '토지 이용의 성격'이거든. 이 동네에서 그 답은 너무나 명확해. 효자동의 땅 99.5%가 집이었어. 논도, 밭도, 사사지도, 잡목지도 아니야. 오직 집, 집, 집이었어.
200총 필지 수
199대지 (주거) 필지
1잡종지 필지
99.5%대지 비율
경복궁과 가까운 입지, 도성 안이라는 행정적 중심성, 이 두 조건이 맞물리면서 효자동은 자연스럽게 인구가 밀집하는 공간이 됐어. 조선 왕조 오백 년 동안 궁 가까이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이 동네로 모여들었고, 그 결과가 199필지 대지라는 숫자로 남은 거야.
CHAPTER 02
거의 전부가 집이었다는 동네의 정체
199필지, 49,378㎡가 대지였다는 사실. 이걸 처음 접하면 잠깐 멈추게 돼. 서울 도심 동네라도 보통은 논이 조금 있거나 밭이 섞여 있거나, 사찰 공간이 있거나 하거든. 그런데 효자동은 달랐어. 논 0필지, 밭 0필지, 산림 0필지. 오직 집만 있었어.
이 구조가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마 일반인은 잘 모를 거야. 사람이 밀집해 살았던 공간은 반드시 흔적을 남겨. 우물, 배수로, 담장 기초, 부뚜막 흔적, 온돌 구들, 생활 토기 조각. 이 것들이 층층이 쌓여서 지하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집이 많았다는 건 유물이 많다는 말과 거의 같아.
토지 유형 | 필지 수 | 면적(㎡) | 비율 |
대지 (주거) | 199필지 | 49,378㎡ | 99.3% |
잡종지 | 1필지 | 363㎡ | 0.7% |
논·밭·산림 | 0필지 | 0㎡ | 0% |
합계 | 200필지 | 49,742㎡ | 100% |
실제로 서울 도심 발굴 사례를 보면 고밀도 주거지에서 나오는 유물의 양과 층위 깊이는 다른 유형의 토지와 비교가 안 될 정도야. 생활층이 두껍게 쌓여 있거든. 조선 시대 층위 위에 구한말 층위가 있고, 그 위에 일제강점기 층위가 얹혀 있어. 그리고 그 위에 지금 우리가 걸어 다니는 현대의 아스팔트가 있는 거야.
효자동은 "집밖에 없는 동네"야. 고고학적으로 번역하면 "유물이 가장 풍부하게 나올 수 있는 동네"야. 이 두 문장은 같은 말이야.
CHAPTER 03
잡종지 단 1필지, 그 363㎡의 의미

200필지 중 단 1필지, 363㎡. 효자동 전체에서 집이 아닌 땅은 이것 하나야. 숫자만 보면 너무 작아서 지나치기 쉬워. 근데 이 1필지가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는 오히려 눈에 더 들어와.
잡종지라는 분류는 특정 용도로 정해지지 않은 땅을 말해. 이 시기에 잡종지가 된다는 건 여러 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어. 마을 공동 우물이 있는 자리, 사람들이 모이는 작은 공터, 배수나 하천 관리를 위한 공간, 혹은 소규모 의례 공간. 어느 것이든 간에, 사람들이 공동으로 드나들며 사용했던 장소라는 뜻이야.
발굴조사 경험이 있는 연구자들은 공동 사용 공간에서 의외의 발견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해. 버려진 물건들이 쌓이는 곳, 여러 사람의 흔적이 겹치는 곳에서 유물의 다양성이 가장 높게 나타나거든. 363㎡라는 작은 면적이지만, 효자동 이 1필지 잡종지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는 클 수 있어.
게다가 199필지가 집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공간에서 딱 하나 비어 있는 땅이라는 게, 공간 배치적으로도 의미 있어. 이 1필지가 동네의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에 따라, 당시 생활 동선이나 마을 구조를 추론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어.
CHAPTER 04
이씨·김씨·박씨, 성씨로 읽는 효자동의 주인들
땅이 누구 것이었는지를 보면 사람이 보여. 1912년 효자동의 소유자 성씨 분포는 이런 구조야.
성씨 | 소유 필지 수 | 순위 | 특징 |
이씨 | 39필지 | 1위 | 최다 소유 |
김씨 | 34필지 | 2위 | 근소한 차이 |
박씨 | 13필지 | 3위 | — |
기타 한국인 | 다수 | — | 소규모 분산 |
법인 | 1필지 | — | 공적 소유 |
일본인 | 8필지 | — | 식민지 유입 |
이씨 39필지, 김씨 34필지. 이 두 성씨가 효자동 전체 소유 구조를 이끌고 있었어. 그렇다고 이 동네가 특정 가문의 독점 공간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박씨, 최씨, 정씨 등 다양한 성씨가 뒤를 이으면서 효자동은 여러 집안이 공존하는 생활 공동체의 성격을 유지했어.
문화재 발굴기관들이 성씨 분포 자료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특정 가문이 장기간 점유했던 필지에는 세대를 이어가며 쌓인 유물의 층위가 두껍게 형성돼 있는 경우가 많아. 할아버지가 쓰던 그릇이 아들이 쓰던 그릇 위에 얹혀 있고, 그 위에 손자의 생활 흔적이 쌓이는 식이야. 짧게 살다 떠난 땅과, 대를 이어 살아온 땅은 발굴 결과가 완전히 달라.
이씨 39필지, 김씨 34필지. 이 두 가문이 나란히 효자동을 지켜온 거야.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의 시간이 그 땅 아래에 쌓여 있을 수 있어.
CHAPTER 05
법인 토지와 일본인 소유지에서 보이는 시대의 그림자

효자동 200필지 중에 일본인 소유 토지가 8필지야. 전체의 4%야. 숫자만 보면 적어 보이지. 그런데 1912년이라는 시점을 기억해야 해. 한일강제병합이 1910년에 이루어졌어. 불과 2년 만에 효자동 안으로 일본인 소유지 8필지가 생겼다는 거야.
이게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니야. 식민지 경제 질서가 서울 도심 핵심 주거지 안으로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신호야. 경복궁 바로 옆 동네에 일본인의 이름이 지적도에 새겨진다는 건, 조선 왕조의 상징 공간 주변부터 공간 지배가 시작됐다는 의미이기도 해.
법인 소유 토지 1필지도 눈여겨봐야 해. 개인이 아닌 법인이 토지를 소유했다는 건, 이 시기에 이미 근대적 소유권 개념이 이 동네 안으로 들어왔다는 증거야. 전통적인 공간이 근대 행정 체계 안으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었어.
문화재 발굴 시 이런 필지는 특별히 주목해야 해. 기존 조선인의 생활 층위 위에 식민지 시기의 변화 층위가 덮여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한 공간 안에 두 시대의 흔적이 겹쳐 있는 복합 유적. 이건 학술적으로도 희귀한 사례야. 어떤 식으로 공간이 바뀌었는지, 누가 무엇을 허물고 무엇을 새로 세웠는지가 지하 층위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수 있어.
CHAPTER 06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한 이유

효자동 같은 지역은 개발 여부와 상관없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해. 이유는 단순해. 이미 사람이 고밀도로 밀집해 살았고, 생활 유적이 수백 년에 걸쳐 누적됐으며, 시대 전환의 흔적까지 겹쳐 있는 조건이 이 동네에 모두 갖춰져 있거든.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을 먼저 살피는 단계야. 기와편, 도자기 파편, 석재 노출부, 건물 기초의 흔적 같은 것들이 지표 바로 아래에 있는 경우가 많아. 효자동처럼 고밀도 주거지였던 곳은 이 단계에서 이미 상당한 정보가 확인될 수 있어.
문헌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표본조사
→
전면 발굴조사
지표조사에서 유물이 확인되면 시굴조사로 이어져. 좁은 구덩이를 파서 층위와 유물의 존재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거야. 그리고 시굴조사 결과에 따라 표본조사 또는 전면 발굴조사가 결정돼. 효자동은 이 흐름에서 지표조사만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 199필지의 집터가 그 만큼 강력한 물적 토대를 제공하거든.
평가 항목 | 효자동 현황 | 발굴 잠재력 |
대지 밀집도 | 199필지 / 99.5% | ★★★★★ |
성씨 다양성 (장기 거주) | 이씨·김씨·박씨 외 다수 | ★★★★★ |
식민지 이행기 흔적 | 일본인 소유 8필지 | ★★★★☆ |
공공·잡종지 존재 | 잡종지 1필지 | ★★★☆☆ |
복합 층위 가능성 | 조선~근대 이중 구조 | ★★★★★ |
역사 입지 중요성 | 경복궁 인근 핵심 주거지 | ★★★★★ |
CHAPTER 07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로 보는 효자동의 가능성

비슷한 조건의 서울 도심 지역에서 어떤 발굴 성과가 나왔는지를 보면, 효자동의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
두 사례가 공통으로 말해주는 게 있어. 고밀도 주거지는 반드시 말을 해. 땅속에서 말을 걸어와. 지표조사 한 번, 시굴 트렌치 하나만 열어봐도 그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야. 효자동도 마찬가지야. 199필지의 집들이 남긴 이야기가 그 아래 어딘가에 있어.
CHAPTER 08
우리가 이 기록에 마음을 흔들려야 하는 이유

1912년 효자동은 숫자로 보면 조용해. 200필지, 49,742㎡. 담담하고 건조한 행정 기록처럼 보여. 그런데 이 숫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사람이 보여. 이씨 가족이 살던 집, 김씨 집안이 수십 년 동안 가꿔온 마당, 잡종지 363㎡의 공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던 풍경, 그리고 어느 날 지적도에 낯선 일본인 이름이 새겨지던 그 순간.
문화재는 박물관 유리 케이스 안에만 있는 게 아니야.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골목 아래에 있어. 효자동을 걸을 때 발 아래에 있어. 이 기록을 읽고 나면, 그 사실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질 거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1912년 토지조사부를 기초 자료로 분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100년 전의 숫자가 오늘 문화재 지표조사 계획서의 첫 번째 근거가 되는 거야. 어디를 조사해야 하는지, 왜 그 땅이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지도가 되는 거야. 그 지도의 한 페이지에 효자동이 있어.
이 글을 읽고 나면, 다음에 효자동을 걸을 때 발걸음이 조금 느려질 수도 있어. 그 느려진 한 걸음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작이 되는 거야. 그 걸음 아래에 199필지의 집들이 있어.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거기에 있어.
효자동은 더 이상 그냥 조용한 골목이 아니야
200필지 중 199필지가 집이었던 그 동네. 이씨와 김씨가 살았고, 어느 날 낯선 이름이 지적도에 새겨지기 시작했던 그 동네.
그 집들은 사라졌지만, 땅속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어.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야.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너는, 그 기억을 아는 사람이 됐어.
효자동의 땅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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