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효자동 토지조사 기록 도시 한복판에 숨겨진 집들의 이야기
- 서울 HI
- 1월 9일
- 3분 분량
목차
지금 우리가 걷는 효자동, 1912년에는 어떤 곳이었을까
거의 전부가 집이었다는 동네의 정체
잡종지 단 1필지, 그 363㎡의 의미
이씨·김씨·박씨, 성씨로 읽는 효자동의 주인들
법인 토지와 일본인 소유지에서 보이는 시대의 그림자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한 이유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로 보는 효자동의 가능성
우리가 이 기록에 마음을 흔들려야 하는 이유
1912년의 효자동은 지금보다 훨씬 조용했지만, 사람의 숨결은 훨씬 더 빽빽했다.
지금의 효자동을 떠올리면 경복궁 옆 조용한 골목, 고즈넉한 주택가, 그리고 문화재 보호구역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시간을 100년 이상 되돌려 1912년으로 가보면, 이 동네는 생각보다 훨씬 더 ‘생활 밀착형 공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2년 종로구 효자동의 전체 면적은 200필지, 49,742㎡.
이 숫자만 봐도 규모가 작지 않다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토지의 성격이다.
이 땅의 거의 전부가 집이었다.
1장 지금 우리가 걷는 효자동, 1912년에는 어떤 곳이었을까
1912년 효자동에는 총 200필지가 존재했다.
그중 무려 199필지, 면적으로는 49,378㎡가 대지였다.
말 그대로 집과 집, 또 집이 이어진 동네였다.
논도 없고, 밭도 없고, 산도 없다.
도시형 주거지가 이미 완성 단계에 있었던 셈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문화재 발굴이나 문화재 지표 조사를 진행할 때, “이 지역에 과거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밀집해 살았는가”는 핵심 판단 기준이 된다.
효자동은 그 기준을 아주 강하게 충족한다.
사람이 살았던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우물, 담장, 배수로, 생활유물.
그리고 그건 땅속 어딘가에 지금도 잠들어 있다.

2장 거의 전부가 집이었다는 동네의 정체
효자동의 대지 비율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200필지 중 199필지가 집이었다는 건, 이곳이 관청 부속지나 농경지가 아니라 ‘사람이 모여 사는 핵심 생활권’이었다는 뜻이다.
경복궁과 가까운 입지.
도성 안이라는 행정적 중심성.
이 조건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인구 밀도가 높아진다.
이런 지역은 문화재 시굴조사나 표본조사를 했을 때,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서울 도심 발굴 사례를 보면, 이런 고밀도 주거지는 생활유물의 층위가 아주 풍부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효자동은 “그냥 조용한 동네”가 아니라, 조사 가치가 높은 장소다.
3장 잡종지 단 1필지, 그 363㎡의 의미
효자동에는 잡종지가 단 1필지, 363㎡만 존재했다.
숫자로 보면 아주 미미하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오히려 눈길이 간다.
잡종지는 도로, 공터, 배수 공간, 또는 공동 이용 공간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공간은 발굴조사에서 의외의 단서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모여 드나들던 자리.
버려진 물건이 쌓이던 자리.
혹은 생활과 의례가 교차하던 장소일 수도 있다.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되는 이유다.

4장 이씨·김씨·박씨, 성씨로 읽는 효자동의 주인들
1912년 효자동의 토지 소유 성씨를 보면, 이씨 39필지, 김씨 34필지, 박씨 13필지가 확인된다.
이 숫자는 단순한 가문 통계가 아니다.
누가 이 동네를 오래 점유했고, 누가 중심 세력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특정 성씨가 밀집된 지역은 대대로 거주한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은 곧 장기간에 걸쳐 유적이 누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기관들이 성씨 분포 자료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짧게 살다 떠난 땅과, 세대를 이어 살아온 땅은 완전히 다르다.
효자동은 후자에 가깝다.

5장 법인 토지와 일본인 소유지에서 보이는 시대의 그림자
효자동에는 법인 소유 토지가 1필지 존재했다.
그리고 일본인 소유 토지는 8필지였다.
이 숫자는 결코 작지 않다.
1912년은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던 시기다.
도심 핵심 지역에 일본인 소유 토지가 있다는 건, 이 동네가 이미 식민지 경제 구조 속으로 편입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런 토지는 발굴조사 시 특별히 주목된다.
기존 조선인의 생활층과 식민지 시기의 변화층이 동시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공간 안에 두 시대의 흔적이 겹쳐진다.
이건 학술적으로도, 전시 콘텐츠로도 굉장히 매력적인 포인트다.

6장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한 이유
효자동 같은 지역은 개발 여부와 상관없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이미 사람이 밀집해 살았고,
생활 유적이 누적되었으며,
시대 전환의 흔적까지 겹쳐 있다.
이건 교과서적인 발굴 적합지다.
실제로 서울 도심에서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은 많지 않다.
그래서 효자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서울 도시사 전체를 읽을 수 있는 한 페이지다.
7장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로 보는 효자동의 가능성
서울의 다른 도심 지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처음에는 “집밖에 없는 동네”라고 여겨졌지만,
지표조사 후 시굴조사를 진행하자 우물, 배수로, 생활유물, 기와 조각이 연속적으로 확인됐다.
그 결과 전면 발굴로 이어졌고,
도시형 유적이라는 새로운 평가를 받았다.
효자동도 충분히 그 가능성을 갖고 있다.

8장 우리가 이 기록에 마음을 흔들려야 하는 이유
1912년 효자동은 숫자로 보면 조용하다.
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사람의 삶이 보이고,
도시의 기억이 드러나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의 무게가 느껴진다.
문화재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골목 아래에 있다.
효자동은 그 사실을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증명하는 동네다.
이 기록을 읽고 나면,
다음에 효자동을 걸을 때 발걸음이 조금 느려질지도 모른다.
그 느려진 한 걸음이,
과거와 지금을 이어주는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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