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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화동, 138필지에 담긴 삶의 밀도와 땅의 기억

목차


  1. 1912년 화동이라는 동네, 숫자 뒤에 숨은 이야기

  2. 집이 곧 삶이던 공간, 화동의 대지 구조

  3. 잡종지 433㎡, 도시의 틈에서 읽는 변화의 신호

  4. 국유지 5필지, 국가의 시선이 머문 자리

  5. 성씨로 읽는 화동의 사회 지도

  6. 일본인 소유 토지 1필지가 남긴 흔적

  7. 화동 토지 구조가 말해주는 문화재 발굴의 힌트

  8. 오늘의 화동, 그리고 우리가 이 기록을 읽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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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의 화동은 숫자로 보면 작지만, 들여다볼수록 숨이 막힐 만큼 촘촘한 삶의 무대였다.


서울 종로 한복판.


지금은 조용한 골목과 갤러리, 한옥과 박물관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화동이지만, 1912년의 화동은 그보다 훨씬 더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138필지, 53,094㎡.


이 숫자만 보면 평범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안에는 집을 짓고, 살고, 대를 잇고, 다시 허물고 바꾸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글은 단순한 토지 통계가 아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땅의 성격 분석’이며, 동시에 화동이라는 동네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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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912년 화동이라는 동네, 숫자 뒤에 숨은 이야기



1912년 종로구 화동은 총 138필지였다.


면적은 53,094㎡.


놀라운 점은 이 면적의 대부분이 ‘사람이 사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이다.


논도 거의 없고, 밭도 없다.


산도 없다.


이건 곧 화동이 이미 1910년대 초반에 완전히 도시화된 주거지였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 이런 동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겹겹이 쌓였겠구나.”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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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집이 곧 삶이던 공간, 화동의 대지 구조


1912년 화동에는 집이 136필지 있었다.


면적은 52,661㎡.


전체 면적의 거의 전부다.


이 말은 곧 골목 하나, 담장 하나, 우물 하나까지 모두 생활과 직결된 공간이었다는 의미다.


대지는 단순한 땅이 아니다.


사람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공간이고, 가장 많이 손을 대는 공간이다.


그래서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대지가 밀집한 지역은 늘 긴장된다.


지하에는 이전 집의 기단, 배수 시설,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구조의 동네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 생각보다 많은 생활 흔적이 나온다.


도자기 조각, 기와편, 우물 흔적, 담장 기초.


화동은 그런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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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잡종지 433㎡, 도시의 틈에서 읽는 변화의 신호


잡종지는 단 2필지, 433㎡였다.


숫자만 보면 미미하다.


하지만 도시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단서다.


잡종지는 용도가 애매한 땅이다.


길이 될 수도 있고, 공터가 될 수도 있고, 나중에 집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런 땅이 존재한다는 건 화동이 이미 ‘완성된 도시’이면서도 동시에 ‘변화 중’이었다는 뜻이다.


문화재 표본조사에서 이런 잡종지는 반드시 체크 대상이 된다.


이전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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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국유지 5필지, 국가의 시선이 머문 자리


1912년 화동에는 국유지가 5필지 있었다.


이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국유지는 대부분 도로, 관청 관련 시설, 공공 목적의 공간일 가능성이 크다.


즉, 화동은 단순한 민가촌이 아니라 행정과 도시 기능이 스며든 공간이었다.


이런 국유지 주변은 발굴조사에서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도시 기반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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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씨로 읽는 화동의 사회 지도


화동의 토지 소유는 꽤 분명한 패턴을 보인다.


김씨 27필지.


이씨 17필지.


박씨 16필지.


최씨 13필지.


이건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특정 성씨 집단이 골목 단위로 거주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런 구조는 발굴 시 동일한 양식의 유구가 반복적으로 나올 확률을 높인다.


실제로 서울 구도심 발굴 성공 사례를 보면, 같은 성씨 집단이 살던 지역에서 비슷한 생활 유구가 연속적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이게 바로 ‘동요 시키는 지점’이다.


이 땅, 파보면 뭔가 나올 것 같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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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일본인 소유 토지 1필지가 남긴 흔적


1912년 화동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1필지 있었다.


숫자는 작다.


하지만 상징성은 크다.


이 시기의 일본인 소유 토지는 대개 상업적 목적이나 전략적 위치에 자리 잡는다.


이 한 필지는 화동이 식민지 도시 구조로 서서히 편입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이런 필지는 반드시 별도로 해석해야 한다.


한국식 유구와 다른 구조가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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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화동 토지 구조가 말해주는 문화재 발굴의 힌트


화동은 문화재 지표 조사, 시굴조사 대상지로서 매우 매력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


주거 밀집.


장기 거주.


부분적 공공시설.


소규모 외래 소유.


이 조합은 발굴조사 성공 확률을 높인다.


실제로 서울 도심의 여러 발굴 성공 사례가 이런 구조를 가진 지역에서 나왔다.


화동 역시 예외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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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오늘의 화동, 그리고 우리가 이 기록을 읽는 이유


1912년의 화동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위에 지금의 화동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직 꺼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다.


이 기록을 읽는다는 건 과거를 추억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이 어떤 시간을 품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걸 아는 순간, 골목 하나도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화동은 오늘도 조용하다.


하지만 그 침묵 아래에는 분명, 수많은 삶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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