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종로구 화동, 138필지에 담긴 삶의 밀도와 땅의 기억

  • 1월 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서울 문화유산 심층 분석 · 종로구 편

1912년 화동,골목 하나도 가볍지 않은 동네

138필지 53,094㎡ 중 136필지가 집이었던 공간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관점에서 읽는 종로 화동의 진짜 기억

138총 필지 수

53,094㎡전체 면적

98.6%대지 비율

5필지국유지

이 땅, 파보면 뭔가 나올 것 같지 않나. 138필지 중 136필지가 집이었던 동네라면.

화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지금은 갤러리와 한옥, 조용한 골목이 먼저 떠올라. 그런데 1912년 이 동네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빽빽하게 살아 있었어. 136필지가 전부 집이었고, 골목 하나 담장 하나에 사람의 시간이 쌓여 있었어. 그 시간이 지금 땅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어.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화동의 침묵이 달리 들릴 거야.


CHAPTER 01

1912년 화동이라는 동네, 숫자 뒤에 숨은 이야기



처음엔 그냥 숫자처럼 보여. 138필지, 53,094㎡. 지도 위에 이름 하나 올라와 있는 평범한 종로 동네. 그런데 이 숫자를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금방 다른 이야기가 시작돼.

1912년 종로구 화동에는 논이 없어. 밭도 없어. 사사지도 없고 산림도 없어. 오직 집, 집, 집. 그리고 아주 작은 틈처럼 존재하는 잡종지 2필지와 국유지 5필지가 전부야. 이 말은 곧 화동이 1910년대 초반에 이미 완전히 도시화된 주거지였다는 뜻이야. 농촌의 흔적이 전혀 없는, 서울 도성 한복판의 순수한 생활 공간이었던 거지.

문화재 발굴기관에서 이런 동네를 보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겹겹이 쌓였겠구나." 이 한마디가 답이야. 논밭이 없다는 건 수백 년 동안 사람이 끊임없이 살았다는 뜻이거든. 한 세대가 지으면 다음 세대가 고치고, 그 다음 세대가 또 바꾸면서 유물의 층위가 두껍게 쌓여. 화동은 그런 동네였어.

138총 필지 수

136대지 (주거) 필지

2잡종지 필지

98.6%대지 비율

화동이 이렇게 완전한 주거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입지 때문이야. 조선 왕조 내내 도성 안 종로 한복판이라는 위치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당겼어. 관청과 시전이 가깝고, 도성의 행정 중심과 연결되는 이 자리에서 화동은 수백 년에 걸쳐 서울의 생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어.


CHAPTER 02

집이 곧 삶이던 공간, 화동의 대지 구조

136필지, 52,661㎡. 이게 화동 대지의 규모야. 전체 면적 53,094㎡의 99.2%가 사람이 사는 집이었어. 이 숫자가 말해주는 건 단순해. 화동에서 땅이란 곧 삶의 무대였어. 팔아도 살고, 나눠도 살고, 다시 합쳐도 집이 되는 공간.

토지 유형

필지 수

면적(㎡)

비율

대지 (주거)

136필지

52,661㎡

99.2%

잡종지

2필지

433㎡

0.8%

논·밭·산림·기타

0필지

0㎡

0%

국유지

5필지

별도

합계

138필지

53,094㎡

100%

대지가 밀집한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조사단이 긴장하는 곳이야. 왜냐하면 사람이 가장 오래 머무르고 가장 많이 손을 댄 공간이기 때문이야. 집을 짓고, 허물고, 다시 짓는 과정에서 이전 건물의 기단이 남고, 배수 시설이 묻히고, 생활 유물이 쌓여. 이 과정이 수백 년 반복되면 지하에 두꺼운 역사의 단면이 형성돼.

화동 136필지의 집터는 그 가능성을 품고 있어. 도자기 조각, 기와편, 우물 흔적, 담장 기초, 온돌 구들의 흔적. 이것들이 지금 화동 아스팔트 아래 어딘가에 층층이 잠들어 있을 수 있어. 발굴조사가 시작되는 순간, 이 층위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거야.

화동의 대지 99.2%. 이 숫자는 단순한 토지 분류가 아니야. 수백 년에 걸쳐 사람의 시간이 이 땅 위에 쌓였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시간의 흔적이 아직 땅속에 있어.


CHAPTER 03

잡종지 433㎡, 도시의 틈에서 읽는 변화의 신호



2필지, 433㎡. 전체 138필지 중 딱 2필지가 잡종지야. 비율로 따지면 0.8%도 안 돼. 숫자만 보면 완전히 묻혀버릴 것 같아.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 2필지가 오히려 더 눈에 들어와.

잡종지라는 분류가 뭔지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해. 특정 용도로 정해지지 않은 땅이야. 이 시기에 잡종지가 만들어진다는 건 여러 가능성을 품고 있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터일 수도 있고, 골목이 되기 직전의 통로 공간일 수도 있고, 소규모 공동 의례 공간이었을 수도 있어. 어떤 해석이 맞든, 여러 사람이 드나들던 공간이었다는 건 확실해.

발굴 경험이 있는 연구자들은 공동 사용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해.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면서 남긴 물건들이 한 자리에 쌓이기 때문이야. 화동의 433㎡ 잡종지도 마찬가지야. 겉으로는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 화동 사람들의 공동 생활 흔적이 압축돼 있을 수 있어.

게다가 잡종지가 존재한다는 건 화동이 '완성된 도시이면서도 동시에 변화 중'이었다는 신호야. 136필지 집이 빽빽하게 채워진 공간에 딱 2필지의 여백이 있다는 건, 이 동네가 완전히 굳어진 게 아니라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는 뜻이거든. 문화재 표본조사에서 이 잡종지는 반드시 체크 대상이 돼.


CHAPTER 04

국유지 5필지, 국가의 시선이 머문 자리

1912년 화동에는 국유지가 5필지 있었어. 개인도 아니고 법인도 아닌 국가가 소유한 땅이야. 이 숫자는 결코 가볍지 않아.

1912년 시점의 국유지는 대부분 도로, 관청 관련 시설, 공공 목적의 공간이었어. 즉, 화동은 단순한 민가 집합체가 아니었어. 국가 행정과 도시 공공 기능이 이 동네 안으로 스며들어 있었던 거야. 조선 왕조의 도성 관리 체계가 이 동네 5필지 위에 올라서 있었을 수 있어.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국유지 주변은 특히 주목하는 구역이야. 도시 기반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관청 건물의 기단부, 도로면의 판석, 배수 시설, 공공 우물, 담장 구조물 같은 것들이 이 구역에서 확인될 수 있어. 이런 공공 유구는 생활 유구와 성격이 달라서, 발굴 보고서에서도 별도 챕터로 분류되는 중요한 내용이야.

화동 국유지 5필지가 어떤 용도였는지 지금 당장 확인할 수는 없어. 하지만 도성 안 종로 한복판에 있었던 국유지라는 사실만으로도, 발굴조사 시 이 구역이 특별히 주목받을 가능성이 충분해. 국가의 시선이 머문 자리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야.

국유지 5필지는 화동이 단순한 민가 집합이 아니었다는 증거야. 행정과 도시 기능이 이 동네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어. 그 뿌리가 지금 땅속에 있을 수 있어.


CHAPTER 05

성씨로 읽는 화동의 사회 지도

이제 사람 이야기를 해볼게. 1912년 화동의 토지 소유자 성씨 분포를 보면, 이 동네의 사회 구조가 또렷하게 드러나.

성씨

소유 필지 수

순위

특징

김씨

27필지

1위

최다 소유

이씨

17필지

2위

박씨

16필지

3위

최씨

13필지

4위

기타 한국인

다수

소규모 분산

일본인

1필지

식민지 유입

김씨 27필지. 이씨 17필지. 박씨 16필지. 최씨 13필지. 이 네 성씨가 화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어. 특정 가문이 독점한 건 아니지만, 몇몇 성씨가 골목 단위로 모여 살았을 가능성이 높아.

문화재 발굴 시 이런 성씨 집중 구역은 특별히 흥미로운 결과를 낼 수 있어. 같은 가문의 집들이 연속적으로 붙어 있으면, 유사한 양식의 유구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 같은 방식으로 집을 짓고, 같은 방식으로 그릇을 쓰고, 같은 방식으로 생활했던 가족들의 흔적이 하나의 층위 안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리고 그 연속성이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단서가 돼.

김씨 27필지, 이씨 17필지, 박씨 16필지, 최씨 13필지. 이 네 가문이 화동의 골목을 나눠 가지고 살았어. 그 골목 아래에 네 가문의 시간이 겹쳐 쌓여 있어. 파보면 뭔가 나올 것 같다는 직감, 이게 틀리지 않아.


CHAPTER 06

일본인 소유 토지 1필지가 남긴 흔적



화동 138필지 중에 일본인 소유 토지가 1필지야. 숫자는 작아. 그런데 1912년이라는 시점과 함께 생각하면 이 1필지의 무게가 달라져.

이 시기 일본인 소유 토지는 대개 상업적 목적이나 전략적 위치에 자리 잡는 경향이 있었어. 종로 한복판 화동에 일본인의 이름이 지적도에 새겨진다는 건, 이 동네가 식민지 도시 구조 안으로 서서히 편입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야. 아주 조용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런 필지는 반드시 별도로 해석해야 해. 한국 전통 주거 방식과 다른 건축 구조가 남아 있을 수 있거든. 벽돌 기초, 유리 부재, 근대적 배수 시설 같은 것들이 이 1필지에서만 다른 양상으로 나올 수 있어. 그 차이가 바로 시대의 경계를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야.


CHAPTER 07

화동 토지 구조가 말해주는 문화재 발굴의 힌트


지금까지 화동의 토지 구조를 하나씩 살펴봤어. 이제 이 모든 조각을 모으면, 화동이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대상지로서 얼마나 매력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나.

문헌 기초조사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표본조사

전면 발굴조사

평가 항목

화동 현황

발굴 잠재력

대지 밀집도

136필지 / 99.2%

★★★★★

성씨 집중도 (장기 거주)

김씨 27·이씨 17·박씨 16

★★★★★

잡종지 (공동 공간)

2필지 / 433㎡

★★★☆☆

국유지 (공공 시설)

5필지

★★★★☆

근대 이행기 흔적

일본인 1필지

★★★☆☆

복합 층위 가능성

조선~근대 이중 구조

★★★★★

주거 밀집, 장기 거주, 공공 시설 흔적, 근대 이행기의 변화 흔적. 이 네 가지 조건이 한 동네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야. 서울 도심에서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화동이 그 드문 사례 중 하나야.


CHAPTER 08

오늘의 화동, 그리고 우리가 이 기록을 읽는 이유



지금 화동을 걸어보면 1912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집들은 허물어졌고, 골목은 바뀌었고, 우물은 묻혔어. 갤러리와 카페가 들어서고, 한옥을 리모델링한 공간들이 새로운 화동의 얼굴이 됐어. 그게 도시가 살아가는 방식이야.

그런데 땅속은 달라. 지표면이 아무리 바뀌어도, 지하에는 이전 시대의 기억이 층층이 남아 있어. 136필지의 집터가 남긴 우물과 기단, 잡종지 433㎡의 공터에서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흔적, 국유지 5필지 위에 올라섰던 시설의 기초, 그리고 이름 모를 김씨 가문 27필지의 생활 유물들. 이것들이 아직 화동 땅속 어딘가에 있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1912년 토지조사부를 바탕으로 이런 분석을 진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100년 전의 숫자가 오늘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번째 근거가 되는 거야. 어디를 먼저 살펴야 하는지, 왜 그 땅이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는 거야. 그 나침반의 한 방향이 화동을 가리키고 있어.

이 기록을 읽는다는 건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게 아니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이 어떤 시간을 품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야. 그걸 아는 순간, 화동의 골목 하나도 가볍게 지나칠 수가 없어. 침묵 아래에 수많은 삶의 목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화동은 오늘도 조용해. 하지만 그 침묵 아래에는 분명,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 있어.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 기록을 읽은 우리가 이어갈 차례야.


화동은 더 이상 그냥 조용한 골목이 아니야

136필지가 전부 집이었던 그 동네. 김씨, 이씨, 박씨, 최씨가 골목을 나눠 살았고, 어느 날 국가의 시선이, 그리고 낯선 이름이 지적도에 새겨지기 시작했던 그 동네.

그 집들은 사라졌지만, 땅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어.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야.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너는, 그 기억을 아는 사람이 됐어.

화동의 침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땅은 묻지도 않았는데, 기억하고 있으니까.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