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홍지동, 아직 밭이 더 많았던 동네의 기억
- 1월 8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홍지동, 밭이 말해주는 서울의 시간
29만㎡의 기록 속에 숨겨진 생활의 흔적, 문화재 지표 조사로 다시 읽는 도시의 기억
서울헤리티지 발굴조사 리서치팀·종로구 홍지동 지역조사·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집보다 밭이 더 많았던 동네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밭 아래, 아무도 꺼내지 않은 시간이 아직 잠들어 있다.
지금 당신이 홍지동을 걷는다면, 그냥 조용한 주거지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을 펼치는 순간, 이 동네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한다. 136필지, 298,870㎡. 그 숫자 안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나면, 평범한 골목조차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문화재 발굴이란 무엇인지, 문화재 지표 조사가 왜 반드시 필요한지, 이 한 동네의 기록이 모든 걸 설명한다.
목 차
숫자 하나로 시작된 시간 여행
1912년 홍지동의 전체 풍경
집보다 밭이 많았던 이유
사사지와 산이 말해주는 공간의 성격
국유지와 법인 토지의 존재 의미
성씨 분포로 읽는 홍지동의 사회 구조
일본인 소유 토지가 남긴 미묘한 흔적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홍지동
실제 발굴 · 조사 성공 사례가 주는 힌트
지금 홍지동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
마음에 남는 한 장면으로 마무리

1. 숫자 하나로 시작된 시간 여행
숫자 몇 개가 과거의 풍경을 이렇게 또렷하게 불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홍지동 자료를 처음 펼쳤을 때 다시 한번 실감했다. 1912년 종로구 홍지동은 지금의 도심 이미지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총 136필지, 면적은 무려 298,870㎡. 이 수치만 봐도 직감이 온다. 홍지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사람이 땅과 가장 가까이 붙어살던 생활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1912년이라는 연도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숫자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며 땅의 쓰임새와 소유 관계가 처음으로 문서로 고정되기 시작한 역사적 전환점이다. 홍지동 역시 이 흐름 속에서 기록된 공간이고, 그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 문화재 지표 조사, 시굴 조사를 진행할 때 가장 먼저 꺼내보는 기초 자료가 된다. 지금 우리가 걷는 도로, 주택, 담장은 그 위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결과일 뿐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자치구 전체에 걸쳐 이 시기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홍지동은 종로구 지역조사의 일환으로 분석된 공간으로, 토지 유형 구성과 소유 주체의 다양성 면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데이터를 담고 있다.
2. 1912년 홍지동의 전체 풍경
136총 필지 수
(1912년 기준)
298,870㎡홍지동 전체
총 면적
85필지밭(전) 필지
278,239㎡
1912년 홍지동의 토지 구성을 한눈에 보면, 이 동네가 얼마나 독특한 성격을 가졌는지 바로 드러난다. 전체 136필지 가운데 밭이 85필지로 가장 많고, 면적으로는 278,239㎡에 달한다. 전체 면적 약 29만㎡ 중 93% 이상이 농경지였다는 뜻이다. 이 비율은 같은 시기 도성 내 다른 종로 지역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높다.
산도 있었다. 임야 2필지, 2,634㎡. 집도 있었다. 대지 48필지, 16,013㎡. 사사지도 있었다. 1필지, 1,983㎡. 국유지와 법인 토지도 각각 존재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중심은 분명 밭이었다. 홍지동은 서울 도성 근처에 자리 잡으면서도 농경 중심의 생활 구조를 유지했던,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 놓인 공간이었다.

3. 집보다 밭이 많았던 이유
홍지동의 대지는 48필지, 16,013㎡였다. 필지 수로만 보면 나쁘지 않은 숫자다. 하지만 면적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필지당 평균 면적이 330㎡ 남짓으로, 집 한두 채 정도의 소규모 대지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대규모 주거지나 권문세가의 저택촌이 아니라, 소박한 살림집들이 밭과 어우러진 동네였음을 보여준다.
왜 집보다 밭이 많았을까. 홍지동은 도성 안팎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접근성과 자급성을 동시에 갖춘 공간이었다. 도성 생활권과 연결되면서도 농사를 지어 생계를 보탤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곳이었다. 이 말은 곧, 홍지동 사람들이 단순히 도시 주거민이 아니라 농사와 생활을 동시에 꾸려가던 복합적 삶의 방식을 가졌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유형의 지역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밭 경계를 이루던 두렁 흔적, 관개 시설, 소규모 창고나 작업 시설의 기초, 농기구 파편 같은 생활 유구가 지표 아래 넓게 분포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경작지와 주거지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지역일수록, 발굴 성과가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경우가 많다.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농경지 비중이 높은 지역은 특별 관심 구역으로 분류된다. 경작 행위 자체가 땅을 교란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아래 층에 조선 시대 생활면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홍지동처럼 오랜 시간 농경지로 유지된 공간은, 개발이나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충분한 지표 조사와 시굴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다시는 꺼내볼 수 없는 기억을 지키는 행위다.
4. 사사지와 산이 말해주는 공간의 성격
홍지동에는 사사지가 1필지, 1,983㎡ 있었다. 사사지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다. 사찰이나 사당 같은 시설은 당시 지역 사회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쉬고, 이야기를 나누는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다. 장날처럼 열리는 소규모 모임, 계절 의례, 마을 경조사가 모두 이런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임야는 2필지, 2,634㎡. 산의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밭과 주거지를 자연스럽게 감싸는 완충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런 지형 구조는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사사지 주변은 기와편, 석재 부재, 소형 불상이나 제기류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임야와 경작지의 경계 지점에서는 토지 이용 방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층위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1,983㎡사사지 1필지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
2,634㎡임야 2필지
생활 공간의 완충 지대
실제로 서울 인근에서 사사지 주변 지역을 시굴 조사한 경우, 생활 유구와 종교 유구가 함께 나오는 복합 발굴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사찰 건물지 아래에 더 오래된 주거 흔적이 겹쳐 발견되기도 했다. 홍지동의 사사지 1필지는 그런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다.

5. 국유지와 법인 토지의 존재 의미
1912년 홍지동 토지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항목이 하나 더 있다. 국유지 2필지와 법인 소유 토지 2필지의 존재다. 숫자는 작지만, 이 존재가 던지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국유지는 도로, 하천, 또는 공공 목적의 시설이 있던 공간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국가가 관리하던 공공 부지는 대개 교통로나 수리 시설, 혹은 관청 관련 부속 토지였다. 이런 공간은 문화재 조사 시 반드시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구간이다. 공공 시설 기초나 배수로 구조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그 주변으로 관련 유물이 집중 출토되기도 한다.
법인 소유 토지 2필지는 더욱 흥미롭다. 1912년 당시 법인이 토지를 소유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개인 간의 토지 거래가 일반적이던 시대에, 법인 명의의 필지가 홍지동 안에 존재했다는 것은 특정 사업 목적이나 조직적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학교, 병원, 회사 관련 시설, 혹은 종교 단체의 별도 부지였을 수 있다.
법인 소유 토지는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항상 특별 관심 대상이 된다. 근대적 건축 방식이 적용된 구조물의 기초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고, 전통 유구와 근대 유구가 한 공간에서 겹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중성이 발굴 현장을 가장 복잡하고 가장 흥미롭게 만든다.
6. 성씨 분포로 읽는 홍지동의 사회 구조
숫자의 층위를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이 보인다. 1912년 홍지동 토지 소유 성씨 분포를 보면 동네의 사회적 성격이 한층 또렷해진다. 이씨 39필지, 박씨 32필지, 김씨 25필지. 세 성씨가 전체 필지의 70% 이상을 차지하지만, 어느 한 가문이 압도적으로 독점한 구조는 아니다.
39이씨 보유
필지 수
32박씨 보유
필지 수
25김씨 보유
필지 수
이 구조는 대지주 중심의 폐쇄적 마을이 아니라, 비교적 분산된 소유 형태를 가진 열린 생활 공동체였음을 뜻한다. 여러 성씨가 고르게 섞인 마을은 다양한 계층과 직업군의 사람들이 공존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매우 반가운 조건이다.
특정 권문세가가 독점한 마을에서는 그 가문의 특성에 맞는 유물이 집중적으로 나온다. 반면 다양한 성씨가 어우러진 마을에서는 유물의 종류가 훨씬 다채롭다. 소형 도자기, 장신구, 농기구, 생활 목기류, 의례용 토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생활 방식을 반영한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홍지동이 바로 그런 성격의 공간이다.

7. 일본인 소유 토지가 남긴 미묘한 흔적
홍지동 136필지 가운데 일본인 소유 토지가 1필지 있었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로는 1%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1필지는 그 자체로 시대의 공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1912년은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지 불과 2년이 된 시점이다. 일본인의 조선 내 토지 소유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됐고, 서울 도심과 근교의 다양한 동네에 그 흔적이 남겨졌다. 홍지동에서 1필지를 소유한 일본인이 누구였는지, 그 땅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홍지동이 당시 이미 외부 변화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었음을 말해준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필지는 시굴 조사 단계에서 특히 주목된다. 근대 일본식 건축의 기초, 이전에 없던 방식의 배수 구조, 혹은 일본식 도기류와 조선 도기류가 한 층에서 섞여 출토되는 근대 전환기 특유의 복합 발굴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이 복잡한 층위가 홍지동 땅속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8.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홍지동

홍지동은 문화재 지표 조사 대상으로 매우 흥미로운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사사지와 소규모 주거지가 공존하며, 국유지·법인 토지·외국인 소유 토지까지 다양한 소유 주체가 혼재한다. 이 구성은 단일한 유형의 유구만 나오는 단순한 발굴 현장이 아니라, 다양한 시기와 성격의 유구가 복합적으로 분포할 가능성을 뜻한다.
특히 밭 비중이 높다는 사실은 지표 조사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경작지는 대규모 건물이나 구조물이 없었기 때문에 땅이 크게 교란되지 않은 채 유지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은 곧, 그 아래 층의 조선 시대 생활면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가장 기대하는 조건 중 하나다.
홍지동 일대에서 개발이나 공사, 지하 굴착이 계획된다면 반드시 문화재 지표 조사와 시굴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개발 사업자나 지자체가 이 절차를 건너뛰면 법적 문제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역사 훼손이 일어난다. 사전 조사에 드는 비용과 시간은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공사 중단, 법적 분쟁, 사회적 비판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다.
문화재 지표 조사는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 시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하지만 의무 대상이 아니더라도, 역사적 잠재성이 높은 지역에서는 자발적 선행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홍지동은 그 잠재성이 분명히 높은 곳이다.
9. 실제 발굴 · 조사 성공 사례가 주는 힌트
성공 사례 — 서울 은평구 진관동 뉴타운 개발 사전 발굴
2006~2009년 은평 뉴타운 개발 과정에서 광범위한 사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당초 "별다른 유구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던 농경지 구역에서, 조선 시대 주거 유구와 경작 유구, 옹기 가마 흔적, 생활 토기 수천 점이 연속으로 출토됐다. 이 발굴은 서울 서북부 지역의 생활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 사전 조사가 없었다면 이 모든 기록은 아파트 기초 공사와 함께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비슷한 유형의 사례는 여럿이다. 처음에는 "별거 없을 것"이라던 땅이, 조사 후 지역의 역사를 완전히 다시 쓰는 공간이 된 경우가 반복됐다. 경작지 비중이 높고, 다양한 성씨가 혼재하며, 사사지와 소규모 주거지가 공존하던 지역, 즉 홍지동과 같은 조건의 동네에서 이런 반전이 자주 일어난다.
성공적인 사전 조사는 단순히 유물을 찾아내는 행위가 아니다. 발굴된 기록은 보고서로 정리되고, 보존 조치가 이루어지며, 전시나 교육 자료로 활용된다. 도시의 기억이 사라지는 대신, 기록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것이다. 그 과정의 첫 시작이 문화재 지표 조사다.
10. 지금 홍지동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

지금의 홍지동은 조용한 주거지 이미지가 강하다. 걸어 다니면 그냥 서울 어느 골목 같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을 알고 나면, 그 골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발아래 어딘가에 그 시절의 밭두렁이 있을 것이고, 담장 기초가 있을 것이고, 우물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삽으로 이 땅을 파기 전에, 누군가는 먼저 물어야 한다. 여기, 지표 조사 했어?
홍지동의 1912년 데이터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것 때문이 아니다. 이 데이터는 현재 진행 중인 혹은 앞으로 계획될 각종 도시 개발 사업에서 어느 지점을 가장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살아 있는 지도다. 특히 밭 비중이 높았던 구역, 사사지 주변, 법인 토지와 국유지가 인접했던 경계 지점은 문화재 발굴 기관의 시각으로 보면 최우선 조사 대상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홍지동을 포함한 종로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정밀 분석해, 향후 문화재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방대한 데이터가 실제 발굴 현장에서 활용되는 순간, 홍지동의 땅속 시간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11. 마음에 남는 한 장면으로 마무리
홍지동은 말이 없다. 1912년의 필지도, 지금의 골목도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그런데 숫자로 남은 기록은 조용히 이야기를 건넨다. 집보다 밭이 많았던 동네. 사람이 땅과 가장 가까웠던 시간. 이씨와 박씨와 김씨가 이웃으로 살아가던 골목. 사사지에서 계절 의례를 올리던 사람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아직 이름이 불리지 않은 유구들이 잠들어 있다.
그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일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고,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줄지를 선택하는 행위다.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 지표 조사는, 결국 사라진 이름들을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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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보다 밭이 많았던 그 동네에서,
사람들은 땅과 함께 살았다.
그 땅이 지금도 여기 있다.
1912년 홍지동의 136필지는 오늘도 조용히 그 사실을 증언한다. 문화재 발굴이란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불러내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흔적을 만날 준비를 하는 일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이 이제 그 준비를 함께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홍지동의 기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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