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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혜화동, 땅으로 읽는 한 동네의 기억

  • 1월 8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1912년 혜화동, 밭과 집 사이에 묻힌 서울의 시간

204필지 · 242,606㎡의 기록 속에서 찾아낸 사람과 땅의 이야기, 문화재 지표 조사로 다시 읽는 대학로의 뿌리

서울헤리티지 발굴조사 리서치팀·종로구 혜화동 지역조사·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지금 대학로의 그 활기, 그 골목의 냄새는


100년 전 혜화동 사람들이 심어놓은 씨앗이었다.

연극을 보러 가고,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고, 골목을 걷는 지금의 혜화동. 그런데 1912년의 기록을 펼치는 순간, 이 동네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204필지, 242,606㎡. 집보다 밭이 더 넓었고, 기도하는 공간이 있었고, 국가가 관리하는 땅이 있었고, 이미 일본인의 흔적까지 들어와 있었다. 이 숫자들을 끝까지 따라가면, 혜화동 골목 어딘가에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과 눈이 마주치게 된다.


목 차

  1. 숫자 뒤에 숨은 혜화동의 얼굴

  2. 집이 많았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유

  3. 밭이 더 넓었던 혜화동, 도시와 농촌의 경계

  4. 사사지와 임야가 말해주는 공간의 성격

  5. 국유지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

  6. 성씨로 보는 혜화동 토지 소유 이야기

  7. 일본인 소유 토지가 던지는 질문

  8. 오늘의 혜화동과 1912년 혜화동이 만나는 지점




1. 숫자 뒤에 숨은 혜화동의 얼굴

1912년 혜화동은 지금 우리가 걷는 그 길과 전혀 다른 숨을 쉬고 있었다. 숫자만 보면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숫자들 하나하나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204필지, 242,606㎡. 이건 단순한 면적 통계가 아니다. 100년도 훨씬 전에 혜화동 사람들이 먹고 살고, 모이고, 쉬고, 기도하고, 땅을 일구며 살았던 시간의 총합이다.

204총 필지 수


(1912년 기준)

242,606㎡혜화동 전체


총 면적

133필지대지(주거) 필지


107,388㎡

1912년이라는 연도는 단순히 지나친 숫자가 아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며 땅의 쓰임새와 소유 관계가 처음으로 문서로 고정되기 시작한 역사의 전환점이다. 혜화동 역시 이 흐름 속에서 기록된 공간이고, 그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 문화재 지표 조사, 시굴 조사를 진행할 때 가장 먼저 꺼내보는 기초 자료가 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바로 이런 기초 데이터를 종로구 전체에 걸쳐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혜화동은 특히 흥미롭다. 산골도 아니고, 순수 농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같은 완전한 도심도 아닌 상태. 말 그대로 사람이 모여 살며 생활의 중심이 형성되어가던, 도시와 자연이 교차하는 경계의 공간이었다. 그 복합적 성격이 1912년의 숫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2. 집이 많았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유

133필지의 대지는 전체 204필지 중 절반을 훌쩍 넘는 비율이다. 혜화동은 분명 '사람이 사는 동네'였다. 단순한 투자용 토지나 농경 전용 지역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자리가 촘촘히 들어서 있던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을까. 혜화동은 지리적으로 여러 조건이 겹쳤다. 성곽과 가까웠고, 종로라는 도심과 연결됐으며, 학교와 관청 같은 공공 시설이 인접한 생활 접근성이 좋은 위치였다. 이 조건들이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들였고, 집이 늘어났고, 동네의 성격이 만들어졌다.



지금 대학로의 활기, 골목골목 남아 있는 주거지의 흔적은 결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이미 1912년에 그 씨앗이 뿌려져 있었다. 대학, 병원, 공연장, 주거지가 한 공간에 섞인 혜화동의 복합적인 분위기는 100년 전에 이미 예고편이 시작된 셈이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런 지역은 '생활 유구의 보고'로 분류된다. 사람이 오래 머문 동네일수록, 땅속에는 일상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다. 우물 터, 담장 기초, 배수로, 생활 토기, 기와편 같은 것들이 층위별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1912년의 133필지 대지는 그 가능성을 숫자로 보여주는 증거다.


3. 밭이 더 넓었던 혜화동, 도시와 농촌의 경계

여기서 잠깐 멈춰야 한다. 1912년 혜화동에서 면적 기준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집이 아니라 밭이었다. 무려 69필지, 132,618㎡. 대지 면적 107,388㎡보다 밭이 더 넓었다는 사실. 이게 혜화동 1912년 데이터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다.

107,388㎡대지(집터) 면적


133필지

132,618㎡밭(전) 면적


69필지

혜화동은 도시이면서 동시에 농촌이었다. 아침엔 밭을 일구고, 저녁엔 집으로 돌아오는 삶. 성곽 안쪽이지만 완전히 도시화되지 않은, 그 경계의 공간. 이런 구조는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서울 근교의 많은 동네가 이와 유사한 이중적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경작지 비중이 높은 지역은 특별 관심 구역으로 분류된다. 농사를 짓는 행위는 땅을 깊이 교란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 아래 층에 조선 시대 생활면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혜화동의 넓은 밭 면적은 그 가능성을 높이는 조건이다.

실제로 서울에서 경작지 비중이 높았던 지역을 발굴한 사례들을 보면,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와 상태의 유구가 발견된 경우가 적지 않다. 혜화동의 69필지 밭은 지표 아래 어딘가에 조선 시대 농경 흔적, 밭두렁 경계, 소규모 창고 터, 관개 시설 흔적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가능성이 문화재 발굴 기관이 이 지역에 주목하는 이유다.



4. 사사지와 임야가 말해주는 공간의 성격

혜화동의 토지 구성은 대지와 밭만이 아니었다. 사사지 1필지 1,186㎡, 임야 1필지 1,411㎡도 기록에 남아 있다. 작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이 두 항목은 혜화동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사사지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다. 사찰이나 사당 같은 시설은 당시 지역 사회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쉬고, 마음을 다스리는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다. 계절 의례, 마을 행사, 공동체의 경조사가 이런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사사지 주변은 기와편, 석재 부재, 소형 불상이나 제기류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항상 특별 관심 구역으로 지정된다.

1,186㎡사사지 1필지


공동체 신앙의 중심

1,411㎡임야 1필지


도시와 자연의 완충지대

임야 1필지는 혜화동이 완전히 평탄한 동네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도시와 자연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던 동네. 이런 지형은 토지 이용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는 조건이기도 하다. 임야와 경작지, 경작지와 주거지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에서는 땅의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고, 그만큼 발굴 성과가 예상을 뛰어넘는 경우도 잦다.

혜화동의 사사지 1필지가 정확히 어느 위치였는지는 현재로서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1912년 지적도와 현재 지형을 교차 분석하면 위치 추정이 가능하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은 이런 작업을 통해 지표 조사 우선 지역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토지 유형 데이터를 핵심 근거로 활용한다.


5. 국유지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

1912년 혜화동에는 국유지가 7필지 있었다. 면적 정보는 정확히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숫자 자체가 이미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혜화동 전체 204필지 가운데 7필지가 국가 소유였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순수한 민간 생활 공간이 아니라 공공적 기능과 얽혀 있었음을 뜻한다.

국유지는 당시 행정, 군사, 공공 기능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성곽 인접 지역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성벽 관리, 수비 관련 시설, 혹은 도로나 하천 관련 공공 부지였을 수 있다. 이런 땅들은 문화재 조사 단계에서 절대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

실제로 서울 도심의 발굴 사례를 보면, 국유지 인근에서 중요한 유구가 발견되는 경우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공공 시설의 기초, 배수로 구조물, 군사 관련 석재 흔적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경향이 있다. 혜화동의 국유지 7필지는 그런 가능성을 품은 구간이다.

국유지라는 항목 하나가 토지 기록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문화재 발굴 기관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단서다. 이 7필지의 위치와 주변 토지와의 관계를 분석하면, 1912년 혜화동의 공간 구조가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된다. 문화재 지표 조사는 바로 이런 분석에서 시작된다.



6. 성씨로 보는 혜화동 토지 소유 이야기

숫자의 층위를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이 보인다. 1912년 혜화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성씨는 이씨였다. 49필지. 그 다음이 김씨 40필지, 홍씨 29필지, 박씨 10필지 순이었다.

49이씨 보유


필지 수

40김씨 보유


필지 수

29홍씨 보유


필지 수

이 숫자는 단순한 소유 현황이 아니다. 당시 혜화동에 어떤 가문이 오래 정착했는지, 어떤 집안이 이 지역을 삶의 기반으로 삼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단서다. 혜화동이 동명으로 쓰이기 전부터, 이미 이씨와 김씨, 홍씨의 집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홍씨 29필지라는 항목은 흥미롭다. 홍씨는 전통적으로 종로 일대에 기반을 둔 가문과 연관이 깊다. 이 성씨들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무덤, 사당, 재실 같은 가문 관련 유구가 함께 발굴될 확률이 높다.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성씨 분포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발굴 전략을 수립하는 데 실질적으로 활용되는 참고 자료다.

이씨 49필지, 김씨 40필지가 각각 얼마나 인접해 있었는지, 특정 구역에 집중돼 있었는지에 따라 생활 유구의 분포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분석이 쌓일수록, 문화재 발굴 기관은 어느 지점에서 먼저 조사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7. 일본인 소유 토지가 던지는 질문



1912년 혜화동에서 일본인 소유 토지는 단 1필지였다. 숫자만 보면 매우 적다. 하지만 이 1필지는 그 상징성이 크다. 이미 이 시기에 외국인, 특히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혜화동 안에서 시작됐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지 불과 2년이 된 1912년. 일본인의 조선 내 토지 소유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혜화동에서 1필지를 소유한 일본인이 누구였는지, 그 땅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혜화동이 외부 변화의 영향권 안으로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말해준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필지는 시굴 조사 단계에서 특별히 주목된다. 근대 건축 방식이 적용된 구조물의 기초, 일본식 도기류와 조선 도기류가 한 층에서 혼재하는 근대 전환기 특유의 복합 발굴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이 복잡한 층위가 혜화동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한 필지가 훗날 어떻게 변했을지, 주변 토지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는 충분히 추적할 가치가 있다. 역사의 전환점은 늘 작은 숫자 하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8. 오늘의 혜화동과 1912년 혜화동이 만나는 지점

지금 혜화동은 젊음의 공간이다. 연극, 공연, 대학, 카페, 골목. 주말이면 사람들이 몰리고, 공연 포스터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 활기 아래에는 밭을 일구던 사람들, 집을 지었던 가족들, 기도하던 공간, 국가가 관리하던 땅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다.

성공 사례 — 서울 종로구 창신동 재개발 구역 발굴

2015년 종로구 창신동 일대 재개발 추진 과정에서 사전 지표 조사와 시굴 조사가 시행됐다. 밭과 소규모 주거지가 혼재하던 이 지역에서, 조선 후기 생활 유구와 기와편, 토기류 수백 점, 소규모 건물지 흔적이 연속으로 확인됐다. 사전 조사 덕분에 유구는 기록·보존됐고, 해당 자료는 종로 지역 생활사 연구의 귀한 기초 자료로 남았다. 초기 지표 조사 한 번이 수백 년의 기억을 살린 사례다.

혜화동은 개발 이야기만 나와도 늘 조심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문화재 발굴, 시굴 조사, 지표 조사가 빠질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204필지의 기록이 말하는 것처럼, 이 동네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시간의 층이다.



혜화동에서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공사나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문화재 지표 조사와 시굴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이것은 규정이기 이전에, 이 동네가 품고 있는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런 맥락에서 혜화동을 포함한 종로구 전역의 1912년 데이터를 분석하고, 문화재 발굴 및 지표 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1912년 종로구 혜화동은 숫자로만 보면 조용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곳은 이미 사람과 삶, 땅과 시간이 치열하게 얽혀 있던 공간이었다. 대지와 밭이 교차하고, 사사지가 공동체를 묶어주고, 국유지가 공공 기능을 담당하고, 다양한 성씨가 이웃을 이루고, 낯선 외국인의 흔적까지 들어와 있던 복합적 생활 공간. 그것이 1912년 혜화동의 진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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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혜화동 골목을 걷는 당신의 발아래,


100년 넘게 이어진 누군가의 하루가


아직 잠들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걷는 순간, 동네는 그냥 동네가 아니라 기억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문화재 발굴이란 사라진 사람들의 하루를 다시 불러내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하루와 만날 준비를 하는 일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이 이제 그 준비를 함께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혜화동의 시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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