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혜화동, 땅으로 읽는 한 동네의 기억
- 서울 HI
- 1월 8일
- 3분 분량
목차
숫자 뒤에 숨은 혜화동의 얼굴
집이 많았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유
밭이 더 넓었던 혜화동, 도시와 농촌의 경계
사사지와 임야가 말해주는 공간의 성격
국유지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
성씨로 보는 혜화동 토지 소유 이야기
일본인 소유 토지가 던지는 질문
오늘의 혜화동과 1912년 혜화동이 만나는 지점
1912년 혜화동은 지금 우리가 걷는 그 길과 전혀 다른 숨을 쉬고 있었어.
숫자만 보면 딱딱해 보이지만, 이 숫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어.
204필지, 242,606㎡.
이건 단순한 면적이 아니라, 100년도 훨씬 전 혜화동 사람들이 먹고 살고, 모이고, 쉬고, 기도하고, 땅을 일구며 살았던 시간의 총합이야.

이 글은 1912년 종로구 혜화동을 ‘땅’이라는 가장 솔직한 기록으로 다시 걷는 이야기야.
천천히 따라와.
1장 숫자 뒤에 숨은 혜화동의 얼굴
1912년 혜화동은 전체 204필지 중 무려 133필지가 집이 있는 대지였어.
면적으로는 107,388㎡.
이 숫자 하나만 봐도 혜화동은 이미 ‘사람이 사는 동네’였다는 걸 알 수 있어.
산골도 아니고, 순수 농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같은 도심도 아닌 상태.
말 그대로 사람이 모여 살며 생활의 중심이 형성되던 공간이었지.
지금 대학로의 활기, 골목골목 남아 있는 주거지의 흔적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야.
이미 1912년에 그 씨앗이 뿌려져 있었던 거야.
2장 집이 많았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유
133필지의 대지는 숫자로만 보면 평범해 보일 수 있어.
하지만 전체 필지의 절반이 훨씬 넘는 비율이라는 게 중요해.
혜화동은 누군가의 ‘투자용 땅’ 이전에, 누군가의 ‘삶의 자리’였어.
학교, 관청, 성곽과 가까웠고, 종로라는 도시의 심장과도 연결돼 있었지.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였고, 집이 늘어났고, 동네의 성격이 만들어졌어.
이 구조는 지금도 이어져.
대학, 병원, 공연장, 주거지가 섞인 혜화동의 복합적인 분위기.
100년 전에도 이미 예고편은 시작된 셈이야.
3장 밭이 더 넓었던 혜화동, 도시와 농촌의 경계
여기서 잠깐 멈춰야 해.
1912년 혜화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건 ‘집’이 아니라 ‘밭’이었어.

무려 69필지, 132,618㎡.
대지 면적보다 밭이 더 넓었다는 사실.
이게 진짜 포인트야.
혜화동은 도시이면서 동시에 농촌이었어.
아침엔 밭을 일구고, 저녁엔 집으로 돌아오는 삶.
성곽 안쪽이지만 완전히 도시화되지 않은, 경계의 공간.
이런 곳은 문화재 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서 항상 중요한 지역으로 분류돼.
왜냐하면 ‘사람이 오래 머문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4장 사사지와 임야가 말해주는 공간의 성격
혜화동에는 사사지도 있었어.
1필지, 1,186㎡.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이건 단순한 땅이 아니야.
사사지는 신앙과 공동체의 기억이 남는 장소야.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쉬고, 마음을 다스리던 공간.

이런 땅은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발굴이나 시굴조사의 핵심 포인트가 되기도 해.
임야도 1필지, 1,411㎡ 존재했어.
산이 많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평탄한 동네도 아니었다는 증거지.
도시와 자연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던 동네.
이런 지형은 토지 이용 변화가 빠르고, 그만큼 유물의 층위도 복잡해져.
5장 국유지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
1912년 혜화동에는 7필지의 국유지가 있었어.
면적 정보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숫자 자체가 중요해.
국유지는 행정, 군사, 공공 기능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
성곽 인접 지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지.
이런 땅들은 문화재 조사 단계에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아.
실제로 서울 도심 발굴 사례를 보면, 국유지 인근에서 중요한 유구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이게 바로 문화재 발굴 성공 사례들이 반복해서 나오는 이유야.
6장 성씨로 보는 혜화동 토지 소유 이야기
1912년 혜화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성씨는 이씨였어.
49필지.
그 다음이 김씨 40필지, 홍씨 29필지, 박씨 10필지.

이 숫자는 단순한 소유 현황이 아니야.
당시 혜화동에 어떤 가문이 오래 정착했는지,
어떤 집안이 이 지역을 기반으로 삶을 이어갔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야.
특정 성씨가 밀집된 지역은
무덤, 사당, 생활유적이 함께 나올 확률이 높아.
그래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도 성씨 분포는 중요한 참고 자료로 쓰여.
7장 일본인 소유 토지가 던지는 질문
1912년 혜화동에서 일본인 소유 토지는 단 1필지였어.
숫자로 보면 아주 적지.
하지만 이 1필지는 상징성이 커.
이미 이 시기에 외국인, 특히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시작됐다는 증거니까.
이 한 필지가 훗날 어떻게 변했을지,
주변 토지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는 충분히 추적할 가치가 있어.
실제 발굴 현장에서도 이런 ‘초기 외국인 소유지’ 인근에서
근대 유구가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8장 오늘의 혜화동과 1912년 혜화동이 만나는 지점
지금 혜화동은 젊음의 공간이야.
연극, 공연, 대학, 카페, 골목.
하지만 그 아래에는
밭을 일구던 사람들,
집을 지었던 가족들,
기도하던 공간,
국가가 관리하던 땅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어.
그래서 혜화동은 개발 이야기만 나와도 늘 조심스러워.
문화재 발굴, 시굴조사, 지표조사가 빠질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어.

이 동네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시간의 층이거든.
1912년 종로구 혜화동은 숫자로만 보면 조용해 보여.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곳은 이미 사람과 삶, 땅과 시간이 치열하게 얽혀 있던 공간이었어.
우리가 오늘 걷는 혜화동 골목 한 줄 아래에는
100년 넘게 이어진 누군가의 하루가 잠들어 있어.
그 사실을 알고 걷는 순간,
동네는 그냥 동네가 아니라
기억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조금은 울컥해지는 장소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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