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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행촌동, 집으로 가득 찬 동네의 숨겨진 시간

  • 1월 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행촌동, 209필지 중 208이 집이었다


숨 돌릴 틈조차 없이 사람이 가득했던 동네, 문화재 지표 조사로 다시 읽는 행촌동의 땅과 시간

서울헤리티지 발굴조사 리서치팀·종로구 행촌동 지역조사·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209필지 중 208이 집이었다.


밭은 딱 한 곳. 446㎡.


이 숫자는 동네가 아니라, 삶이었다.

서울 종로구 행촌동. 지금은 인왕산 자락 아래 조용한 골목이지만, 1912년의 이 동네는 사람 냄새가 가장 진하게 배인 공간 중 하나였다. 집이 집을 잇고, 골목이 골목으로 이어지고, 장작 연기와 하루의 소리가 구석구석 채워졌다. 이 압도적인 주거 밀집의 기록이 오늘 문화재 발굴과 지표 조사에 무슨 신호를 보내는지, 끝까지 따라오면 알게 된다.


목 차

  1. 골목 하나에 집이 빼곡했던 행촌동의 시작

  2. 숫자로 드러나는 1912년 행촌동의 얼굴

  3. 거의 전부가 집이었던 동네, 그 이유

  4. 단 한 필지의 밭이 말해주는 것

  5. 성씨로 본 행촌동의 생활 공동체

  6.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 토지가 남긴 흔적

  7.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행촌동

  8. 실제 문화재 조사 성공 사례가 주는 힌트

  9. 오늘의 행촌동, 그리고 우리가 남겨야 할 선택

  10. 마음에 남는 한 장면



1. 골목 하나에 집이 빼곡했던 행촌동의 시작

지도를 펼쳐보면 행촌동은 종로의 서쪽 끝자락, 인왕산 자락 아래 조용히 붙어 있다. 하지만 1912년의 행촌동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았고, 장작 연기가 피어올랐고, 하루의 소음이 골목마다 흘렀다. 209필지, 55,831㎡. 숫자만 보면 담담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넘쳐난다.

행촌동은 농촌도 아니었고, 완전한 상업지도 아니었다. 그저 '사는 곳' 그 자체였다. 누군가의 밥상이 차려지고, 아이들의 발소리가 골목을 채우고, 이웃이 이웃을 알아보던 생활 공동체. 1912년의 기록은 그 진실을 숫자로 보여준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행촌동 데이터를 종로구 조사의 핵심 사례 중 하나로 분류하는 이유도 바로 이 압도적인 주거 밀집도에 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된 1912년, 행촌동의 땅은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고정됐다. 이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 문화재 지표 조사, 시굴 조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기초 자료가 된다. 지금 행촌동 골목을 걷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발아래 그 기록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숫자로 드러나는 1912년 행촌동의 얼굴

99.5%전체 209필지 중 208필지가 대지(집터)


밭은 단 1필지, 면적 446㎡

1912년 종로구 행촌동의 전체 필지는 209필지였다. 그중 무려 208필지가 대지였다. 면적으로는 55,385㎡. 거의 전부가 집이었다는 뜻이다. 밭은 단 한 필지, 446㎡.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행촌동이 이미 그 시점에서 완성된 생활 중심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209총 필지 수


(1912년 기준)

208필지대지(주거) 필지


55,385㎡

1필지밭(전) 필지


446㎡

사람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지 않았다. 이미 도시의 리듬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웃집 담장과 내 담장이 맞닿고, 골목이 세 걸음이면 끝나고,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는 구조. 이런 밀집 주거지는 문화재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진행할 때 매우 중요한 신호를 보낸다. 땅 아래에는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3. 거의 전부가 집이었던 동네, 그 이유

왜 이렇게 집이 많았을까. 행촌동은 지형적으로도 주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인왕산 자락 아래에 위치하면서도 급경사가 아니었고, 물길과도 멀지 않았다. 종로 도심과의 거리도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생활권 안에 있었다. 이 세 조건이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집이 늘었고, 골목이 생겼고, 또 집이 이어졌다.

1912년 당시 이미 행촌동은 '완성된 동네'에 가까웠다. 새로 자리 잡는 공간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생활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이런 유형의 지역은 재개발이나 공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반드시 문화재 시굴 조사와 표본 조사가 필요하다. 땅 위에 삶이 겹겹이 쌓인 시간이 길수록, 땅 아래 남겨진 흔적도 그만큼 두껍기 때문이다.

주거 밀집도가 높은 지역은 문화재 발굴 기관이 가장 주목하는 유형이다. 집터, 담장 기초, 배수로, 부엌 유구, 우물 터가 연속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고, 다양한 시기의 생활 흔적이 층위별로 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행촌동의 99.5% 대지 비율은 그 가능성을 수치로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다.

서울 도심에서 이 정도의 대지 집중도를 보이는 동네는 흔하지 않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촌동은 문화재 지표 조사 우선 대상 지역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다. 개발과 정비 사업이 논의될 때마다, 이 숫자가 먼저 기억돼야 한다.


4. 단 한 필지의 밭이 말해주는 것

행촌동에 밭은 딱 한 곳뿐이었다. 446㎡. 이 작은 숫자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209필지 중 208이 집이고 오직 하나만 밭이었다는 사실, 이건 완전히 도시화되기 직전의 마지막 흔적일 수도 있고, 집과 집 사이에 남겨진 작은 여백일 수도 있다.

이 밭이 어디 있었는지는 지금으로서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1912년 지적도와 현재 지형을 교차 분석하면 위치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위치가 확인되는 순간, 이 한 필지는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절대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포인트가 된다.



밭 주변에서는 우물, 저장 구덩이, 생활 쓰레기층이 함께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도 이런 소규모 경작지 주변에서 생활 유구가 집중적으로 확인된 사례가 여럿이다. 밭 한 곳이 주거지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 자리가 특별한 이유로 집이 세워지지 않고 유지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표 아래에 무언가가 있어서 집을 짓기 어려웠던 구조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446㎡의 작은 밭은, 행촌동 전체에서 가장 작은 숫자지만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은 공간이다.


5. 성씨로 본 행촌동의 생활 공동체

숫자의 층위를 더 들어가면 사람이 보인다. 1912년 행촌동의 토지 소유 성씨 분포를 보면 이 동네의 성격이 훨씬 선명해진다. 김씨 47필지, 이씨 28필지, 박씨 24필지, 최씨 13필지, 정씨 10필지. 다양한 성씨가 고르게 섞여 있었다.

47김씨 보유


필지 수

28이씨 보유


필지 수

24박씨 보유


필지 수

특정 성씨가 마을 전체를 독점하지 않았다. 여러 가문이 함께 섞여 살았다. 이건 투기 목적의 토지 보유가 아니라, 실제 거주 중심의 소유 구조였다는 뜻이다.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하루를 살았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났고, 우물에서 같은 물을 길었던 사람들의 구조다.

문화재 조사 관점에서 이런 지역은 집터, 담장, 배수로, 부엌 유구가 연속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특정 가문의 저택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생활 공간이 혼재했기 때문에, 출토 유물의 종류도 다채롭다. 소형 도자기, 생활 토기, 장신구, 목제 생활도구, 부뚜막 흔적까지 계층을 넘나드는 생활 밀착형 유물들이 풍부하게 나올 수 있는 조건이다. 발굴 성과가 풍부하게 나올 수 있는 동네의 전형적인 구조다.


6.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 토지가 남긴 흔적



행촌동에는 국유지가 1필지 있었다. 숫자로는 작지만 의미는 크다. 관청 관련 시설, 도로, 혹은 공공 목적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왕산과 종로 도심 사이에 위치한 행촌동에서 국유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단순한 민간 주거지 이상의 공공적 기능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더 눈에 띄는 항목이 있다. 미국인 소유 토지 1필지, 일본인 소유 토지 3필지. 209필지 중 외국인 소유 필지가 4곳이나 됐다. 숫자는 적지만, 이 존재가 담고 있는 시대적 맥락은 결코 가볍지 않다.

1필지미국인 소유


토지

3필지일본인 소유


토지

1912년은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지 2년이 된 시점이다. 동시에 개항 이후 서양인들의 서울 내 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미국인 소유 필지 1곳은 종교 시설 혹은 교육 기관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인 소유 3필지는 근대 건축 방식이 적용된 구조물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품는다. 실제로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외국인 소유 건물 터에서 새로운 건축재료와 시공 방식이 확인된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

이런 필지는 문화재 지표 조사와 시굴 조사에서 항상 특별 관리 대상이 된다. 전통 유구와 근대 유구가 한 층에서 겹쳐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그 복잡한 층위가 발굴 현장을 가장 흥미롭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7.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행촌동

행촌동은 문화재 발굴 기관 입장에서 보면 매우 주목할 만한 지역이다. 대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장기간 주거가 지속됐으며, 성씨 분포가 다양하고, 외국인 소유 토지도 존재한다. 이 네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는 지역은 서울 도심에서도 드물다.



이 조건들은 지표 조사 단계에서 이미 높은 발굴 잠재력을 의미한다. 지표 조사에서 이상 징후가 확인되면 시굴 조사로 이어지고, 시굴 조사에서 유구가 나오면 발굴 조사로 연결된다. 행촌동의 경우 이 세 단계가 자연스럽게 연결될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

실제 발굴 조사로 이어질 경우, 생활사 중심의 유구가 다량 확인될 확률이 높다. 집터, 부뚜막, 배수로, 우물, 담장 기초, 생활 토기가 연속적으로 나오는 도시형 생활 유적의 전형적인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생활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박물관 전시 자료, 역사 교육 콘텐츠, 지역 정체성 구축의 기반이 모두 이런 발굴 성과에서 나온다.


8. 실제 문화재 조사 성공 사례가 주는 힌트

성공 사례 — 서울 종로구 필운동 주거지 발굴

행촌동과 인접한 필운동 일대에서 재개발 사전 조사로 시굴 조사를 진행했을 때, 조사 시작 전에는 "별다른 유구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첫 삽을 뜨자마자 조선 후기 부엌 터, 우물 1기, 담장 기초, 생활 도자기 조각 수백 점이 연속으로 확인됐다. 이 유구들은 기록·보존됐고, 향후 종로 서쪽 주거 생활사를 복원하는 핵심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처음에 "별거 없을 것"이라던 현장이 결국 지역의 기억을 되살린 공간이 됐다.

이런 사례가 반복되는 이유는 하나다. 사람이 오래 산 곳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을 찾아내려면 문화재 지표 조사와 시굴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행촌동처럼 대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오랜 시간 주거가 지속됐고, 다양한 계층이 공존했던 지역일수록, 이 사전 조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문화재 발굴은 우연한 발견이 아니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체계적인 조사 절차가 있을 때만 가능한 작업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1912년의 숫자 하나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9. 오늘의 행촌동, 그리고 우리가 남겨야 할 선택



지금의 행촌동은 많이 달라졌다. 재개발이 진행됐고, 새 건물이 들어섰고, 골목의 생김새가 바뀌었다. 하지만 땅은 기억을 지운 적이 없다. 1912년의 208필지가 쌓아온 시간이 땅 아래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문화재 조사를 왜 해야 하는지, 왜 기록을 남겨야 하는지. 행촌동의 1912년 데이터는 그 질문에 조용히 답한다. 이미 그때부터 이곳은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사람이 오래 산 곳에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개발과 보존의 선택은 달라진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행촌동을 포함한 종로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정밀 분석해, 향후 문화재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데이터가 현장에서 활용되는 순간, 행촌동의 땅속 시간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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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음에 남는 한 장면

209필지 중 208필지가 집이었던 동네. 이 숫자를 다시 떠올린다. 그만큼 많은 삶이 오갔다는 뜻이다. 그 삶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우물 하나, 깨진 도자기 한 조각, 담장 기초의 돌 하나.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모여 하나의 시대를 복원한다.

우리가 그 흔적을 존중할 때, 도시는 더 깊어진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득한 도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기억하는 도시. 그런 도시가 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행동이 문화재 지표 조사이고, 첫 번째 태도가 1912년의 숫자를 진지하게 읽는 것이다.

209필지 중 208이 집이었던 그 동네에서,


누군가는 밥을 지었고,


누군가는 아이를 재웠고,


누군가는 내일을 걱정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 누군가 기록해두어서 다행이었다고. 문화재 발굴이란 사라진 하루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하루들과 만날 준비를 하는 일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이 이제 그 준비를 함께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행촌동의 기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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