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필운동, 땅 위에 남겨진 이름들 - 한 동네의 토지가 말해주는 도시의 기억
- 1월 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필운동, 300필지 전부가 집이었다
논도 밭도 없었던 완전한 주거지, 문화재 지표 조사로 다시 읽는 필운동의 땅과 사람
서울헤리티지 발굴조사 리서치팀·종로구 필운동 지역조사·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300필지. 전부 집이었다.
논도 없고, 밭도 없고, 임야도 없었다.
그냥, 오로지 사람이 살던 땅이었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 지금은 인왕산 자락 아래 조용한 동네지만, 1912년의 이 동네는 서울에서 가장 순수한 주거 공간 중 하나였다. 300필지, 61,058㎡. 그 어디에도 농사짓는 땅 한 뼘이 없었다. 전부 집터였다. 이 사실이 오늘 문화재 발굴과 지표 조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끝까지 따라오면 알게 된다.
목 차
1912년 필운동, 숫자로 시작되는 이야기
모두가 집을 짓고 살던 동네
성씨로 읽는 필운동의 토지 지도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의 의미
필운동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실제 문화재 조사 성공 사례가 주는 힌트
오늘의 필운동,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면

1. 1912년 필운동, 숫자로 시작되는 이야기
1912년의 필운동은 조용한 숫자 속에 숨 쉬는 이야기였다. 300이라는 필지 수, 61,058㎡라는 면적.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한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던 방식과 선택의 결과였다. 지금의 종로를 떠올리면 복잡한 도로와 현대 건물들이 먼저 스쳐 지나가지만, 1912년의 필운동은 '집이 곧 전부였던 동네'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100%1912년 필운동 300필지, 전부 대지(집터)
논·밭·임야 단 한 필지도 없음
1912년 종로구 필운동은 총 300필지, 61,058㎡의 면적을 가진 동네였다. 이 숫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토지의 구성이다. 모든 필지가 대지였다. 논도, 밭도, 임야도, 사사지도 없었다. 이 말은 곧 필운동이 농촌이 아니라 완전히 주거 중심으로 형성된 동네였다는 뜻이다. 이미 이 시기 필운동은 사람이 모여 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고, 생활이 우선인 도시형 마을의 성격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된 1912년, 필운동의 땅은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고정됐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 기록을 종로구 지역조사의 핵심 사례로 분류한다. 300필지 전부가 대지라는 구성은, 서울 도심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 예외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발굴이나 문화재 지표 조사 관점에서 보면 이런 동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적이 단일 지점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층위 속에 넓고 연속적으로 분포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 모두가 집을 짓고 살던 동네
1912년 필운동에 존재한 300필지는 예외 없이 전부 대지였다. 300곳 모두에 집이 있었거나, 집이 지어질 예정인 땅이었다. 이건 흔한 구조가 아니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초반의 서울 도심에서도 이렇게 100퍼센트 주거지로 구성된 동네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동네는 주거지, 농경지, 임야가 혼재하는 복합 구조를 가졌다. 그런데 필운동은 달랐다.
필운동은 관청 중심지도 아니었고, 시장이나 상업 중심지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많은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부엌 자리, 우물 흔적, 담장 기초, 골목의 층위.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이런 생활 유구들은 화려한 유물 못지않게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람이 매일 드나들던 공간의 흔적은, 한 시대의 생활 방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필운동의 300필지가 모두 대지였다는 사실은, 이 동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자급자족을 위한 밭이 없어도 될 만큼, 도시 생활권 안에 완전히 편입되어 있었다.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고, 종로 도심에서 일하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나던 사람들의 동네. 그 선택이 이 100% 대지 구성에 담겨 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은 대지 비율이 높은 지역을 '생활 유구 밀집 가능 구역'으로 분류한다. 농경지는 경작 행위로 인해 땅이 지속적으로 교란되지만, 집터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층위를 유지한다. 300필지 전부가 집터였던 필운동은 그 조건을 최대치로 갖춘 동네다.
3. 성씨로 읽는 필운동의 토지 지도
숫자의 층위를 더 들어가면 사람이 보인다. 1912년 필운동의 토지 소유는 몇몇 성씨를 중심으로 분명한 패턴을 드러낸다. 이 패턴을 읽는 순간, 숫자가 사람의 이야기로 바뀐다.
61김씨 보유
필지 수
44이씨 보유
필지 수
19박씨 보유
필지 수
15최씨 보유
필지 수
14정씨 보유
필지 수
10조씨 보유
필지 수
김씨 61필지, 이씨 44필지, 박씨 19필지, 최씨 15필지, 정씨 14필지, 조씨 10필지. 이 수치는 단순한 소유 현황이 아니다. 동네 안에서 누가 중심이었고, 누가 오래 정착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지표다. 특히 김씨와 이씨의 비중이 높다는 점은, 필운동이 특정 가문이 독점한 거주지가 아니라 여러 가문이 공존하던 열린 생활 공동체였음을 말해준다.
문화재 조사 현장에서 이런 정보는 매우 중요하게 활용된다. 동일 성씨의 필지가 인접해 연속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대규모 가옥군이나 집성촌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구간에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건물지와 부속 시설의 기초가 함께 발굴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성씨가 고르게 섞인 구간에서는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생활 유구가 혼재하며, 그 시대 서울 도심 서민 생활의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는 경향이 있다. 필운동의 성씨 분포 데이터는 발굴 전략을 수립하는 데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4.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가 말해주는 시대
1912년 필운동에는 국유지가 2필지 있었다. 300필지 전체 중 단 2필지라는 수치는, 이 지역이 행정 시설보다는 민간 주거에 철저히 초점이 맞춰진 동네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국유지의 비중이 극히 낮다는 것은, 국가가 이 공간을 직접 관리하기보다 민간의 생활 공간으로 그대로 두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항목이 있다. 외국인 소유 토지다. 미국인 소유 토지 3필지, 일본인 소유 토지 3필지. 합계 6필지. 숫자만 보면 적어 보일 수 있지만, 이 시기 종로 한복판에서 외국인이 토지 6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작은 의미가 아니다.
3필지미국인 소유
토지
3필지일본인 소유
토지
미국인 소유 3필지는 당시 종로 일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선교 기관이나 교육 시설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 미국 선교사들은 서울 도심 곳곳에 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그 과정에서 민간 토지를 취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인 소유 3필지는 한일병합 이후 본격화된 토지 진입의 흔적으로, 근대적 건축 방식이 적용된 구조물의 기초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외국인 소유 토지는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항상 특별 관리 대상이 된다. 전통 한옥 방식과 다른 건축 재료, 배수 구조, 기초 공법이 한 층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있고, 이런 이중적 층위가 발굴 현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발견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필운동의 외국인 소유 토지 6필지는, 이 동네가 완전히 폐쇄적인 전통 주거 공간이 아니라 이미 외부 세계와 연결된 근대 전환기의 복합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문화재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에서 중층적 해석을 요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5. 필운동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필운동은 논이나 밭이 단 한 필지도 없었다는 점에서 이미 특이하다. 이는 개발 이전부터 토지의 변형이 농경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집터는 한 번 자리를 잡으면 그 위에 다음 집이 다시 지어지는 방식으로 반복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아래 층의 구조물 기초는 오히려 보호받는 경우가 많다.
문화재 지표 조사, 시굴 조사, 표본 조사 단계에서 이런 지역은 '생활 유적 밀집 가능 구역'으로 분류된다. 단일 유적이 아니라 여러 층위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실제로 종로 일대의 발굴 사례를 보면, 대지 중심의 동네에서 우물, 배수로, 담장, 주거 흔적이 연속적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반복됐다. 필운동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지역이다.

필운동에서 개발이나 공사가 계획된다면, 반드시 문화재 지표 조사와 시굴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300필지 전부가 집터였다는 1912년의 기록은, 이 동네의 땅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의 삶과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근거다. 그 기록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개발 방식과 보존 선택은 달라진다.
6. 실제 문화재 조사 성공 사례가 주는 힌트
성공 사례 — 서울 종로구 옥인동 주거지 발굴
필운동과 인접한 옥인동 일대에서 재개발 추진 전 시굴 조사가 시행됐을 때, 조사팀은 처음에 유의미한 유구가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첫 삽부터 반전이 시작됐다. 조선 후기 주거지의 담장 기초, 우물 2기, 부엌 터, 그리고 18~19세기 생활 도자기와 기와편 수백 점이 연속으로 확인됐다. 이 유구들은 기록·보존됐고, 종로 서부 지역 생활사 연구의 핵심 자료로 남았다. 사전 지표 조사 한 번이 수백 년의 기억을 건져낸 사례다.
이런 반전이 반복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람이 오래 산 곳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고, 그 흔적은 사전 조사를 통해서만 찾아낼 수 있다. 필운동처럼 300필지 전부가 집터였고, 다양한 성씨가 공존했고, 외국인의 흔적까지 담겨 있는 지역일수록, 이 사전 조사의 의미는 더욱 크다.
문화재 발굴은 우연한 발견이 아니다. 철저한 기초 분석과 체계적인 조사 절차가 있을 때만 가능한 작업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1912년의 토지 기록 한 줄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7. 오늘의 필운동,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면

지금의 필운동을 걷다 보면 조용한 골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인왕산이 가까이 보이고, 담장이 이어지고, 사람 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하지만 그 골목 아래에는 1912년의 300개 집과 300개의 삶이 겹쳐져 있다. 김씨의 마당이 있었고, 이씨의 부엌이 있었고, 박씨의 담장이 이어졌던 공간. 그 사이로 국유지와 외국인의 집이 조심스럽게 섞여 있었다.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파헤치는 행위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다. 필운동은 그 사실을 가장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주는 동네다. 300필지 전부가 집이었다는 이 하나의 사실이, 이 동네를 문화재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의 우선 대상으로 만드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필운동을 포함한 종로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정밀 분석해, 향후 문화재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데이터가 실제 현장에서 활용되는 순간, 필운동의 땅속 시간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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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다음에 필운동 골목을 걸을 때
발걸음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집을 상상하게 되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하루를 떠올리게 된다. 그 순간, 이 동네는 다시 살아난다. 문화재 발굴이란 사라진 하루들을 불러내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하루들과 만날 준비를 하는 일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이 이제 그 준비를 함께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필운동의 기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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