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종로구 평창동, 밭으로 가득했던 산자락의 기억

  • 1월 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평창동, 396필지의 290이 밭이었다

카페도 미술관도 없던 그 시절, 끝없이 이어진 밭과 낮은 숨결의 삶 — 문화재 지표 조사로 다시 읽는 평창동의 땅

서울헤리티지 발굴조사 리서치팀·종로구 평창동 지역조사·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의 평창동을 상상해본 적 있어?


카페도, 미술관도, 고급 주택도 없던 시절.


대신 끝없이 이어진 밭과, 흙 묻은 손으로 돌아오던 사람들이 있었어.

396필지, 671,665㎡. 이 거대한 숫자 속에서 밭이 차지하는 비중은 290필지, 563,414㎡. 평창동은 서울이기 이전에 완전한 농촌이었다. 이 사실이 오늘 문화재 발굴과 지표 조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끝까지 따라오면 알게 된다.


목 차

  1. 숫자로 시작하는 평창동의 첫 장면

  2. 밭이 지배하던 마을, 평창동의 일상

  3. 논과 물길, 그리고 느린 시간

  4. 집이 적었던 이유, 산과 지형의 이야기

  5. 성씨로 읽는 토지 소유의 풍경

  6.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 토지가 남긴 흔적

  7. 문화재 지표조사로 이어지는 평창동의 현재

  8. 기록이 미래가 되는 순간



1. 숫자로 시작하는 평창동의 첫 장면

1912년 종로구 평창동은 총 396필지, 면적은 671,665㎡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상이 잘 안 되는 규모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토지의 성격이다. 이 마을은 주거지보다 농경지에 훨씬 가까웠다. 서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1912년의 평창동은 사실상 농촌이었다.

1912년 평창동 토지 구성

290필지 / 563,414㎡

14필지 / 67,104㎡

대지

78필지 / 27,134㎡

임야

8필지 / 9,388㎡

잡종지

6필지 / 4,624㎡

이 숫자 구성만 봐도 감이 온다. 밭이 전체의 83.8%를 차지하고, 집터는 고작 4%. 사람들이 살던 공간보다 사람들이 일하던 공간이 스무 배 넘게 많았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된 1912년, 평창동의 땅은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고정됐고, 그 문서가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 지표 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 기록을 종로구 조사의 핵심 사례로 분류하고 있다.


2. 밭이 지배하던 마을, 평창동의 일상

290필지전체 396필지 중 밭(전)이 차지하는 수


면적으로는 563,414㎡ — 전체의 83.8%

밭이 전체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평창동은 북악산 자락과 이어진 완만한 경사지였고, 논농사보다 밭농사에 훨씬 유리한 땅이었다. 배추, 무, 콩 같은 작물이 계절마다 자랐을 것이고, 땅의 색도 봄이면 연초록, 가을이면 황토빛으로 바뀌었겠지. 사람들은 해 뜨기 전에 밭으로 나가 해 질 무렵 흙 묻은 손으로 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이런 공간은 문화재 지표 조사를 진행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밭이 많았던 지역은 화려한 유물보다 농경 관련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밭두렁의 흔적, 두엄을 저장하던 구덩이, 농기구를 보관하던 소규모 창고의 기초, 씨앗을 보관하던 항아리 매장 구역 같은 것들이 지표 아래에 조용히 잠들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평창동은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밭 중심의 농경 유적은 주거 유적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다. 조선 후기 서울 근교에서 어떤 방식으로 농사가 이루어졌는지, 어떤 작물이 재배됐는지, 어떤 도구가 사용됐는지를 복원하는 데 평창동의 기록이 핵심 근거가 된다.



3. 논과 물길, 그리고 느린 시간

논은 14필지로 많지 않았다. 67,104㎡라는 면적만 보면 작지 않아 보이지만, 전체 구조 속에서는 분명한 소수다. 이건 물길과 직결된다. 평창동은 안정적인 수리 시설을 갖추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큰 하천이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구조가 아니었고, 논농사에 필요한 일정한 수량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논은 귀했다. 논이 있다는 건 곧 좋은 땅, 혹은 특별히 수리 시설이 갖춰진 공간이라는 의미였다. 14필지의 논을 소유한 사람들은 평창동 안에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논 주변은 지표 조사 단계에서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지점이다. 수로, 둑, 경작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고, 논과 밭의 경계 지점에서는 토지 이용 방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층위가 선명하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계 구간은 문화재 발굴에서 특별히 주목받는 지점이다.

논 14필지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지금으로서 특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1912년 지적도와 현재 지형을 교차 분석하면 물길의 흔적을 따라 위치 추정이 가능하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은 이런 작업을 통해 농경 유구 집중 구역을 선별하고, 지표 조사 우선 지역을 선정하는 근거로 활용한다.


4. 집이 적었던 이유, 산과 지형의 이야기



대지는 78필지, 27,134㎡. 전체 면적 671,665㎡ 대비 4%에 불과한 수치다. 사람들이 살지 않아서가 아니라, 살 수 있는 땅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북악산 자락의 경사지, 밭을 우선으로 하는 토지 이용 방식, 그리고 도성 안쪽과 달리 주거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외곽 지역이라는 조건이 겹쳤다.

집은 꼭 필요한 만큼만 지어졌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쉬고 잠을 자는 최소한의 공간. 화려한 기와집이 아니라, 짚을 얹은 낮은 지붕 아래 소박한 방 몇 칸이 전부였던 집들이 평창동의 78필지를 채우고 있었다. 이런 구조는 주거 유적이 한 지점에 밀집되지 않고 넓은 농경지 사이에 흩어져 나타나는 특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평창동은 시굴 조사나 표본 조사 단계에서 조사 범위 설정이 특히 중요한 지역이다. 일반적인 주거 밀집 지역처럼 한 구역을 집중적으로 파는 방식보다, 농경지 전체에 걸쳐 선형으로 트렌치를 설정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평창동의 지형과 토지 구성이 그런 조사 전략을 요구한다.


5. 성씨로 읽는 토지 소유의 풍경

숫자의 층위를 더 들어가면 사람이 보인다. 1912년 평창동 토지 소유 성씨를 보면 이 마을의 사회 구조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90우씨 보유


필지 수

65김씨 보유


필지 수

52이씨 보유


필지 수

37박씨 보유


필지 수

36현씨 보유


필지 수

22강씨 보유


필지 수

우씨 90필지. 이 숫자가 눈에 띈다. 전체 396필지 중 우씨 한 성씨가 90필지를 소유했다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집성촌 또는 혈연 기반의 대규모 토지 축적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평창동이 우씨 가문의 세거지였거나, 특정 시기에 우씨 집안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씨 65필지, 이씨 52필지, 박씨 37필지, 현씨 36필지, 강씨 22필지, 최씨 12필지, 심씨 11필지, 서씨·송씨 각 10필지. 우씨 다음으로 다양한 성씨들이 촘촘하게 이어진다. 우씨의 집중도와 나머지 성씨들의 고른 분포가 공존하는 이 구조는, 평창동이 한 가문의 완전한 독점 마을도 아니고, 완전히 분산된 개방 마을도 아닌 독특한 중간 구조를 가졌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이런 성씨 집중 지역은 특별한 관심을 받는다. 특정 성씨가 밀집한 구간에서는 가문의 묘역, 사당, 재실 같은 제의 공간의 흔적이 함께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런 성씨 집중 지역에서 공동 묘역이나 조상 제의 공간이 발굴된 사례가 문화재 조사 성공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평창동의 우씨 90필지가 집중된 구간은 그런 가능성을 가장 높게 품은 지점이다.



6.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 토지가 남긴 흔적

국유지는 6필지. 아주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도로 예정지, 행정 목적지, 혹은 공공 수리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국유지 6필지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에 따라, 당시 평창동 안에서 국가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려 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인 소유 토지가 7필지 있었다. 숫자는 작아 보여도, 이건 시대의 공기를 그대로 담은 기록이다. 1912년, 한일병합 2년 차. 일본인의 조선 내 토지 소유가 본격화되던 시점에 평창동 외곽 지역에까지 일본인 소유 필지가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이 결코 외부와 단절된 폐쇄 공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6필지국유지


공공 목적 부지

7필지일본인 소유


토지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 이런 필지를 별도로 체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개발 압력이 먼저 작용한 땅일수록 지하 유구의 훼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인 소유 토지는 근대 건축 방식이 적용된 구조물의 기초가 남아 있을 수 있고, 국유지는 도로나 수리 시설 관련 석재 구조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필지들은 지표 조사 단계에서 가장 먼저 확인이 필요한 구간이다.

그래서 평창동은 문화재 지표 조사 단계부터 굉장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지역이다. 밭 중심의 농경 유구, 집성촌 가능성을 가진 주거 유구,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 토지의 근대 유구가 한 지역 안에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이 세 층위가 겹치는 공간이 바로 평창동이다.


7. 문화재 지표조사로 이어지는 평창동의 현재



지금의 평창동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카페, 갤러리, 고급 주거지, 외국 대사관. 1912년의 그 밭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조차 어렵다. 하지만 땅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 밭이 많았던 곳은 여전히 지층이 깊고, 생활과 농경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래서 평창동에서 재개발, 건축, 도로 공사가 계획된다면 반드시 문화재 지표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이건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1912년의 390여 필지가 쌓아온 시간, 그 기억을 지키는 최소한의 예의다. 밭두렁 하나, 우물 흔적 하나가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여기, 지표 조사 했어?

성공 사례 — 서울 북한산 자락 농경 유적 발굴

2014년 북한산 인접 지역의 도로 공사 사전 조사에서, 예상을 뒤집는 발굴 성과가 나왔다. 조선 후기 논·밭 경계 흔적, 수로 기초 석재, 농기구 파편, 옹기 저장 구덩이가 연속으로 확인됐다. 처음에는 단순한 농경지로 분류됐던 구역이, 발굴 후 조선 시대 서울 근교 농업 방식을 복원하는 핵심 자료가 됐다. 사전 지표 조사가 없었다면 도로 공사로 모두 사라졌을 기록이었다.


8. 기록이 미래가 되는 순간



1912년의 숫자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숫자들은 지금 우리가 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조용히 묻고 있다. 396필지 중 290이 밭이었던 동네. 서울도 한때는 이렇게 흙 냄새 나는 농촌이었고, 사람들은 땅과 함께 숨 쉬며 살았다.

이 사실을 알고 걷는 사람과 모르고 걷는 사람 사이에서, 도시를 대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 지표 조사는, 결국 그 앎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일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평창동을 포함한 종로구 전역의 1912년 기록을 분석하고 기초 자료로 정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이 기록을 끝까지 읽은 당신도 이제 그 기억의 일부가 됐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다음 발굴로, 다음 이야기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문화재 발굴 · 지표 조사 · 서울 문화유산에 관심이 생겼다면 seoulheritage.org에서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직접 확인해보세요.

해 뜨기 전 밭으로 나가,


해 질 무렵 흙 묻은 손으로 돌아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밟았던 땅이


지금도 여기 있다.

290필지의 밭, 14필지의 논, 78필지의 집. 이 숫자들이 쌓은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문화재 발굴이란 그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기억과 만날 준비를 하는 일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이 이제 그 준비를 함께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평창동의 시간은 계속된다.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