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평동, 107필지에 숨겨진 시간의 결
-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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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4월 27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평동, 이 작은 동네에 독일·미국·프랑스·일본인이 살았다
107필지 안에 담긴 국제 도시 서울의 민낯, 문화재 지표 조사로 다시 읽는 평동의 땅과 사람
서울헤리티지 발굴조사 리서치팀·종로구 평동 지역조사·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이 작은 107필지 안에
독일인, 미국인, 프랑스인, 일본인이 함께 살았다.
종로구 평동. 지도에서 사라진 이름이지만, 땅은 기억한다.
전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한옥 지붕 너머로 연기가 오르던 서울의 어느 아침. 그 한복판에 평동이 있었다. 40,301㎡, 107필지. 이 숫자 안에 조선인 가옥, 외국인 거주지, 국유지, 그리고 곧 사라질 밭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평동이라는 이름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가 된다.
목 차
평범한 골목에 감춰진 1912년의 충격적인 진실
숫자로 드러난 1912년 종로구 평동의 풍경
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 평동의 일상
밭과 국유지가 말해주는 도시의 경계
성씨 분포로 읽는 평동 사람들의 이야기
외국인 소유 토지가 보여주는 국제 도시 서울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평동의 가치
실제 발굴 성공 사례로 본 평동의 가능성
지금 우리가 평동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

1. 평범한 골목에 감춰진 1912년의 충격적인 진실
1912년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어떤 풍경이 떠오를까. 전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한옥 지붕 너머로 연기가 오르던 서울의 어느 아침. 그 한복판에 있던 곳이 바로 종로구 평동이다. 지금은 지도에서도 이름이 희미해졌지만, 이 작은 동네는 당시 서울의 변화와 긴장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1912년 종로구 평동은 총 107필지, 면적은 40,301㎡였다.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107필지 안에 담긴 정보는 웬만한 도시 하나 분량이다. 도시화, 식민지 행정, 외국인 토지 소유, 그리고 이후 문화재 발굴 가능성까지. 평동은 조용했지만 절대 단순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평동을 종로구 지역조사의 주목 사례로 분류하는 이유도 바로 이 복합성에 있다. 주거 밀집과 외국인 토지 공존, 그 두 조건이 한 동네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는 서울 도심에서도 흔치 않다.
2. 숫자로 드러난 1912년 종로구 평동의 풍경
96.3%전체 107필지 중 103필지가 대지(집터)
밭 4필지 · 국유지 1필지만 존재
1912년 평동의 토지 구성은 아주 선명하다. 전체 107필지 중 무려 103필지가 대지였다. 면적으로는 39,289㎡. 거의 모든 땅 위에 집이 들어서 있었다는 뜻이다. 밭은 단 4필지, 1,011㎡뿐이었고, 국유지가 1필지 존재했다. 이 숫자 구성 하나만으로도 평동이 이미 '완성된 도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7총 필지 수
(1912년 기준)
103필지대지(주거) 필지
39,289㎡
4필지밭(전) 필지
1,011㎡
96.3%라는 대지 비율. 이는 앞서 살펴본 행촌동(99.5%), 필운동(100%)과 함께 종로구 서쪽 지역이 이미 1912년에 고밀도 주거 공간으로 완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다. 평동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농사를 짓거나 자급자족하는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3. 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 평동의 일상
집이 103필지라는 건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이곳은 주거 밀도가 매우 높은 동네였고, 생활의 흔적이 땅 아래에 겹겹이 쌓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우물, 배수로, 담장 기초, 생활 유물.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가장 자주 확인되는 요소들이 바로 이런 고밀도 주거지에서 나온다.
평동의 집 한 채 한 채는 저마다 다른 삶을 담고 있었다. 이씨 가문의 대청마루, 김씨의 부엌 아궁이, 골목 모퉁이의 공동 우물. 이 모든 것이 땅 아래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 지표 조사 대상지로서 평동이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주거 밀집도가 높고 오랜 시간 지속된 생활권은 문화재 발굴에서 '생활 유구 집중 구역'으로 분류된다. 단순한 건물 기초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이 층위별로 기록되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평동의 103필지 집터는 그 가능성을 숫자로 증명한다.
4. 밭과 국유지가 말해주는 도시의 경계
밭이 단 4필지라는 사실은 평동이 농촌에서 도시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아니라 이미 도시였다는 증거다. 밭 1,011㎡는 전체 40,301㎡의 2.5%에 불과하다. 이 작은 밭이 어디 있었는지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집과 집 사이에 남겨진 마지막 농경 여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국유지 1필지도 흥미로운 단서다. 행정 목적이나 공공시설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 종로 도심이라는 위치를 고려하면 도로 부지, 관청 관련 부속지, 혹은 공공 수리 시설 부지였을 수 있다. 이런 국유지 주변은 이후 도로 정비나 시설 확장 과정에서 지층이 교란됐을 가능성도 있다. 문화재 시굴 조사나 표본 조사를 진행할 때 반드시 체크해야 할 포인트다.
밭 4필지와 국유지 1필지는 숫자로는 작지만, 그 배치와 위치가 확인되는 순간 평동의 공간 구조가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된다. 집이 가득한 도심 속에 이 두 항목이 왜 남아 있었는지를 역추적하는 과정 자체가 문화재 지표 조사의 핵심 작업 중 하나다.
5. 성씨 분포로 읽는 평동 사람들의 이야기

숫자의 층위를 더 들어가면 사람이 보인다. 1912년 평동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성씨는 이씨였다. 19필지. 그 다음이 김씨로 14필지. 이 두 성씨가 전체 107필지 중 33필지, 약 30%를 차지했다.
19필지이씨 보유
가장 많은 필지 수
14필지김씨 보유
두 번째 필지 수
이 숫자는 단순한 소유 기록이 아니다. 누가 이 동네의 중심이었는지, 어떤 가문이 오래 정착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단서다. 이씨 19필지가 한 구역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대규모 가옥군의 흔적일 수 있고, 분산되어 있었다면 임대를 통한 수익 추구의 방식이었을 수 있다. 이런 성씨 분포는 발굴 조사 이후 역사적 해석 단계에서 마을 구조를 복원하는 핵심 근거로 활용된다.
대대로 거주한 토착 가문일 수도 있고, 근대적 토지 거래의 결과로 자리를 잡은 신흥 지주였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씨와 김씨의 존재는 평동의 땅속에 남겨진 유구를 해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배경이 된다.
6. 외국인 소유 토지가 보여주는 국제 도시 서울
평동이 다른 동네들과 가장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이 여기서 나온다. 1912년 기준, 평동에는 독일인 소유 토지 1필지, 미국인 소유 토지 2필지, 프랑스인 소유 토지 1필지, 일본인 소유 토지 6필지가 있었다. 합계 외국인 소유 토지 10필지.
🇩🇪1필지독일인
소유 토지
🇺🇸2필지미국인
소유 토지
🇫🇷1필지프랑스인
소유 토지
🇯🇵6필지일본인
소유 토지
이 작은 동네에 네 나라 국적의 토지가 한꺼번에 공존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건 서울이 이미 국제 도시로 편입되고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다. 독일인 1필지는 당시 서울에 체류하던 외교관이나 상인 관련 거주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인 2필지는 선교사나 외교 관련 인사의 주택이었을 수 있다. 프랑스인 1필지는 가톨릭 선교 관련 기관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 소유 토지 6필지는 숫자로도 가장 많고, 이후 도시 구조 변화와 가장 강하게 연결된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의 서울 내 토지 소유가 급격히 확산됐고, 평동의 6필지는 그 흐름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외국인 소유 토지는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항상 특별 관심 대상이 된다. 서양식 건축 재료, 다른 방식의 기초 공법, 낯선 생활용품이 한 층에서 조선 유물과 함께 나오는 근대 전환기 특유의 복합 발굴 상황이 이런 필지에서 연출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미국·프랑스·일본인 토지 10필지가 공존했던 평동은, 그런 복합 층위가 가장 다채롭게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가졌다.

7.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평동의 가치
이런 조건들을 종합하면 평동은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첫째, 주거 밀집도가 96.3%로 압도적이다. 둘째, 네 나라 외국인 토지가 공존한다. 셋째, 국유지가 존재한다. 넷째, 도시 초기 기반 시설의 가능성이 있다. 이 네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는 동네는 서울 도심에서도 드물다.
실제로 비슷한 조건의 종로 일대에서는 조선 후기 생활 유구, 근대 배수 시설, 일제강점기 건축 흔적이 다수 확인됐다. 평동 역시 조사만 진행된다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 특히 외국인 소유 토지 10필지의 위치와 인접 조선인 토지와의 경계 구간은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가장 먼저 확인이 필요한 구간이다.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로 본 평동의 가능성
성공 사례 — 서울 종로구 신문로 일대 도심 발굴
평동과 인접한 신문로 일대 재개발 구역에서 진행된 사전 발굴 조사에서, 조사팀은 처음에 근대 건물 기초만 확인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 발굴에서는 조선 후기 주거 유구와 근대 서양식 건물 기초가 한 공간에 겹쳐 나타났다. 두 시대의 건축 방식이 충돌하는 층위에서 다채로운 유물이 쏟아졌고, 이 현장은 근대 전환기 서울의 도시 변화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됐다. 외국인 토지와 조선인 토지가 맞닿은 경계 구간일수록 이런 복합 발굴의 가능성이 높다.
평동은 그보다 더 많은 나라의 토지가, 더 촘촘하게 얽혀 있던 공간이다. 독일·미국·프랑스·일본인 토지가 조선인 가옥들과 뒤섞인 그 경계들 하나하나가, 발굴 현장에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지역의 문화재 발굴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에 가깝다.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평동의 조건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쉽게 동의하게 된다.
9. 지금 우리가 평동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

평동은 사라진 동네가 아니다. 기억에서 잠시 멀어졌을 뿐이다. 1912년의 토지 한 필지 한 필지는 지금도 땅 아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귀 기울이기만 한다면 들을 수 있다.
도시는 계속 변하지만, 기록과 흔적은 남는다. 평동을 다시 읽는 일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일과 같다. 107필지라는 작은 숫자 안에 조선인의 생활, 외국인의 거주, 국가의 관리, 그리고 시대의 전환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문화재 발굴과 지표 조사의 출발점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평동을 포함한 종로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정밀 분석하고, 향후 문화재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데이터가 현장에서 활용되는 순간, 평동의 다국적 층위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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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나서,
지도에서 평동이라는 이름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 순간, 이미 당신은 과거와 연결된 거다.
도시는 기억하는 사람에게만 과거를 보여준다. 독일인, 미국인, 프랑스인, 일본인, 그리고 수많은 조선인이 한 골목에서 하루를 보냈던 그 땅. 오늘, 평동은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문화재 발굴이란 그 말을 듣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말을 들을 준비를 하는 일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이 이제 그 대화의 일부가 됐다. 평동의 기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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