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팔판동, 166필지에 숨겨진 골목의 기억
- 1월 6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팔판동, 166필지 전부가 집이었다
논도 밭도 없이 오직 사람만 살던 동네 — 김씨 29필지, 이씨 29필지, 그리고 일본인 · 중국인까지 공존했던 경복궁 옆 골목의 진짜 이야기
서울헤리티지 발굴조사 리서치팀·종로구 팔판동 지역조사·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골목마다 담장이 이어지고,
마당에선 장독대가 햇빛을 받던 동네.
그 골목 아래, 아직 꺼내지 않은 시간이 잠들어 있다.
1912년 종로구 팔판동. 166필지, 34,264㎡. 이 숫자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골목마다 사람이 살았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이들 발소리가 울리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놀라운 건 따로 있다. 166필지 전부가 집이었다. 논도, 밭도, 임야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일본인 7필지, 중국인 1필지가 섞여 있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팔판동 골목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목 차
숫자 하나로 시작되는 이야기, 팔판동
모두가 집이었던 동네
국유지 2필지가 말해주는 시대의 공기
김씨와 이씨가 나란히 많았던 이유
일본인과 중국인 소유 토지가 남긴 흔적
팔판동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발굴 조사가 시작되면 보이는 것들
성공 사례로 보는 팔판동의 가능성
우리가 이 기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1. 숫자 하나로 시작되는 이야기, 팔판동
1912년 종로구 팔판동은 숫자만 보면 아주 단순해 보인다. 166필지, 34,264㎡. 하지만 이 숫자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골목마다 사람이 살았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이들 발소리가 울리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글은 딱딱한 토지조사표를 사람 사는 이야기로 바꾸는 기록이다. 지금 우리가 걷는 그 길 아래, 어떤 시간이 묻혀 있는지 함께 내려가 보자.
팔판동은 지금의 경복궁 서쪽 자락, 자하문로 인근에 위치한 작은 동네다. 조선 시대부터 양반 가문과 중인 계층이 어우러져 살던 이 지역은, 1912년 당시 이미 서울 도심의 핵심 주거 공간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된 이 시점에 기록된 팔판동의 데이터는,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 지표 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초 자료가 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팔판동을 종로구 지역조사의 주목 사례로 분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 모두가 집이었던 동네
100%1912년 팔판동 166필지, 전부 대지(집터)
논 · 밭 · 임야 단 한 필지도 없음 (국유지 2필지 제외)
팔판동의 가장 큰 특징은 단 하나다. 모든 필지가 대지였다는 것. 1912년 기준으로 팔판동에는 166필지 전부가 집터였다. 논도 없고, 밭도 없고, 임야도 없었다. 이 말은 곧, 이 동네는 잠시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완전히 정착된 생활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골목마다 담장이 이어지고,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고, 마당에서는 장독대가 햇빛을 받고 있었겠지. 대문을 두드리면 인기척이 들리고, 이웃집 밥 냄새가 골목을 타고 흐르던 동네. 이미 살펴본 필운동(100%), 행촌동(99.5%)과 함께 팔판동은 종로 일대 서쪽 지역이 1912년 당시 얼마나 철저하게 주거 공간으로 완성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문화재 지표 조사를 할 때 이런 동네는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지표 아래에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다. 100% 대지 구성이라는 조건은, 사람이 오래 머문 만큼 흔적도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3. 국유지 2필지가 말해주는 시대의 공기
팔판동에는 국유지가 2필지 있었다.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이 2필지는 굉장히 중요한 단서다. 대개 이런 국유지는 도로, 공공시설, 혹은 행정 관련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팔판동은 이미 행정 체계 안에 편입된 공간이었고, 국가의 관리가 직접 미치던 지역이었다는 의미다.
경복궁과 인접한 위치를 고려하면 이 국유지의 성격이 더욱 흥미로워진다. 궁 관련 부속 부지, 군사 목적의 공간, 혹은 도성 관리를 위한 행정 시설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용도였든 간에, 이런 공적 기능을 가진 공간은 문화재 발굴 조사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지점이다. 과거의 공적 시설 흔적이 지표 아래 남아 있을 확률이 높고, 그 흔적이 주변 민간 주거 유구와 복합적으로 엮여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4. 김씨와 이씨가 나란히 많았던 이유
팔판동의 소유 성씨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김씨 29필지, 이씨 29필지. 완벽하게 같은 숫자다. 이건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팔판동 최다 소유 성씨 — 완벽한 동수
29필지김씨
=
29필지이씨
당시 종로 일대는 오래 정착한 양반 가문과 중인 계층이 섞여 살던 지역이었다. 특정 성씨가 집중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구조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됐다. 김씨 29필지, 이씨 29필지의 완벽한 균형은 어느 한 가문이 이 동네를 독점하지 않고, 두 가문이 팽팽한 무게로 공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박씨 17필지가 더해지면서, 팔판동은 전통적인 서울 토착 가문 중심의 주거지였다는 그림이 완성된다.
이런 구조는 문화재 시굴 조사나 표본 조사 단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된다. 장기간 거주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같은 가문이 수대에 걸쳐 같은 필지를 소유했다면, 그 땅 아래에는 한 가문의 생활 방식이 층위별로 쌓인 특별한 발굴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29김씨 보유
필지 수
29이씨 보유
필지 수
17박씨 보유
필지 수
5. 일본인과 중국인 소유 토지가 남긴 흔적

팔판동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7필지 있었고, 중국인 소유 토지는 1필지 있었다. 숫자는 크지 않지만, 이건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아주 명확한 흔적이다. 1912년은 이미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다. 외국인 소유 토지가 있다는 건, 이 골목 어딘가에 상점이나 사무 공간, 혹은 임대용 주택이 있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
7필지일본인 소유 토지
🇨🇳
1필지중국인 소유 토지
특히 중국인 소유 토지 1필지는 흥미롭다. 앞서 살펴본 평동(독일·미국·프랑스·일본인)과는 다른 구성이다. 팔판동의 중국인 소유 1필지는 당시 서울에 체류하던 화교 상인이나 청나라 외교 관련 인사와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1필지가 어느 위치였는지에 따라, 발굴 시 전혀 다른 성격의 유물이 나올 수 있다.
일본인 7필지와 중국인 1필지는 팔판동이 단순한 전통 주거지가 아니라, 변화의 경계에 있던 동네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이런 필지는 특히 주목해야 한다. 전통 한옥 구조와 다른 건축 기법, 생활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 유물과 근대 유물이 한 층에서 공존하는, 그 복잡하고 흥미로운 발굴 현장이 팔판동에서 연출될 수 있다.
6. 팔판동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이 동네는 조건이 너무 좋다. 전 필지가 대지, 장기간 주거, 외국인 소유 토지 혼재. 이 세 가지가 동시에 갖춰진 곳은 문화재 지표 조사 대상지로서 최상급의 조건이다. 지표 조사 단계에서 생활 유물 산포 가능성이 높고, 시굴 조사로 이어질 확률도 크다. 특히 조선 후기부터 근대 초기까지의 도시 생활사를 복원하기에 딱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경복궁과 인접한 위치도 중요한 변수다. 궁 주변 지역은 조선 시대부터 서울의 핵심 생활권이었고, 다층적인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조선 전기, 중기, 후기,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초기의 층위가 팔판동 땅 아래에 연속적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연속성이 문화재 발굴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조건이다.
7. 발굴 조사가 시작되면 보이는 것들
만약 팔판동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어떤 것들이 나올까. 우물 자리, 배수로, 기단석, 부엌 흔적, 도자기 파편, 생활 쓰레기층.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사람의 하루를 복원하는 재료다.
우물 하나가 나오면 그 주변으로 공동체의 생활 반경이 그려진다. 배수로가 나오면 골목의 방향과 구조가 복원된다. 기단석이 나오면 건물의 규모와 성격이 드러난다. 부엌 흔적이 나오면 그 집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살았는지가 보인다. 이 모든 것이 겹쳐지면, 1912년의 팔판동 골목 하나가 다시 살아난다.
팔판동 같은 동네는 조사 한 번으로 끝내면 안 된다. 단계별 조사, 기록, 보존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표 조사에서 시굴 조사로, 시굴 조사에서 발굴 조사로, 그 모든 단계가 촘촘하게 이어질 때 비로소 이 동네의 시간이 완전하게 복원된다.
8. 성공 사례로 보는 팔판동의 가능성

성공 사례 — 서울 종로구 통인동 도심 발굴
팔판동과 인접한 통인동 일대에서 재개발 사전 조사로 발굴이 진행됐을 때, 조선 후기 도시형 한옥 구조가 거의 원형에 가깝게 확인됐다. 우물 2기, 배수로, 기단석, 생활 도자기 수백 점이 연속 출토됐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조선 시대 생활면 위에 근대 일식 건물 기초가 겹쳐 나타나, 두 시대의 층위가 한 공간에서 선명하게 확인됐다. 이 발굴 성과는 경복궁 서쪽 지역 생활사 복원의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팔판동은 통인동과 같은 지층 조건을 가진 인접 지역이다.
실제로 종로 일대에서는 이런 구조의 동네에서 의미 있는 성과가 반복적으로 나왔다. 생활 유구가 확인되고, 도시형 한옥 구조가 복원된 사례도 있고, 이후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한 곳도 있다. 팔판동 역시 충분히 그런 가능성을 가진 지역이다. 조사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개발과 보존이 함께 갈 수 있다. 이게 바로 문화재 발굴 조사의 진짜 가치다.
9. 우리가 이 기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팔판동은 지도에서 보면 작은 동네다. 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사람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공간이다. 1912년의 숫자는 과거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는 게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김씨 29필지, 이씨 29필지가 나란히 공존하던 골목. 일본인 7필지와 중국인 1필지가 조선인 가옥들 사이에 섞여 있던 경계. 국유지 2필지가 행정의 흔적을 남기던 구간. 이 모든 층위가 팔판동 땅 아래에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골목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순간, 도시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로 변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팔판동을 포함한 종로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정밀 분석해, 향후 문화재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데이터가 현장에서 활용되는 순간, 팔판동의 겹쳐진 시간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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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끝까지 읽은 당신,
이미 팔판동의 시간과 연결됐다.
그걸 느끼는 순간, 이 글을 읽은 의미는 충분하다.
도시는 기억하는 사람에게만 과거를 보여준다. 김씨와 이씨가 29필지씩 나란히 살던 골목, 일본인과 중국인의 집이 조선인 담장과 맞닿아 있던 그 경계. 오늘, 팔판동은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문화재 발굴이란 그 말을 듣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말을 들을 준비를 하는 일이다. 팔판동의 기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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