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통인동, 필지 위에 새겨진 삶의 흔적들
- 1월 5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7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통인동, 161필지 전부가 집 — 파면 뭐라도 나오는 동네
궁궐 옆 골목에 겹겹이 쌓인 시간,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문화재 지표 조사로 다시 읽는 통인동의 땅과 사람
서울헤리티지 발굴조사 리서치팀·종로구 통인동 지역조사·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문화유산
1912년 통인동은 그냥 땅이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이 살았고, 숨 쉬었고,
하루를 버텨냈던 시간의 무대였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은 단순한 숫자를 보는 게 아니라 100년도 넘은 골목을 직접 걷게 된다. 161필지, 43,590㎡. 논도 없고 밭도 없고 임야도 없었다. 전부 집이었다. 궁궐 바로 옆, 상인과 관리와 장인이 어울려 살던 그 골목 아래 — 조선 후기,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초기의 시간이 지금도 겹겹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이 동네를 '파면 뭐라도 나오는 곳'으로 분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목 차
첫 장면, 1912년 통인동에 발을 들이다
숫자로 읽는 통인동의 풍경
집이 곧 삶이던 시절의 통인동
국유지 4필지가 말해주는 국가의 그림자
성씨로 보는 토지 소유의 구조
통인동 토지 구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힌트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 통인동이 중요한 이유
성공 사례로 보는 통인동형 문화재 발굴의 가치
개발과 보존 사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방향
시간을 품은 동네, 통인동에서 남기는 마음

1. 첫 장면, 1912년 통인동에 발을 들이다
1912년. 조선이 사라지고 식민지 행정이 본격화되던 시기. 종로구 통인동은 이미 하나의 완성된 마을이었다. 총 161필지, 면적은 43,590㎡.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담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밀도 높은 주거지였다. 이 숫자 하나만 봐도 느껴진다. 통인동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는 사실이.
통인동은 경복궁 서쪽 담장 바로 옆에 붙은 동네다. 조선 시대부터 궁과 관청에 인접한 이 위치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상인, 기술자, 하급 관료, 장인. 그들이 살고 일하던 골목이 1912년의 토지 기록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통인동을 종로구 지역조사의 핵심 사례로 분류하는 것도 이 복합적 성격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 조사와 문화재 발굴. 통인동은 이 두 단어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동네다. 이미 1912년 기록만 봐도, 여기는 생활 유적이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2. 숫자로 읽는 통인동의 풍경
100%1912년 통인동 161필지, 전부 대지(집터)
논 · 밭 · 임야 단 한 필지도 없음 (국유지 4필지 제외)
1912년 종로구 통인동의 토지 구성은 단순했다. 161필지 전부가 대지였다. 집이 없는 땅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논도 없다. 밭도 없다. 임야도 없다. 이 말은 곧 통인동이 이미 도시형 주거지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는 증거다.
161총 필지 수
(1912년 기준)
43,590㎡통인동 전체
총 면적
4필지국유지
공공 목적 부지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 이런 지역을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생활 흔적이 집중적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물, 담장, 배수로, 기단, 기와 조각. 지표 조사 단계에서 이런 유구가 나올 확률이 상당히 높다. 통인동은 그만큼 '파면 뭐라도 나오는' 구조다.

3. 집이 곧 삶이던 시절의 통인동
161필지. 161개의 집. 여기서 중요한 건 규모보다 밀도다. 통인동은 궁궐과 가깝고, 행정 중심지와도 인접했다. 이 위치는 단순히 주거 공간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이 생업을 이어가며 살아가는 생활 생태계를 형성했다.
통인동 땅속에 쌓인 시간의 층위
조선 후기양반·중인·상인 혼재 주거지, 기와집·초가 공존, 생활 도자기·토기 층위
대한제국기근대 도시 행정 편입, 도로 정비, 새로운 건축 재료 유입 시작
일제강점 초기1912년 토지조사사업, 외래 건축 기법 혼입, 일본인 토지 소유 시작
이런 동네일수록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생활 유적의 층위가 복잡하게 나타난다. 조선 후기, 대한제국기, 일제강점 초기. 통인동은 이 모든 시간을 그대로 안고 있다. 그래서 발굴이 더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기도 하고, 그만큼 발굴 성과가 풍부할 가능성이 큰 곳이기도 하다.
4. 국유지 4필지가 말해주는 국가의 그림자
1912년 통인동에는 4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숫자로 보면 적어 보이지만,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국유지는 보통 관청, 공공시설, 혹은 향후 행정 활용을 염두에 둔 땅이다. 이 땅들은 주변 민간 필지와 다른 성격을 가진다.
통인동에서 국유지 4필지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1912년 지적도와 현재 지형의 교차 분석을 통해 추적이 가능하다. 경복궁과의 인접성을 고려하면, 이 국유지들이 궁 관련 부속 시설이나 군사 목적 공간, 혹은 행정 도로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용도였든 간에, 이런 국유지 인근은 종종 핵심 발굴 포인트가 된다. 이전 시대의 관영 시설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국유지 인근은 반드시 정밀 조사가 필요한 구간이다. 공적 기능을 가진 공간일수록 구조물이 견고하게 지어졌고, 그 기초 흔적이 지표 아래에 더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통인동의 국유지 4필지는 그런 가능성을 품은 구간이다.
5. 성씨로 보는 토지 소유의 구조

1912년 통인동 토지 소유는 특정 성씨에 집중되어 있었다. 김씨 28필지, 이씨 22필지, 박씨 12필지. 이 세 성씨가 전체 161필지 중 62필지, 약 38%를 차지했다.
28김씨 보유
필지 수
22이씨 보유
필지 수
12박씨 보유
필지 수
이건 우연이 아니다. 대대로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가문이 있었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에서 이런 정보는 매우 중요하게 활용된다. 동일 성씨 소유 필지가 연속될 경우, 대규모 가옥군이나 집성촌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기와 문양, 담장 구조, 우물 위치가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팔판동의 김씨=이씨 29필지 완벽 동수와 달리, 통인동은 김씨가 이씨보다 6필지 앞선다. 이 미묘한 차이가 두 동네의 사회 구조를 다르게 읽게 만드는 단서가 된다. 통인동에서 김씨 가문의 영향력이 조금 더 강했을 가능성, 혹은 김씨가 더 오랜 시간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해석이 발굴 조사 이후 마을 구조 복원 단계에서 핵심 근거가 된다.
6. 통인동 토지 구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힌트
지금 통인동은 조용한 주거지이자 문화 공간이다. 통인시장이 있고, 갤러리가 있고, 오래된 골목이 있다. 하지만 그 골목 아래에는 여전히 시간이 남아 있다.
재개발, 리모델링, 소규모 공사. 이 모든 순간마다 문화재 지표 조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1912년의 기록에 있다. 161필지 전부가 집이었던 동네에서, 아무런 사전 조사 없이 땅을 파는 것은 도서관에 불을 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1912년 기록은 단순한 옛 문서가 아니다. 현재를 안전하게 만드는 지도다.

7.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 통인동이 중요한 이유
통인동이 문화재 지표 조사 대상지로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161필지 전부 대지라는 압도적 주거 밀집도. 둘째, 경복궁 인접이라는 역사적 핵심 위치. 셋째, 국유지 4필지와 민간 주거지의 복합 구성. 이 세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는 동네는 종로구 안에서도 드물다.
특히 경복궁과의 인접성은 발굴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요인이다. 궁과 관련된 부속 시설, 관청 관련 유구, 궁에 소속된 장인들의 작업 공간 흔적이 통인동 일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유구들은 단순한 생활 유적을 넘어, 조선 시대 왕실과 서민 생활의 경계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가 된다.
8. 성공 사례로 보는 통인동형 문화재 발굴의 가치
성공 사례 — 서울 종로구 효자동 도심 주거지 발굴
통인동과 바로 인접한 효자동 일대에서 소규모 리모델링 공사 전 진행된 지표 조사에서, 조선 후기 생활 유구가 확인됐다. 이후 시굴 조사로 이어진 작업에서 우물 1기, 온돌 바닥면, 배수로, 기와편과 생활 도자기 다수가 출토됐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규모 공사로 시작됐지만, 지표 조사 한 번이 이 모든 발굴로 이어진 것이다. 발굴된 유구는 기록 보존됐고, 효자동 지역 생활사 복원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통인동은 효자동과 같은 지층 조건을 가진 인접 지역이다.
서울 도심 곳곳에서 생활 유적 발굴이 성공한 사례는 많다. 작은 골목 공사에서 우물이 발견되고, 신축 현장에서 담장 기단이 나오는 순간. 이런 사례들은 모두 지표 조사를 성실히 했기에 가능했다. 통인동 역시 같은 길을 갈 수 있다. 무리한 개발이 아니라, 기록을 존중한 발굴. 그게 결국 지역의 가치를 올린다.
9. 개발과 보존 사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방향

문화재 발굴은 멈춤이 아니다. 방향을 잡는 일이다. 통인동처럼 기록이 분명한 지역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지표 조사 한 번으로 분쟁을 막고, 발굴 한 번으로 지역의 스토리를 살릴 수 있다.
⚠️
사전 조사 없는 개발
공사 중 유구 발견 → 전면 중단 → 법적 분쟁 → 유구 훼손 → 사회적 비용 급증
✅
지표 조사 선행 개발
지표 조사 → 시굴 조사 → 기록 보존 → 개발 병행 → 지역 가치 상승
이 선택의 차이가 통인동의 미래를 결정한다. 1912년의 기록은 그 선택을 위한 가장 정직한 근거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통인동을 포함한 종로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분석하고, 향후 문화재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10. 시간을 품은 동네, 통인동에서 남기는 마음

1912년 통인동은 숫자로만 보면 조용하다. 하지만 그 숫자 안에는 사람의 체온이 있다. 집이 있었고, 국가의 흔적이 있었고, 가문이 이어졌다. 상인이 물건을 팔던 골목, 관리가 퇴근해 돌아오던 담장 길, 아이들이 뛰놀던 마당. 이 모든 것이 161필지 안에 담겨 있다.
이 동네를 다시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과거를 보호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미래의 통인동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문화재 발굴이란 사라진 사람들의 하루를 불러내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하루와 만날 준비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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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도 이미 그 시간을 함께 걸어온 거다.
통인동은 그렇게, 다시 살아난다.
1912년의 숫자는 과거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는 게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 골목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순간, 도시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로 변한다. 문화재 발굴이란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이고, 문화재 지표 조사란 그 시작을 여는 일이다. 통인동의 기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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