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통의동 토지조사로 읽는 서울의 숨은 역사
- 1월 4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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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쪽 골목, 1912년엔 누가 살았을까 — 종로구 통의동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는 식민지 서울의 뿌리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종로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통의동 147필지·53,580㎡에 담긴 소유의 역사와 문화재 발굴조사의 의미를 풀어냅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골목 아래, 100년 전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묻혀 있다면 — 당신은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요?
서울 종로구 통의동. 경복궁 서쪽 담장 옆으로 이어지는 이 조용한 골목을 걸으면, 오래된 무언가가 발밑에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냥 기분 탓일까요? 아닙니다. 1912년의 토지 기록을 들춰보면 이 골목이 얼마나 빼곡한 삶의 층위를 쌓아왔는지, 숫자가 먼저 말을 겁니다. 147필지, 전부 대지. 국유지, 동양척식주식회사, 김씨와 이씨와 이름 모를 이들의 땅. 이 기록이 단순한 역사 통계가 아닌 이유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눈으로 함께 읽어봅니다.
147
총 필지 수
(1912년 통의동)
53,580
총 면적(㎡)
전 필지 대지
5
국유지 필지
(행정·공공 용도)
10
외국인 소유
(일본 8 + 중국 2)

한 장의 지도에서 시작된 질문 —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역사가 교과서 밖으로 나올 때, 그건 대개 발밑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연도나 사건 이름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100년 전에는 누구의 것이었는지, 어떤 사람이 살았는지를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입니다. 그 질문에 가장 성실하게 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공간을 대상으로 지면 위와 아래에 유적과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이 어떤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작업이라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이 조사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 그리고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데이터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종로구 통의동은 그 기록 안에서 특히 눈에 띄는 동네입니다. 147필지, 전부 대지, 면적 53,580㎡. 이 숫자들이 이 동네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천천히 풀어보겠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 아래 숨겨진 유물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이 땅이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에 의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일입니다.
1912년 통의동의 전체 풍경 — 147필지가 말해주는 것
1912년 기준, 종로구 통의동의 총 필지 수는 147개, 전체 면적은 53,580㎡였습니다. 지금의 감각으로 치면 중형 아파트 단지 두세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이 147필지 전부가 '대지'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밭도 없고, 논도 없고, 임야도 없습니다. 사사지조차 따로 구분되지 않을 만큼, 이 동네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도시화가 일찍 완성된 공간일수록, 그 아래에는 더 두꺼운 역사 층위가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통의동은 경복궁 서쪽에 맞닿아 있는 동네입니다. 조선 시대부터 관아와 민가가 밀집한 지역이었고, 고위 관료와 중인 계층이 거주하던 곳이었습니다. 그 오랜 역사 위에 1912년의 토지 기록이 덧입혀진 것입니다.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조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한 공간입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종로구 통의동
총 필지 수: 147필지 / 총 면적: 53,580㎡ / 지목 구성: 전 필지 대지
국유지: 5필지 /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1필지
일본인 소유: 8필지 / 중국인 소유: 2필지
김씨 소유: 28필지 / 이씨 소유: 23필지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종로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같은 시기 종로구의 다른 동네들과 비교해도 통의동은 독특합니다. 훈정동처럼 사사지가 혼재하거나, 효제동처럼 대지와 밭이 섞여 있는 구성이 아니라, 온전히 대지 하나로만 이루어진 구조는 이미 도시화가 상당히 진전된 공간임을 보여줍니다. 이건 통의동이 단순한 외곽 동네가 아니라, 이미 서울 도심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던 생활 공간이었다는 뜻입니다.

집으로 가득했던 동네, 통의동의 대지 구조
147필지가 전부 대지라는 건, 그 공간에 집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밥 짓는 냄새가 골목을 채웠을 거고, 아이들이 뛰어다녔을 거고, 어른들이 마루에 앉아 해가 기우는 걸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을 겁니다. 통의동은 그냥 서울의 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경복궁 바로 옆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관청을 오가는 사람들, 궁궐과 행정을 잇는 사람들, 그들의 일상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생활이 이 좁은 골목 안에 층층이 쌓여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서울 다른 지역들이 밭과 임야를 품고 있던 것과 대조적으로, 통의동이 완전한 대지 구성을 보이는 것은 이 동네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도시적 생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런 공간은 특별히 주목해야 합니다. 오래된 생활 층위가 켜켜이 쌓인 곳일수록,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유구와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울 도심 재개발 현장에서 조선 시대 건물 기초 석렬과 생활 도구들이 발견되는 사례는 적지 않습니다.
집이 전부였던 동네. 사람이 중심이었던 공간. 그 시간의 무게가 지금도 이 골목 아래에 고스란히 쌓여 있습니다.
국유지 5필지가 의미하는 것 — 행정이 남긴 흔적

147필지 중 5필지가 국유지였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많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사적 관점에서 이 5필지는 결코 가벼운 숫자가 아닙니다. 국유지는 일반적으로 도로, 공공시설, 행정 목적의 공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의동의 국유지 5필지가 정확히 어떤 용도였는지는 추가적인 기록 검토가 필요하지만, 이 동네가 이미 국가 행정 체계 안에서 관리되고 있던 공간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의 입장에서 이런 국유지 기록은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입니다. 과거 공공 목적으로 사용된 공간은 그 아래에 이전 시기의 관아 건물 터나 공공 시설의 기초 구조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복궁에 인접한 통의동의 경우, 조선 시대 여러 관청들이 이 일대에 산재해 있었다는 역사 기록이 있습니다. 그 흔적이 현재의 지하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는 이 동네에서 특별히 꼼꼼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실제 성공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종로구 인근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된 덕분에 조선 중기 관청 건물의 초석과 계단 석재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그냥 포클레인이 지나쳤을 유구가, 조사 덕분에 기록되고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국유지 5필지가 포함된 통의동이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김씨와 이씨, 성씨로 본 토지의 주인들
1912년 통의동의 토지를 성씨별로 분류해 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나타납니다. 김씨 28필지, 이씨 23필지. 두 성씨가 전체 147필지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흔한 성씨이기 때문에 많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가문 단위의 집단 거주, 즉 대대로 같은 동네에 뿌리내린 서울 토박이 가문들이 이 공간을 오랫동안 지켜왔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한 집에서 태어나고, 그 집에서 자라고, 또 그 집에서 늙어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 필지에는 친척이, 그 옆에는 이웃이 살았을 겁니다. 동네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삶의 단위였습니다. 이런 집단 거주 패턴은 그 공간에 공동의 기억과 공동의 역사가 쌓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속에도 그 공동의 생활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동 우물, 골목길, 담장 기초, 생활 도구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런 생활 유구를 하나씩 찾아내면서 그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을 합니다.
성씨별 소유 필지 주요 현황 (1912년 통의동)
김씨: 28필지 / 이씨: 23필지
국유지: 5필지 / 동양척식주식회사: 1필지
일본인: 8필지 / 중국인: 2필지
그 외 개인 소유: 다수 (박씨·최씨·정씨 등 추정)
동시에 이 기록은 씁쓸한 사실도 보여줍니다. 김씨와 이씨 같은 조선인 토박이들이 아직 상당수의 필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1912년 시점에는 통의동이 회현동3가처럼 완전히 일본인 소유로 넘어가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을 겁니다.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면서, 그리고 식민지 경제 구조가 심화되면서, 이 토박이들의 땅은 조금씩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기록이 있어서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민지 토지 구조
통의동 147필지 중 단 1필지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였습니다. 숫자 하나, 겨우 1필지입니다. 하지만 이 한 줄의 기록이 가지는 무게는 숫자와 전혀 다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1908년 설립한 식민지 토지·자원 수탈의 핵심 기관이었습니다. 조선 전역에 걸쳐 토지를 매입하거나 강제로 편입해, 일본인 이민자와 식민지 농업 자본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기관의 이름이 통의동 토지 기록에 등장한다는 것은, 경복궁 바로 옆이라는 상징적 위치를 가진 이 동네까지 식민지 토지 정책의 손길이 닿아 있었음을 뜻합니다. 1필지라는 숫자는 작아 보이지만, 그것은 시작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식민지 토지 구조는 천천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확장되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조용하게 한 필지가 바뀌고, 그 다음 필지가 바뀌고, 결국 동네 전체의 소유 구조가 뒤집히는 방식으로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1필지. 숫자는 작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기록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무거운 역사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이런 기록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소유 구조의 변화는 단순한 경제적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간의 물리적 변화와 직접 연결됩니다. 소유자가 바뀌면 건물이 바뀌고, 건물이 바뀌면 그 아래 지층에 이전 시기 구조물이 덮입니다. 그 덮인 층위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것이 문화재 발굴조사의 핵심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했던 통의동의 그 1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지표조사가 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일본인·중국인 소유 토지가 남긴 흔적 — 국제 도시 서울의 초상
통의동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 8필지, 중국인 소유 토지 2필지가 있었습니다. 합산하면 10필지. 전체 147필지에서 보면 약 6.8%입니다. 회현동3가의 92% 일본인 소유와 비교하면 훨씬 낮은 수치지만, 이 숫자가 가지는 의미는 다른 층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통의동은 경복궁 인근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공간입니다. 이 동네에 이미 외국인 소유 토지가 존재했다는 것은, 1912년 시점의 서울이 단순한 조선인 거주지가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공존하던 복합 도시였음을 보여줍니다. 일본인 8필지는 식민지 지배 구조의 확장을 반영하고, 중국인 2필지는 당시 조선에 진출해 있던 화교 상인 커뮤니티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런 다국적 소유 구조는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합니다. 다른 문화권의 소유자는 그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다른 구조의 건물을 세웁니다. 그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는 그 문화권 특유의 건축 방식과 생활양식의 흔적이 남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이런 다층적 문화 층위가 발견될 때, 역사는 훨씬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이 기록을 읽는 이유
지금까지 살펴본 통의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닙니다. 이건 현재에도 살아 있는 정보입니다. 통의동처럼 오랜 도시화 역사를 가진 지역, 국유지와 관청 인접 지역, 다양한 소유 구조가 혼재했던 공간은 재개발이나 신축 공사 시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냥 파면 안 되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조사의 법적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해당 지역의 유적 존재 가능성을 판단합니다. 가능성이 확인되면 시굴(표본)조사로 지하를 부분적으로 열어 확인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 전면 정밀 발굴조사로 진행되며, 최종적으로 보고서가 발간되고 필요한 경우 문화재 지정 절차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입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적 가능성 평가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 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소속 조사기관,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가 통의동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종로구 지역조사 데이터로 정리하고 공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동네를 파기 전에, 그 동네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147필지 전부가 대지였던 통의동은, 지금도 그 층층이 쌓인 삶의 흔적을 땅 아래에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조용하지만 깊은 감동, 통의동이라는 이름
통의동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요즘도 작고 조용한 골목들이 얽혀 있는 이 동네는, 모르는 사람이 지나치면 그냥 오래된 주택가로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를 하나씩 들여다볼수록, 이 동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품고 있었는지가 조용히 전해집니다.
김씨 가문의 28필지에서는 세대를 이어 살아온 서울 토박이의 시간이 느껴집니다. 국유지 5필지에서는 국가가 관리하던 공적 공간의 흔적이 보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1필지에서는 조용하지만 분명했던 식민지 구조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일본인과 중국인의 10필지에서는 이미 국제도시였던 서울의 초기 모습이 보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53,580㎡ 안에 겹겹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기록을 읽고 나서 다음에 통의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발밑의 시간을 한 번쯤 떠올려보길 바랍니다. 지금 밟고 있는 이 아스팔트 아래에 조선 시대의 기와가 묻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100년 전 누군가가 걸었던 흙길이 그 아래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한 번도 자기 것으로 가져본 적 없이 세입자로 살다 간 사람들의 시간도 거기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시간들을 꺼내 기록하는 일입니다. 화려하거나 드라마틱하지 않더라도, 그 묵묵한 작업이 없으면 우리는 도시의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통의동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로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통의동 외에도 훈정동, 효제동 등 다양한 동네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오늘 이 글을 읽고 나서,어느 오래된 골목 앞에서 잠깐 멈춰 서보셨으면 합니다.이 골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견뎌왔는지,얼마나 많은 계절을 지켜봤는지,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시간들을 품고 있는지를요.도시는 기억으로 만들어집니다.그 기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에,우리는 지금 이 골목 위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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