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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충신동, 땅 위에 남은 시간의 흔적

  • 1월 4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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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한 장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 1912년 종로구 충신동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는 도시와 삶의 경계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종로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충신동 214필지·92,050㎡에 담긴 소유의 구조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의 의미를 풀어냅니다.

지도를 한 장 펼쳤을 뿐인데, 숨겨져 있던 시간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1912년 충신동입니다.

지금은 평범한 종로 도심 골목처럼 보이지만, 1912년의 기록을 들춰보면 이 동네의 결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214필지 92,050㎡. 대지와 밭이 공존하던 경계의 동네. 김씨 48필지, 이씨 36필지. 그리고 조용히 스며들던 일본인 소유 5필지. 이 숫자 하나하나가 당시 사람들의 하루였고, 삶의 경계선이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눈으로 이 기록을 읽으면, 충신동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열립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충신동이 다시는 예전처럼 보이지 않을 겁니다.

214

총 필지 수


(1912년 충신동)

92,050

총 면적(㎡)


대지+밭 합산

159

대지 필지


(주거용 토지)

55

밭 필지


(농경 잔존 흔적)



지도를 펼치는 순간, 충신동의 시간이 열리다 — 문화재 지표조사란

역사는 거창한 사건 이름과 함께 기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는 그보다 훨씬 조용하고 작은 곳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골목이 100년 전에는 누구의 것이었는지,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하루를 버텼는지, 그게 진짜 역사입니다. 그 질문을 가장 성실하게 따라가는 방법이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의 지면 위와 아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이 어떤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일입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로, 그 다음에는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1912년은 조선의 토지가 처음으로 근대적 방식으로 기록된 시기였습니다. 그 해 종로구 충신동은 총 214필지, 면적 92,050㎡였습니다.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그 안에 누군가의 집터가 있었고, 누군가는 밭을 일구며 하루를 버텼고, 또 누군가는 조용히 그 땅을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과거를 붙잡는 작업이 아닙니다. 지금 이 도시가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 시작이 바로 1912년 충신동의 기록입니다.


214필지로 이루어진 마을 — 숫자가 말해주는 풍경

214필지라는 숫자는 작지 않습니다. 종로 한복판에 이 정도 규모의 필지가 밀집해 있다는 건, 이 동네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의 생활 밀도를 가진 공간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충신동은 같은 시기 다른 도심 동네들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구성을 보입니다. 전 필지가 대지인 회현동2가나 통의동과 달리, 충신동에는 대지와 밭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이 구성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지와 밭이 공존한다는 것은, 이 동네가 완전한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촌도 아닌 경계 어딘가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도시화가 진행 중이었고, 그 변화의 속도가 동네의 모든 필지를 같은 속도로 바꿔놓지는 못했습니다. 일부는 이미 집터로 변했지만, 일부는 여전히 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경계에서의 생활, 그 과도기적 시간이 충신동의 1912년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종로구 충신동


총 필지 수: 214필지 / 총 면적: 92,050㎡


대지: 159필지, 58,830㎡ (전체의 약 74%)


밭(전): 55필지, 33,219㎡ (전체의 약 26%)


국유지: 1필지 / 일본인 소유: 5필지


김씨: 48필지 / 이씨: 36필지 / 정씨: 15필지 / 최씨: 14필지 / 망씨: 11필지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종로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관점에서 이런 경계 공간은 특히 흥미롭습니다. 도시화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 공간일수록, 지하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생활 층위가 뒤섞여 나타납니다. 집터와 경작지 사이에는 배수로, 소규모 창고, 담장 기초 같은 구조물들이 공존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흔적들이 지금도 이 동네 땅 아래에 겹겹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집이 많았던 동네 — 삶이 밀집된 공간, 대지 159필지

충신동의 214필지 중 159필지, 즉 전체의 74%가 대지였습니다. 이 말은 159개의 집이 있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골목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있었을 거고, 장작 냄새, 밥 짓는 연기, 이웃끼리 오가던 발자국 소리가 하루도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충신동은 그냥 주거지가 아니었습니다. 삶이 빼곡하게 쌓인 공간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주거지 흔적이 많이 나오는 지역은 대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활의 밀도가 높을수록, 그 아래에는 더 다양하고 풍부한 생활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부엌 자리, 공동 우물, 담장 기초, 버려진 생활도구들. 이런 흔적들은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토양의 색 변화와 파편 분포로 이미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신동의 159필지 대지는 그런 신호가 집약된 공간입니다.

1912년 충신동 토지 구성 (214필지 기준)

대지

74% · 58,830㎡

159필지

밭(전)

26% · 33,219㎡

55필지

사실 159필지라는 숫자를 단순히 집의 개수로만 읽으면 이 공간의 온도를 절반도 느끼지 못합니다. 집 하나에는 가족이 살고, 그 가족에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 이야기들이 모여 동네가 됩니다. 1912년 충신동의 159필지는 단순히 주거용 토지가 아니라, 그 위에서 살아간 수백 명의 일상이 겹겹이 쌓인 공간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가 그 일상의 흔적을 땅속에서 꺼내줍니다.


밭이 남아 있던 도시 — 도시와 농촌의 경계, 55필지의 의미



충신동의 이야기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바로 이겁니다. 전체 214필지 중 55필지, 33,219㎡가 밭이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 이 정도 규모의 경작지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신호입니다. 종로 도심에 위치한 다른 동네들이 이미 전 필지 대지 구성을 보이던 것과 비교하면, 충신동은 아직 도시화의 물결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공간이었습니다.

이 55필지의 밭은 단순히 남아 있는 농경지가 아니었습니다. 도시로 이동 중이던 사람들이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농경의 기억이었습니다. 이미 집을 짓고 살면서도 옆 필지에서는 채소를 기르고, 가족의 식량을 일부 자급하던 생활 방식이 이 55필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완전한 도시도 아니고, 완전한 농촌도 아닌 경계에서의 삶. 충신동은 그 경계를 살아낸 사람들의 동네였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런 경작지 필지는 특별한 가능성을 갖습니다. 경작 행위 자체는 지표를 교란하는 요인이 될 수 있지만, 경작지와 주거지의 경계 지점, 즉 두 토지 이용 방식이 만나는 곳에서 소규모 시설 흔적이나 생활 유구가 발견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창고 터, 작은 제사 시설, 용수 관련 구조물 등이 그런 경계 지점에서 나오는 유형들입니다. 충신동의 밭과 대지가 만나는 55개 경계 지점은 그런 의미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특히 꼼꼼하게 이루어져야 할 구역입니다.

밭 55필지. 도심 한가운데서 누군가는 여전히 흙을 만지며 살았습니다. 완전히 도시가 되지 못한 곳, 그래서 더 인간적이었던 동네가 충신동이었습니다.


성씨로 읽는 토지 소유 구조 — 김씨·이씨·정씨·최씨·망씨

1912년 충신동의 토지를 성씨별로 들여다보면 이 동네의 또 다른 얼굴이 보입니다. 김씨 48필지, 이씨 36필지, 정씨 15필지, 최씨 14필지, 망씨 11필지. 상위 다섯 성씨가 전체 214필지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흔한 성씨들이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씨


48필지

이씨


36필지

정씨


15필지

최씨


14필지

망씨


11필지

김씨 48필지라는 건,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이 동네에 집중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가문 단위의 집단 거주, 세대를 이어 같은 골목에서 뿌리내린 서울 토박이 가문들의 이야기가 이 숫자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씨 36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개인 소유를 넘어, 가문의 경제력과 사회적 연결망이 이 동네의 토지 구조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다 보면 특정 성씨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역에서 가문 관련 유구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문 공동 시설, 문중 창고, 제사 관련 구조물, 혹은 여러 세대에 걸쳐 사용된 우물 같은 것들입니다. 충신동처럼 특정 성씨가 집중된 지역은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이 성씨 기록이 중요한 해석의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망씨 11필지라는 기록은 조금 특별합니다. 망씨는 다소 생소한 성씨입니다. 이 기록이 실제 성씨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소유자 정보가 불명확하게 기록된 필지를 묶은 것인지 추가적인 문헌 검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충신동의 토지 소유 구조가 단순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 토지가 의미하는 것

충신동에는 국유지가 단 1필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개인 소유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1필지의 국유지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추가적인 기록 확인이 필요하지만, 행정 목적이나 도로·공공 시설 용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심 내 국유지는 행정의 흔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인근에서 문화재 지표조사 시 공공 시설 관련 구조물이 발견될 가능성을 예고하는 단서가 됩니다.

그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기록은 일본인 소유 5필지입니다. 같은 시기 회현동2가(65필지)나 회현동3가(12필지)와 비교하면 훨씬 낮은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 5필지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숫자와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집니다. 1912년은 일제강점 초기였습니다. 일본인 소유 토지는 이 시기 막 시작된 침투의 초입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실제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서울 도심 많은 동네에서 일본인 소유 비율이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1912년에 5필지였던 것이 1920년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얼마나 늘어났는지는 동시기 다른 자료와의 비교 분석이 필요합니다. 충신동의 5필지는 그 변화의 출발점에 찍힌 작은 점입니다. 작아 보이지만, 그 점이 이후 어떤 선으로 이어졌는지를 이해하면 훨씬 다른 의미로 읽힙니다.

소유 구조 비교 — 1912년 종로·중구 주요 동네


충신동: 일본인 소유 5필지 / 전체 214필지 (약 2.3%)


통의동: 일본인 소유 8필지 / 전체 147필지 (약 5.4%)


회현동3가: 일본인 소유 12필지 / 전체 13필지 (약 92%)


회현동2가: 일본인 소유 65필지 / 전체 85필지 (약 76%)


→ 남산 인근 중구 동네일수록 일본인 소유 집중도가 높게 나타남

이 비교 수치가 보여주는 패턴은 흥미롭습니다. 충신동이 속한 종로구 내에서도, 그리고 인접한 중구의 동네들과 비교해도, 일본인 소유 비율은 지역에 따라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남산과의 거리, 주요 상업 시설과의 접근성, 행정·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소유 구조가 달라졌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이런 소유 구조 변화를 지역별로 분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소유 구조는 물리적 공간의 변화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충신동 토지 구조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지금까지 살펴본 충신동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 동네가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로서 얼마나 중요한 공간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첫째, 214필지 중 159필지라는 높은 대지 비율은 장기간 고밀 주거가 이루어진 공간임을 보여주고, 그만큼 지하에는 두꺼운 생활 역사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55필지의 밭이 대지와 공존했던 경계 지형은 다양한 형태의 생활 시설이 혼재했음을 시사하며, 그 경계 지점이 중요한 조사 구역이 됩니다.

셋째, 김씨·이씨를 중심으로 한 가문 단위의 집중 소유 구조는 가문 관련 공동 시설의 흔적이 발굴될 가능성을 높입니다. 넷째, 일본인 소유 5필지라는 기록은 이 공간에서도 소유 구조 전환의 시작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그 전환이 물리적 공간 변화로 이어진 흔적이 지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재개발, 도로 공사, 건축 허가 등 모든 개발 행위 앞에서 충신동은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공간입니다.

모르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과, 알고 준비해서 시작하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공사 도중 유구가 발견되면 공사는 중단되고, 조사 일정이 추가되며, 사업 비용과 기간이 예상을 크게 벗어납니다. 처음부터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행하면 그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충신동의 기록을 꼼꼼히 읽는 일이, 사실은 미래의 개발 계획을 위한 가장 현명한 준비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남긴 실제 성공 사례

충신동과 유사한 조건의 서울 도심 주거지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대지와 밭이 혼재했던 종로구 인근의 한 재개발 사업 현장이었습니다. 사업 담당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건물이 지어졌다 철거된 땅이라 별다른 유구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 지표조사를 먼저 진행한 결과, 조선 시대 생활유구의 존재 가능성이 확인되었고 시굴조사가 이어졌습니다.

시굴조사 과정에서 경작 흔적과 주거지 사이의 경계 지점에서 소토(불에 탄 흙) 층과 배수 시설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조선 후기 민가의 기초 구조물과 생활도구 일괄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습니다. 이 발굴 결과는 단순히 유물 확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역 역사 기록의 공백이 채워졌고, 해당 구청에서 이를 활용한 지역 역사 교육 자료가 제작되어 주민들과 공유되었습니다.

충신동도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214필지에 겹겹이 쌓인 삶의 흔적들이 올바른 조사 과정을 거칠 때, 우리가 아직 모르는 충신동의 이야기 한 챕터가 새롭게 쓰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이 공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적 가능성 판단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 땅은 기억한다



지도 한 장. 숫자 몇 줄.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1912년 충신동의 214필지는 지금도 땅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시간을 버티고 있을지 모릅니다. 김씨의 48필지가 어디 있었는지, 55개의 밭이 어떤 모양으로 주거지와 맞닿아 있었는지, 일본인 이름이 올라간 5필지가 그 이후 어떤 건물로 바뀌었는지. 이 모든 이야기가 아직 땅 아래에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기억을 꺼내는 순간, 역사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숨을 불어넣는 작업입니다. 화려하거나 드라마틱하지 않아도 됩니다. 묵묵히 흙을 붓질하고, 기록하고, 보고서를 쓰는 그 작업이 없으면 우리는 도시의 기억을 영영 잃어버리게 됩니다.

언젠가 충신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한 번쯤 발밑을 떠올려 보세요. 그 아래에 누군가의 부엌이 있었고, 밭이 있었으며, 가을마다 수확을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시는 변했지만, 땅은 그 모든 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땅은 말을 하지 않지만,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언제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순간입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종로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충신동 외에도 훈정동, 효제동, 통의동 등 다양한 동네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당신은이미 충신동의 기억을 함께 품은 사람입니다.김씨의 48필지, 이씨의 36필지,밭에서 흙을 만지던 누군가의 손,그리고 말없이 조금씩 사라져가던 조선인들의 땅.이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는 건기억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긴 글,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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