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종로구 청진동 토지조사로 읽는 서울 도심의 숨겨진 시작점

  • 1월 2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9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조사문화재 발굴 기관청진동 역사종로구 지역조사서울 문화유산도심 재개발 발굴


유리 빌딩 아래 302개의 집이 있었다 — 1912년 종로구 청진동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는 종로 도심의 민낯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종로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청진동 302필지·52,420㎡ 전 필지 대지 구성과 성씨·소유 구조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풀어냅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종로 한복판. 유리 빌딩과 대기업 본사, 점심시간마다 붐비는 식당가 뒤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겹쳐 있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1912년입니다.

종로구 청진동. 지금은 종로 도심 재개발의 대표적인 공간으로 알려져 있지만, 1912년의 기록을 들춰보면 이 동네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302필지 전부가 대지. 밭도 없고 논도 없고 임야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땅이 집이었습니다. 김씨 66필지, 이씨 34필지, 박씨 21필지. 그리고 일본인 12필지. 이 숫자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눈으로 함께 읽어봅니다.

302

총 필지 수


(1912년 청진동)

52,420

총 면적(㎡)


전 필지 대지

100%

대지 비율


논·밭·임야 없음

66

김씨 소유 필지


최대 단일 성씨



숫자 하나가 도시의 성격을 말해준다 — 문화재 지표조사란

이 작은 동네 하나가 서울 도심의 성격을 결정했습니다. 1912년 종로구 청진동은 302필지 52,420㎡. 이 숫자만 보면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숫자를 하나씩 풀어보는 순간,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했는지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옛 지도 이야기나 토지 숫자 정리가 아닙니다. 문화재 발굴, 문화재 지표조사, 그리고 도심 재개발과 맞닿아 있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의 지면 위와 아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이 조사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로, 이후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정리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읽다 보면 왜 청진동 같은 동네가 지금도 발굴조사의 핵심 대상이 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땅 아래에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1912년 토지조사는 종이에 적힌 숫자가 아닙니다. 지금의 결정을 바꾸는 근거입니다. 청진동의 302필지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302필지 전부가 대지 — 완전히 도시화된 종로 도심

302 / 302

1912년 청진동 302필지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밭도 없고 · 논도 없고 · 임야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땅이 집이었습니다.

1912년 청진동의 가장 놀라운 점은 토지 이용 구조입니다. 302필지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같은 시기 충신동(214필지 중 55필지 밭), 회현동1가(도로·밭 혼재), 필동3가(잡종지·밭 포함)와 비교하면, 청진동은 완전히 다른 수준의 도시화를 보여줍니다. 체부동(214필지 전 필지 대지)과 함께, 청진동은 1912년 기준 서울에서 도시화가 가장 완성된 공간 중 하나였습니다.

서울의 다른 지역을 보면 같은 시기에도 밭이나 임야가 섞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청진동은 다릅니다. 이곳은 이미 상업과 주거가 결합된 도심이었습니다. 관청, 상점, 주택이 뒤섞여 돌아가던 공간. 그래서 지금도 이 일대에서 공사를 하려면 문화재 지표조사가 거의 필수처럼 따라붙습니다. 302필지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땅 아래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종로구 청진동


총 필지 수: 302필지 / 총 면적: 52,420㎡


대지: 302필지 100% (논·밭·임야 없음)


국유지: 2필지 / 법인 소유: 1필지


일본인 소유: 12필지 (전체의 약 4%)


김씨: 66필지 / 이씨: 34필지 / 박씨: 21필지


최씨: 16필지 / 조씨: 13필지 / 장씨: 12필지 / 정씨: 11필지 / 류씨: 10필지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종로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302필지가 전부 대지라는 사실은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신호입니다. 필지 수가 많고, 모두 대지이며, 조선 시대부터 도심으로 기능한 공간은 지하에 두텁고 다양한 역사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유형입니다. 조선 시대 생활층, 대한제국 시기 변화,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겹쳐진 층위가 302필지 전체에 걸쳐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씨 분포로 보는 청진동 사람들의 얼굴

성씨 분포를 보면 당시 청진동의 사회 구조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김씨 66필지, 이씨 34필지, 박씨 21필지, 최씨 16필지, 조씨 13필지, 장씨 12필지, 정씨 11필지, 류씨 10필지. 상위 8개 성씨가 이 정도 분포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김씨가 66필지로 가장 많지만, 전체 302필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22%에 불과합니다.

1912년 청진동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주요 8개 성씨)

김씨 66필지

이씨 34필지

박씨 21필지

최씨 16필지

조씨 13필지

장씨 12필지

정씨 11필지

류씨 10필지

이건 단순한 이름 나열이 아닙니다. 특정 성씨가 대규모로 독점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체부동(김씨 42필지, 20% 수준)과 비슷하게, 청진동도 한 가문이 독점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중소 지주와 상인, 거주민이 촘촘하게 얽혀 있던 생활형 도시였습니다. 다양한 성씨가 고루 분포한다는 건, 청진동이 한 집안의 마을이 아니라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도심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유형의 동네는 특별한 가치를 가집니다. 특정 가문이 독점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생활한 공간에서는 더 다채로운 생활 유물과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물, 담장, 골목 포장, 생활도구, 상업 관련 용구들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이런 유형의 도심 주거지에서 다양한 생활 유구를 확인한 사례가 있습니다.

김씨 66필지, 이씨 34필지, 박씨 21필지. 이 이름들이 서로 다른 골목에 살면서 하나의 동네를 만들었습니다. 청진동은 한 가문의 동네가 아니라 서울 사람들 모두의 동네였습니다.



국유지 2필지와 법인 1필지 — 사람 중심의 생활 도시

청진동에는 국유지가 단 2필지였습니다. 전체 302필지에서 약 0.7%에 불과합니다. 이 수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국유지가 적다는 건 중앙 관청이나 대규모 공공시설이 이 동네 안에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청진동은 관리의 공간이 아니라 생활과 경제의 공간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국유지 5필지가 포함된 필동3가나 통의동과 확연히 다른 성격을 보입니다.

법인 소유 토지는 1필지. 아직 기업 중심의 토지 소유 구조가 본격화되기 전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이 시기의 청진동은 사람 중심의 도시였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각자의 삶을 영위하며 만들어낸 공간. 이런 구조의 동네는 문화재 발굴 시 한 번 파면 개인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유적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부엌, 한 가족의 우물, 한 상인의 저장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청진동 같은 공간에서 재개발이나 공사가 이루어질 때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조심스럽게 따라붙는 것입니다. 국유지나 대형 기관의 흔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수백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남긴 생활의 흔적을 찾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이 더 소중하고, 더 희귀하고, 더 가치 있는 역사입니다.


일본인 소유 12필지가 남긴 흔적 — 도심 침투의 시작

일본인 소유 토지는 12필지였습니다. 302필지 중 12필지, 비율로 따지면 약 4%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회현동 시리즈(74~92%)나 필동3가(82%)와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 숫자가 작다고 해서 그냥 넘길 수는 없습니다.

1912년 청진동 토지 소유 구조 (302필지 기준)

조선인 등 (286필지, 94.7%)

일본 12필

기타

조선인 등 (286필지)

일본인 소유 (12필지)

국유·법인 (4필지)

12필지라는 숫자는 상징성이 큽니다. 종로 도심 핵심부에 이미 외국인 소유 토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1912년은 도시 구조가 급격히 바뀌기 직전의 마지막 안정기였습니다. 일본인 소유 12필지는 그 변화의 씨앗이 이미 심어져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이후 이 흐름은 빠르게 확대됩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이 시기 자료를 유독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네

총 필지

일본인 소유

비율

회현동3가

13필지

12필지

92%

필동3가

79필지

65필지

82%

회현동2가

85필지

65필지

76%

회현동1가

203필지

151필지

74%

통의동

147필지

8필지

5.4%

청진동 ★

302필지

12필지

4%

충신동

214필지

5필지

2.3%

체부동

214필지

해당 없음

낮음

이 비교 표를 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보입니다. 남산 인근 중구 동네들(회현동·필동)은 일본인 소유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종로구 안쪽 동네들(청진동·충신동·체부동)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청진동은 종로 도심이라는 핵심 위치에 있으면서도 조선인 소유 비율이 94.7%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1912년 시점에서 종로 도심이 아직 조선인들의 삶의 공간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청진동 토지조사가 문화재 발굴에 주는 메시지



지금까지 살펴본 청진동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한 가지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302필지 전 필지 대지, 다양한 성씨가 고루 분포한 생활형 도시, 낮은 국유지 비율, 그리고 아직 조선인 중심의 소유 구조를 유지하고 있던 공간. 이 조건들이 합쳐질 때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가 분명합니다.

조선 시대부터 도심으로 기능한 이 공간은 지하에 가장 두텁고 가장 다양한 생활 역사층을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순히 집터가 아니라, 상업 활동의 흔적, 공동체 생활의 시설, 그리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남긴 서로 다른 유물들이 한 공간에 층층이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청진동 일대에서 공사가 이루어질 때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청진동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 이유


전 필지 대지 →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생활 역사층 두텁게 보존


다양한 성씨 고루 분포 → 다채로운 개인·상업 생활 유구 출토 가능성


낮은 국유지 비율 → 개인 생활 유구 중심의 조사 성과 기대


조선인 소유 94.7% 유지 → 전통 생활 방식 유구 보존 가능성


종로 도심 핵심부 → 상업·주거 복합 공간의 역사층 집약


실제 발굴 성공 사례로 보는 청진동의 가능성



청진동 인근 재개발 구역에서 실제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 사례가 있습니다. 처음엔 평범한 도심 공사였습니다. 하지만 지표조사 단계에서 기록과 지형이 맞아떨어지면서 발굴조사로 전환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배수로와 생활 유구가 확인되었고, 도시 계획도 수정되었습니다. 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재조명된 이 사례는 기록의 힘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성공 사례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서울 도심 여러 지역의 발굴 현장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거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조사 단계에서 예상을 뒤집는 발견이 이루어지는 경우입니다. 전 필지 대지 구성에 조선인 소유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공간에서는 전통 생활 유구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된 경우가 많습니다. 소유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건 공간의 물리적 구조도 덜 교란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청진동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기대되는 공간입니다.

이런 성공 사례들이 쌓일수록,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과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1912년 토지 기록을 더욱 중요하게 다루게 됩니다.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니라 현재의 조사 방향을 결정하는 살아 있는 데이터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이 기록들을 동 단위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물 산포 확인, 유적 가능성 판단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직접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기록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



지금 청진동을 걷고 있다면, 발밑을 한 번 떠올려보세요. 수백 채의 집. 수백 명의 생활. 김씨의 집과 이씨의 집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던 그 시간. 장씨 상인이 아침마다 가게 문을 열던 모습. 류씨 어르신이 골목 끝 우물에서 물을 긷던 풍경.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콘크리트 아래에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도시는 기억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지키는 첫 출발점이 바로 이런 기록입니다. 1912년 토지조사는 종이에 적힌 숫자가 아닙니다. 지금의 결정을 바꾸는 근거이고, 미래의 발굴 방향을 결정하는 지도이며, 우리가 이 도시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 질문에 답하는 방법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이제 청진동이 그냥 지나치는 동네로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유리 빌딩 아래 302개의 집이 있었고, 그 집마다 삶이 있었으며, 그 삶이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청진동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종로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청진동 외에도 통의동, 충신동, 체부동 등 다양한 동네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종로를 지나다 청진동 골목을 만나면,딱 한 번만 멈춰 발밑을 내려다봐 주세요.그 아스팔트 아래에김씨의 집이 있었고,이씨의 골목이 있었으며,박씨의 아이들이 뛰어놀던 마당이 있었습니다.302개의 집, 302개의 삶.그 평범한 일상들이 지금의 서울을 만들었습니다.기억해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