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창신동 토지 조사로 본 서울의 시작, 땅 위에 남겨진 사람들의 흔적
- 2025년 12월 31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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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필지 중 절반이 밭이었다 — 1912년 종로구 창신동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종로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창신동 701필지·375,975㎡에 담긴 복합 토지 구성과 동양척식주식회사·외국인 소유의 의미를 풀어냅니다.
1912년의 창신동은 지금 우리가 걷는 서울과 전혀 다른 숨결로 살아 있었습니다. 지금의 창신동 골목 대신 끝없이 이어진 밭과 완만한 경사가 먼저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701필지, 375,975㎡. 이 시리즈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공간의 절반 이상이 밭이었습니다. 163필지 232,248㎡. 대지와 밭이 공존하고, 연못이 있었고, 미국인과 프랑스인의 이름이 토지 기록에 나란히 적혀 있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20필지. 이 창신동의 1912년 기록이 왜 지금도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는지, 지금부터 함께 읽어봅니다.
701
총 필지 수
(시리즈 최대)
375,975
총 면적(㎡)
시리즈 최대 규모
163
밭 필지
(전체 면적의 62%)
20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필지

한 장의 지도에서 시작된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란
만약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지금의 창신동 골목 대신 끝없이 이어진 밭과 완만한 경사가 먼저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1912년, 일제강점기 초기에 작성된 토지조사부에는 숫자로만 남아 있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에는 분명 사람들의 삶이 있었습니다. 이 글은 단순한 통계 정리가 아닙니다.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 지표조사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창신동이라는 공간의 원형 기록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의 지면 위와 아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이 조사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로, 이후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정리해 이 조사의 기초 자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토지 구조를 이해하면, 왜 지금 창신동에서 문화재 조사와 발굴 의뢰가 자주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경계가 흐릿할수록, 땅 아래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701필지, 375,975㎡. 이 거대한 숫자 안에서 그 이야기를 찾아봅니다.
경계가 흐릿할수록, 땅 아래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습니다. 창신동의 1912년은 그 이야기가 가장 풍부하게 쌓인 공간입니다.
1912년 창신동의 전체 규모와 공간의 얼굴
1912년 종로구 창신동은 총 701필지, 면적은 무려 375,975㎡였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모든 동네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청운동(220,328㎡), 필동2가(172,265㎡)와 비교해도 압도적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하나의 작은 동네 같지만, 당시에는 거대한 생활권이었습니다. 이 면적 안에 주거지, 농경지, 연못, 그리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이 공존했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흐릿했던 시기. 창신동은 바로 그 경계선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 지점이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경계가 흐릿한 공간일수록 다양한 시대의 사용 흔적이 중첩되고, 그 층위들이 지하에 복잡하게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창신동은 그런 의미에서 고위험·고가치 지역입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종로구 창신동
총 필지 수: 701필지 / 총 면적: 375,975㎡ (시리즈 최대)
대지: 534필지, 133,517㎡ / 밭(전): 163필지, 232,248㎡
산(임야): 1필지, 548㎡ / 지소(연못): 1필지, 1,170㎡ / 잡종지: 2필지, 8,489㎡
국유지: 3필지 / 동양척식주식회사: 20필지 / 일본인: 21필지
미국인: 5필지 / 프랑스인: 2필지
김씨: 127필지 / 이씨: 103필지 / 박씨: 72필지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종로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집이 가장 많았던 동네 — 대지 534필지의 의미
창신동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단연 대지였습니다. 534필지 133,517㎡. 이 숫자는 단순한 주택 수가 아닙니다. 한 집, 한 집마다 가족이 있었고, 마당이 있었고, 생활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534채에 가까운 집이 창신동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밥 짓는 연기, 이웃끼리 오가던 발자국이 이 534필지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1912년 창신동 토지 구성 (701필지 기준)
밭(전)
62% · 232,248㎡
163필지
대지
35% · 133,517㎡
534필지
잡종지
2%
2필지
기타
1%
2필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지역은 항상 주목 대상이 됩니다. 사람이 오래 머문 땅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울 도심 발굴 사례를 보면, 대지 밀집 지역에서 생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엌 자리, 배수로, 담장 기초, 우물 흔적. 534필지의 생활이 창신동 땅 아래에 층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창신동의 대지는 면적 기준으로 보면 전체의 35%에 불과합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대지가 절반도 안 된다는 건, 창신동이 아직 완전히 도시화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의미입니다. 집이 많지만, 더 많은 밭이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 공존이 창신동을 문화재 조사에서 특별하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밭과 산 — 도시가 되기 전 창신동의 진짜 모습

창신동의 진짜 주인공은 밭이었습니다. 163필지 232,248㎡. 전체 면적의 62%가 농경지였습니다. 필지 수는 163개로 전체의 23%지만, 면적 기준으로는 압도적입니다. 이는 밭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이 대지보다 훨씬 넓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넓게 펼쳐진 밭이 집들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풍경. 1912년 창신동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밭 아래에는 과거 지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경작 행위는 표층을 일부 교란하지만, 그보다 깊은 층위는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재 시굴조사, 표본조사 단계에서 밭이 많았던 지역은 항상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창신동의 163필지 밭은 그 가능성의 가장 넓은 층위입니다.
산은 단 1필지 548㎡뿐이었지만, 이 역시 중요합니다. 완만한 구릉과 연결된 임야는 고대부터 묘역이나 제의 공간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단 1필지지만, 그 필지가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확인하면 창신동의 공간 구조 안에서 중요한 방향 설정이 가능합니다.
163필지의 밭. 62%의 농경지. 창신동은 집이 많은 동네이기 이전에, 밭이 더 많은 동네였습니다. 그 밭 아래에 창신동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연못과 잡종지가 말해주는 생활 풍경
창신동에는 연못도 있었습니다. 지소(池沼) 1필지, 1,170㎡ 규모. 이 연못은 단순한 물웅덩이가 아닙니다. 생활용수, 농업용수, 때로는 마을의 중심 공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연못 주변은 사람들이 자주 모이고 오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연못 인근에서 다양한 생활 유물이 집중 출토되는 경우가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종종 관찰됩니다.
지소(연못) 1필지 · 1,170㎡
생활용수·농업용수·마을 공동 공간. 연못 인근은 사람들의 왕래가 집중되어 생활 유물 밀집 출토 가능성 높음. 문화재 지표조사 우선 확인 구역.
잡종지 2필지 · 8,489㎡
창고·작업장·임시 시설 추정 공간. 다목적 사용으로 다양한 층위 흔적 공존. 문화재 발굴에서 의외의 유물이 자주 나오는 유형.
잡종지 2필지 8,489㎡도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이런 땅은 창고, 작업장, 임시 시설이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특정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채 다양하게 사용된 공간에서는 그 사용의 흔적들이 층층이 겹쳐 남습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의외의 유물이 나오는 곳이 바로 이런 공간입니다. 창신동의 연못과 잡종지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첫 번째 과제가 됩니다.
성씨로 읽는 창신동의 토지 주인들
창신동에는 정말 다양한 성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김씨 127필지, 이씨 103필지, 박씨 72필지. 여기에 홍씨, 류씨, 정씨, 최씨, 조씨, 장씨, 망씨까지. 이 다양성은 창신동이 특정 계층만의 공간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가문 단위의 집단 거주보다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던 생활 공동체였습니다.
1912년 창신동 주요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金
김씨 127필지
李
이씨 103필지
朴
박씨 72필지
洪
홍씨 등
701필지에서 김씨 127필지, 이씨 103필지, 박씨 72필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합쳐서 43%입니다. 나머지 57%는 수십 개의 다른 성씨들이 고루 나누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구조는 문화재 조사에서 생활사 유물의 보고입니다. 한 가문이 독점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살던 공간에서는 더 다채롭고 풍부한 생활 유물과 유구가 출토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창신동은 그런 의미에서 발굴 결과가 가장 기대되는 유형의 공간입니다.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 토지의 존재

국유지는 3필지였습니다. 숫자는 적지만 의미는 가볍지 않습니다. 국유지는 도로, 공공시설, 혹은 향후 개발을 염두에 둔 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행정 관리가 이루어지던 공공 공간 아래에는 이전 시기 시설의 흔적이 중첩되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지역은 문화재 보호법상 조사 범위가 더욱 엄격하게 적용됩니다.
그리고 미국인 소유 토지 5필지, 프랑스인 소유 토지 2필지. 창신동이 이미 국제적인 접점을 가진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미국인 소유지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프랑스인 소유지는 외교관 또는 가톨릭 관련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창신동 인근 지역에는 조선 시대부터 가톨릭 관련 역사가 있었습니다.
🇺🇸미국인 소유
5필지
선교·외교 관련
🇫🇷프랑스인 소유
2필지
가톨릭·외교 관련
🏛️국유지
3필지
공공·행정 목적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외국인 소유지는 독특한 가능성을 가집니다. 다른 문화권의 건축 방식과 생활 방식이 남긴 흔적이 조선인 생활 유구와 함께 출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과 프랑스인의 이름이 창신동 토지 기록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 공간이 단순한 조선인 거주지를 넘어선 복합 문화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민지 토지 구조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가 20필지였습니다. 여기에 일본인 소유 토지 21필지가 더해집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식민지 시기 토지 수탈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장면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설립한 식민지 토지·자원 수탈의 핵심 기관으로, 창신동처럼 넓은 밭이 많은 공간은 이 기관의 집중적인 토지 확보 대상이 됩니다.
1912년 창신동 주요 소유 주체 구조 (701필지 기준)
조선인 등 (611필지, 87%)
동척
일본
국유·외국인
조선인 등 (611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20필지)
일본인 (21필지)
국유·외국인 (49필지)
창신동의 조선인 소유 비율은 약 87%로, 회현동 시리즈나 필동 시리즈에 비해 훨씬 높습니다. 하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 20필지와 일본인 21필지를 합산하면 식민지 기관·일본인 소유가 41필지(약 6%)에 달합니다. 이 수치는 절대적으로 낮아 보이지만, 163필지의 농경지가 대부분인 창신동에서 이 41필지가 어느 위치에 집중되어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토지는 발굴조사 과정에서도 특별 관리 대상이 됩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였던 지역에서 근대 유물과 조선 후기 유물이 동시에 출토된 사례가 실제 발굴 현장에서 확인됩니다. 창신동의 20필지도 그런 중층 유구가 발견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로 본 문화재 조사의 힘

서울 도심 재개발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설마 여기서 뭐가 나오겠어?" 하지만 1912년 토지조사를 기준으로 접근한 곳들은 결과가 달랐습니다. 밭과 대지가 혼재된 지역에서 생활 유물과 구조물이 연속 출토되며 공사 일정이 조정된 사례도 있습니다. 반대로 사전에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충실히 진행한 현장은 오히려 행정 리스크를 줄였습니다. 창신동 역시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가진 공간입니다.
특히 창신동처럼 밭 면적이 대지 면적보다 넓은 공간은 지표조사에서 예상 외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밭으로 사용된 공간에는 그 이전 시기의 생활 유구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일찍 지표조사를 시작한 사업자는 설계 변경으로 문화재를 보존하면서도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늦게 발견한 경우는 공사 중단이라는 더 큰 비용을 치렀습니다. 창신동의 701필지가 그 차이를 조용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물 산포 확인, 유적 가능성 판단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직접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지금 우리가 이 기록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1912년 창신동의 숫자들은 과거가 아닙니다. 지금도 땅 아래에서 숨 쉬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문화재 발굴, 문화재 지표조사, 발굴조사 의뢰를 고민하는 순간, 이 기록은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701필지에 담긴 김씨의 127필지, 이씨의 103필지, 박씨의 72필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163필지의 밭 아래, 534필지의 집터 아래에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20필지와 미국인·프랑스인의 이름이 적힌 7필지. 이미 1912년의 창신동은 하나의 문화로만 설명될 수 없는 복합 공간이었습니다. 그 복합성이 지금 창신동을 단순히 오래된 동네가 아니라, 가장 다층적인 역사를 품은 공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억을 존중하는 것이 지금을 사는 우리의 역할이라는 것.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이제 창신동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겁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종로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창신동 외에도 청운동, 체부동, 통의동, 청진동 등 다양한 동네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창신동 골목을 걷다 경사를 오를 때,잠깐 멈춰 발밑을 느껴보세요.이 땅 아래에127명의 김씨가 살았고,103명의 이씨가 밭을 일궜으며,연못 하나가 마을의 중심을 잡고 있었습니다.701필지의 이야기들이지금도 이 땅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그 기억을 존중하는 일이지금 우리의 역할입니다.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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