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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창성동, 한 장의 토지대장이 들려주는 도시의 시작

  • 2025년 12월 30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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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숫자들을 그냥 넘기면 정말 아깝다 — 1912년 종로구 창성동 문화재 지표조사로 읽는 사람의 공간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종로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창성동 184필지·50,740㎡에 담긴 삶의 밀도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의 의미를 풀어냅니다.


184필지, 50,740㎡. 이건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1912년의 창성동이 숨 쉬던 방식입니다. 토지조사부 한 장을 펼치는 순간, 이 동네는 갑자기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바뀝니다.

지금의 종로를 걷다 보면 높은 담장과 단정한 골목 사이로 과거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1912년 기록을 들춰보면 창성동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184필지 전부가 대지. 밭도 없고 임야도 없습니다. 국유지는 단 3필지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람의 공간이었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이었던 이 동네가 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공간인지, 지금부터 함께 읽어봅니다.


184

총 필지 수


(전 필지 대지)

50,740

총 면적(㎡)


1912년 기준

3

국유지 필지


나머지는 모두 민간

37

김씨 소유 필지


최대 단일 성씨




숫자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창성동의 첫인상 — 문화재 지표조사란

이 숫자들을 그냥 넘기면 정말 아깝습니다. 184필지, 50,740㎡. 이건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1912년의 창성동이 숨 쉬던 방식입니다. 지금의 종로를 걷다 보면 높은 담장과 단정한 골목 사이로 과거가 잘 느껴지지 않지만, 토지조사부 한 장을 펼치는 순간 이 동네는 갑자기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바뀝니다.

이 기록을 체계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의 지면 위와 아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이 조사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로, 이후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정리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창성동은 그 기록 안에서 조용하지만 강한 개성을 가진 공간입니다.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이었던 동네. 그 특성이 왜 문화재 조사에서 중요한지를 지금부터 함께 읽어봅니다.

지면 위는 조용해 보여도, 지면 아래에는 수백 년의 생활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창성동이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1912년 창성동, 184필지에 담긴 삶의 밀도

1912년, 종로구 창성동은 총 184필지로 이루어진 꽤 단단한 주거지였습니다. 필지 수와 면적이 거의 정확히 대지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논이나 밭이 아닌 '사는 곳'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도시의 중심에서 이미 완성형에 가까웠던 동네였다는 뜻입니다. 같은 시기 창신동(701필지)이나 청진동(302필지)보다는 작지만, 184필지라는 숫자는 종로 도심 안에서 하나의 완결된 생활권을 이루기에 충분한 규모입니다.

이 동네가 얼마나 빼곡하게 살아 있었는지를 상상해봅니다. 좁은 골목 양쪽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담장 너머로 이웃의 목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던 풍경. 184필지의 모든 집에 그런 일상이 있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밀집 주거지는 항상 주목 대상이 됩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았던 공간일수록, 그 아래에는 더 두텁고 다양한 생활 층위가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종로구 창성동


총 필지 수: 184필지 / 총 면적: 50,740㎡


대지: 184필지 100% (밭·임야·잡종지 없음)


국유지: 3필지 / 일본인 소유: 15필지 / 미국인 소유: 1필지


김씨: 37필지 / 이씨: 29필지 / 박씨: 15필지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종로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집이 전부였던 동네 — 전 필지 대지의 의미

184 / 184

1912년 창성동 184필지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밭도 없고 · 임야도 없고 · 잡종지도 없습니다.


집이 전부였던 동네. 사람이 전부였던 공간이었습니다.

1912년 창성동의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합니다. 집이 전부였습니다. 184필지 전부가 대지였고, 면적 역시 50,740㎡로 온전히 대지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밭도 없고 임야도 없고 잡종지도 없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창성동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관청과 주거가 밀집된 공간이었고, 대한제국을 지나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살아 있는 동네'였습니다.

도시 안에서도 중심에 가까운 곳. 사람들이 모여 살 수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를 할 때 항상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지면 위는 조용해 보여도, 지면 아래에는 수백 년의 생활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184필지 전 필지 대지라는 사실은, 창신동의 밭 163필지나 청운동의 임야 6필지가 가지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중요성을 가집니다. 순수하게 사람의 삶이 집약된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국유지 3필지가 말해주는 국가의 흔적 — 사람의 공간

국유지는 단 3필지였습니다. 전체 184필지에서 1.6%에 불과합니다. 숫자만 보면 아주 적어 보이지만, 이 3필지는 꽤 상징적입니다. 국유지는 대부분 관청 부지이거나 공공 기능을 가진 공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창성동은 '국가의 공간'보다는 '사람의 공간'이 훨씬 넓었던 동네였습니다. 이 구조는 당시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삶을 꾸려가던 지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창성동 국유지 vs 민간 소유 비율 (184필지 기준)

민간 소유 181필지 (98.4%)

민간 소유 (181필지)

국유지 (3필지)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지역은 늘 흥미롭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아닌,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서 나오는 유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생생합니다. 그릇 하나, 기와 조각 하나에도 사람의 하루가 담겨 있습니다. 국유지가 적다는 건 이 공간이 국가에 의해 관리된 공간이 아니라, 수백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채워온 공간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삶의 흔적이 땅 아래에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씨·이씨·박씨, 성씨로 읽는 토지의 흐름

창성동의 토지 소유를 성씨로 보면 더 재미있어집니다. 김씨 37필지, 이씨 29필지, 박씨 15필지. 이 숫자들은 단순한 소유 현황이 아닙니다. 이 동네에 오래 정착한 가문들이 누군지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특히 김씨와 이씨의 비중은 창성동이 일시적인 거주지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 살아온 공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1912년 창성동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김씨 37필지

이씨 29필지

박씨 15필지

한 집이 한 필지였을 가능성이 높고, 골목 단위로 친족 관계가 이어졌을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김씨 37필지가 모여 있던 골목은 어느 방향이었을까, 이씨 29필지가 이웃해 있던 골목에는 어떤 담장이 있었을까. 이런 상상이 가능한 이유는 성씨 기록이 그만큼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는 발굴조사에서도 중요합니다. 주거 유적이 연속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고, 생활층이 잘 보존되어 있을 확률이 큽니다. 가문 단위의 집단 거주 공간에서는 공동으로 사용한 시설의 흔적, 즉 공동 우물, 골목 포장, 담장 기초 같은 것들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성동의 세 성씨가 남긴 흔적이 어떤 모습으로 땅속에 잠들어 있을지가 흥미롭습니다.


미국인 1·일본인 15필지가 남긴 질문

외국인 소유 토지는 많지 않지만, 의미는 작지 않습니다. 미국인 소유 1필지, 일본인 소유 15필지. 특히 일본인 소유 토지 15필지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숫자입니다. 전체 184필지 중 15필지면, 이미 동네 곳곳에 일본인의 거점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상점이었을 수도 있고, 관사나 임대주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1912년 창성동 토지 소유 구조 (184필지 기준)

조선인 등 (165필지, 90%)

일본인 15필지

기타

조선인 등 (165필지)

일본인 (15필지)

미국인·국유지 (4필지)

창성동의 조선인 소유 비율은 약 90%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청진동(94.7%), 청운동(97.9%)에 이어 높은 수준을 유지합니다. 이 동네는 식민지 토지 집중이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진 공간이었습니다. 그만큼 조선인들의 전통 생활 방식이 더 오래, 더 온전하게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런 공간은 전통 조선 생활 유구가 비교적 교란 없이 보존된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인 소유 1필지는 선교나 외교 관련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창성동 인근에는 조선 시대부터 선교사들의 활동 공간이 있었습니다. 이 1필지가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파악하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서양식 생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는 구역을 특정할 수 있습니다.




창성동 토지조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힌트

이 지점에서 창성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식민지 도시로 변해가던 서울의 한 단면이 됩니다. 조선인 90%의 생활 공간 위에, 일본인 15필지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역에서의 문화재 발굴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조선의 생활 흔적과 식민지기의 구조물이 겹쳐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창성동 문화재 지표조사 핵심 특성

🏠

전 필지 대지(184/184) → 순수 생활 역사층 집약, 생활 유구 밀집 가능성

🏛️

국유지 3필지만(1.6%) → 사람 중심의 민간 생활 공간, 관청 흔적 최소화

👨‍👩‍👦

김씨·이씨 집중 거주 → 세대 연속 주거, 가문 공동 시설 유구 가능성

🔍

조선인 소유 90% → 전통 생활 방식 유구 비교적 온전히 보존 가능성

⚖️

일본인 15필지 혼재 → 조선·일제 복합 층위, 시대 전환기 흔적 공존


도시 개발과 문화재 발굴, 창성동에서 배워야 할 것

이제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왜 이 기록이 지금 중요할까. 창성동 같은 지역은 재개발이나 소규모 정비 사업에서도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곳입니다. 이미 1912년에 완성형 주거지였다는 건, 그 이전의 흔적이 그대로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울 도심 곳곳에서 이런 유형의 동네에서 주거 유구, 배수로, 생활 유물이 연속적으로 확인된 사례가 많습니다. 사전에 조사를 진행한 곳은 공정 지연 없이 사업을 이어갔고, 그렇지 않은 곳은 중단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합니다. 기록을 존중했느냐, 무시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창성동처럼 조선인 90%의 생활 공간이 수백 년에 걸쳐 이어진 곳에서는, 땅속 어딘가에 그 모든 삶의 층위가 겹겹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층위를 사전에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하는 일입니다. 창성동의 184필지가 그 사실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물 산포 확인, 유적 가능성 판단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직접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조용하지만 강했던 동네, 창성동의 마지막 이야기



1912년 창성동은 조용한 숫자로 남아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여기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것. 여기는 이미 완성된 도시였다는 것. 그리고 이 도시의 기억은 땅 아래에서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김씨의 37필지, 이씨의 29필지, 박씨의 15필지. 이 세 가문이 나란히 살던 골목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골목의 담장 기초가 지금도 어딘가 땅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물 하나, 기와 조각 하나가 그 사람들의 하루를 증언합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생생한 역사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생생한 역사를 꺼내는 작업입니다. 창성동의 184필지가 그 작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창성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한 번쯤 발밑을 떠올려보세요. 그 아래에는 100년 전의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동 단위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종로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창성동 외에도 체부동, 통의동, 청진동, 청운동 등 다양한 동네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창성동 골목을 걷다 발밑을 떠올려주세요.그 아래에김씨의 담장이 있었고,이씨의 마당이 있었으며,박씨의 아이들이 뛰놀던 골목이 있었습니다.그릇 하나, 기와 조각 하나에사람의 하루가 담겨 있습니다.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장 생생한 역사가 거기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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