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창성동, 한 장의 토지대장이 들려주는 도시의 시작
- 서울 HI
- 2025년 12월 30일
- 3분 분량
목차
숫자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창성동의 첫인상
1912년 창성동, 184필지에 담긴 삶의 밀도
집이 전부였던 동네, 대지 50,740㎡의 의미
국유지 3필지가 말해주는 국가의 흔적
김씨·이씨·박씨, 성씨로 읽는 토지의 흐름
미국인 1필지, 일본인 15필지가 남긴 질문
창성동 토지조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힌트
도시 개발과 문화재 발굴, 창성동에서 배워야 할 것
조용하지만 강했던 동네, 창성동의 마지막 이야기
1장 숫자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 창성동의 첫인상
이 숫자들을 그냥 넘기면 정말 아깝다.
184필지, 50,740㎡.
이건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1912년의 창성동이 숨 쉬던 방식이다.
지금의 종로를 걷다 보면 높은 담장과 단정한 골목 사이로 과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토지조사부 한 장을 펼치는 순간, 이 동네는 갑자기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바뀐다.
2장 1912년 창성동, 184필지에 담긴 삶의 밀도
1912년, 종로구 창성동은 총 184필지로 이루어진 꽤 단단한 주거지였다.
필지 수와 면적이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이곳이 논이나 밭이 아닌, ‘사는 곳’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도시의 중심에서 이미 완성형에 가까웠던 동네였다는 뜻이다.

3장 집이 전부였던 동네, 대지 50,740㎡의 의미
1912년 창성동의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하다.
집이 전부였다.
184필지 전부가 대지였고, 면적 역시 50,740㎡로 동일하다.
밭도 없고 임야도 없고 잡종지도 없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창성동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관청과 주거가 밀집된 공간이었고, 대한제국을 지나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살아 있는 동네’였다.
도시 안에서도 중심에 가까운 곳.
사람들이 모여 살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이런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를 할 때 항상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지면 위는 조용해 보여도, 지면 아래에는 수백 년의 생활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4장 국유지 3필지가 말해주는 국가의 흔적
국유지는 단 3필지였다.
숫자만 보면 적어 보이지만, 이 3필지는 꽤 상징적이다.
국유지는 대부분 관청 부지이거나 공공 기능을 가진 공간일 가능성이 높다.
즉, 창성동은 ‘국가의 공간’보다는 ‘사람의 공간’이 훨씬 넓었던 동네였다.
이 구조는 당시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삶을 꾸려가던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지역은 늘 흥미롭다.
권력의 중심이 아닌,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나오는 유물은 화려하진 않지만 생생하다.
그릇 하나, 기와 조각 하나에도 사람의 하루가 담겨 있다.

5장 김씨·이씨·박씨, 성씨로 읽는 토지의 흐름
창성동의 토지 소유를 성씨로 보면 더 재미있어진다.
김씨 37필지.
이씨 29필지.
박씨 15필지.
이 숫자들은 단순한 소유 현황이 아니다.
이 동네에 오래 정착한 가문들이 누군지를 보여주는 지도다.
특히 김씨와 이씨의 비중은 창성동이 일시적인 거주지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 살아온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한 집이 한 필지였을 가능성이 높고, 골목 단위로 친족 관계가 이어졌을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런 구조는 발굴조사에서도 중요하다.
주거 유적이 연속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고, 생활층이 잘 보존돼 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6장 미국인 1필지, 일본인 15필지가 남긴 질문
외국인 소유 토지는 많지 않지만, 의미는 작지 않다.
미국인 소유 1필지.
일본인 소유 15필지.
특히 일본인 소유 토지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숫자다.
전체 184필지 중 15필지면, 이미 동네 곳곳에 일본인의 거점이 형성돼 있었다는 뜻이다.
상점이었을 수도 있고, 관사나 임대주택이었을 수도 있다.
7장 창성동 토지조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힌트
이 지점에서 창성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식민지 도시로 변해가던 서울의 단면이 된다.
그래서 이런 지역에서의 문화재 발굴은 늘 조심스럽다.
조선의 생활 흔적과 식민지기의 구조물이 겹쳐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8장 도시 개발과 문화재 발굴, 창성동에서 배워야 할 것
이제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왜 이 기록이 지금 중요할까.
창성동 같은 지역은 재개발이나 소규모 정비 사업에서도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이미 1912년에 완성형 주거지였다는 건, 그 이전의 흔적이 그대로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 도심 곳곳에서 이런 유형의 동네에서 주거 유구, 배수로, 생활 유물이 연속적으로 확인된 사례가 많다.
사전에 조사를 진행한 곳은 공정 지연 없이 사업을 이어갔고, 그렇지 않은 곳은 중단과 갈등을 겪었다.
이 차이는 단순하다.
기록을 존중했느냐, 무시했느냐의 차이다.

9장 조용하지만 강했던 동네, 창성동의 마지막 이야기
1912년 창성동은 조용한 숫자로 남아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목소리가 있다.
여기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것.
여기는 이미 완성된 도시였다는 것.
그리고 이 도시의 기억은 땅 아래에서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 글을 읽고 창성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한 번쯤 발밑을 떠올려보자.
그 아래에는 100년 전의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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