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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종로5가 토지 조사 기록 - 숫자로 드러난 일제강점기 직전 도시의 얼굴

  • 2025년 12월 28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 · 서울 도시사 · 종로구

지금 네가 지나치는 그 골목, 1912년엔 누군가의 밭이었다 — 종로5가 406필지에 숨겨진 진짜 서울 이야기

서울 종로5가. 지하철 1호선 출구를 나오면 병원과 약국, 노점상, 오래된 상가들이 뒤엉켜 있는 그 풍경. 근데 있잖아, 그 거리 밑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1912년, 이 자리엔 집보다 밭이 더 넓었고,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성씨는 이씨였으며, 일본인이 소유한 필지가 22개나 됐어.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종로5가를 빠짐없이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끝까지 읽으면 이 땅의 진짜 얼굴이 보일 거야.

목차

  1. 한 줄의 숫자가 도시를 말해주던 시절

  2. 406필지, 종로5가의 첫인상 — 밀도와 밀집의 공간

  3. 집보다 밭이 많았던 골목의 속사정

  4. 성씨로 읽는 종로5가의 권력 지도

  5. 국유지와 외국인 토지가 남긴 흔적

  6. 이 땅은 왜 지금 문화재 발굴의 핵심이 되었을까

  7. 종로5가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

  8. 숫자 뒤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한 줄의 숫자가 도시를 말해주던 시절

1912년이라는 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를까.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지 불과 2년 뒤, 조선총독부는 전국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어.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세금 부과를 위한 토지 정리였지만, 실제로는 식민 지배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공간 장악의 프로세스였지.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는 이 기록이야.

종로구 종로5가, 총 406필지, 면적 72,264㎡. 처음 보면 그냥 데이터처럼 느껴지지. 근데 이 숫자 하나하나가 사실은 사람이야. 이씨 할아버지가 대대로 지켜온 집터, 어느 조선인 여인이 매일 물을 주던 채소밭,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하루 벌어 하루를 버텼던 작은 가게. 숫자는 차갑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전혀 차갑지 않아.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이 시기의 토지 기록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돼. 땅의 역사를 알면, 그 땅 아래 무엇이 묻혀 있을지를 훨씬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거든. 지표조사는 단순히 지금의 지표면을 보는 게 아니라, 과거 토지 이용의 패턴을 읽어내는 복합적인 작업이야.

406

총 필지 수

72,264㎡

총 면적

347필지

대지 (집터)

59필지

전 (밭)


406필지, 종로5가의 첫인상 — 밀도와 밀집의 공간

406필지라는 숫자를 들으면 얼마나 빽빽한 공간인지 감이 잘 안 올 수 있어. 쉽게 비교해볼게. 같은 시기 중구 충무로5가는 88필지였는데, 종로5가는 그것의 거의 5배에 가까운 406필지였어. 같은 도심이어도 종로5가가 훨씬 세밀하게 쪼개진 공간이었다는 뜻이야. 필지가 많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거고, 그 안에 삶의 결이 더 촘촘하게 쌓여 있었다는 증거야.

총 면적 72,264㎡는 축구장 약 10개 크기야. 지금 종로5가 일대를 직접 걸어보면 알겠지만, 이 공간이 100년 전에 이렇게 빽빽하게 필지로 나뉘어 있었다는 게 쉽게 상상이 안 돼. 하지만 그 촘촘함이 바로 종로5가를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항상 우선순위에 두는 이유 중 하나야. 밀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생활 유구가 땅 아래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거든.

대지 (집터)

347필지 · 50,106㎡

85.5%

전 (밭)

59필지 · 22,158㎡

14.5%

국유지

1필지

0.25%

흥미로운 건 이 공간이 당시에 이미 생활과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복합 공간이었다는 점이야. 단순한 주거지도 아니고, 순수한 상업지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공간. 문화재 발굴 전문가들이 이런 복합 공간을 특히 주목하는 이유가 있어. 한 지점에서 여러 시기와 여러 용도의 유구가 동시에 확인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야.



집보다 밭이 많았던 골목의 속사정

이제 이 데이터에서 가장 반전 같은 부분을 이야기할게. 1912년 종로5가에는 밭이 59필지, 22,158㎡나 있었어. 지금 종로5가 하면 병원 골목, 약재상, 노점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잖아. 거기에 밭이 있었다고? 그것도 축구장 3개 크기의 농경지가?

이 사실이 단순히 신기한 것에서 그치지 않아. 도심 한복판에 대규모 경작지가 존재했다는 건, 종로5가가 1912년 시점에 아직 완전한 도시화 단계에 진입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야. 주거 공간과 농경 공간이 같은 블록 안에 뒤섞여 있는, 그런 과도기적 풍경이 펼쳐져 있었던 거지.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가져. 경작지는 기본적으로 대규모 토목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땅이야.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과정은 지층을 크게 교란시키지 않아. 그 말은 농경지였던 곳의 하부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시기의 층위가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야. 종로5가의 59필지 밭 구역이 문화재 발굴의 핵심 타깃이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야.

실제 사례로 보자면, 서울 북촌과 인사동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확인됐어. 조선 시대에 텃밭이나 채마밭으로 사용됐던 구역에서 그 아래 조선 전기 또는 고려 시대의 유구가 발견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거든. 땅의 사용 이력이 그 아래 시간의 보존 상태를 결정하는 거야.



성씨로 읽는 종로5가의 권력 지도

토지 소유 성씨를 보는 건 그냥 가계도 구경이 아니야. 어느 가문이 어느 위치에 얼마만큼의 땅을 가졌는지를 파악하면, 당시 그 지역의 힘의 흐름이 보여. 종로5가의 성씨별 소유 분포는 꽤나 뚜렷한 위계를 보여주고 있어.

이씨

94

필지

김씨

79

필지

류씨

13

필지

권씨

12

필지

박씨

16

필지

최씨

15

필지

신씨

10

필지

일본인

22

필지

이씨 94필지, 김씨 79필지. 이 두 성씨만 합치면 173필지야. 전체 406필지 중 42.6%를 두 성씨가 쥐고 있었다는 뜻이야. 이 정도 집중도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이씨와 김씨 가문의 일부가 종로5가 일대에서 대대로 영향력을 행사해온 토착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들의 거주지와 활동 반경이 지금도 지하에 흔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어.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는 이런 성씨 분포 데이터를 발굴 조사의 사전 분석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 특정 가문이 집중적으로 소유한 구역에는 그 가문의 건물 기초, 생활 유구, 제례 관련 시설 등이 집적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지표조사 보고서에 성씨 분포가 반드시 포함되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흥미로운 건 류씨 13필지의 위치야. 류씨는 조선 시대 종로 일대에서 상업 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가문으로 알려져 있어. 이들이 보유한 13필지가 어느 구역에 집중되어 있었는지를 추적하면, 당시 종로5가에서 어느 골목이 상업의 중심이었는지를 역추적할 수 있어. 과거의 필지 기록이 현재의 발굴 설계도가 되는 순간이야.



국유지와 외국인 토지가 남긴 흔적

종로5가의 국유지는 단 1필지였어. 전체 406필지 중 하나. 비율로 보면 0.25%에 불과한데, 이 1필지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위치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다만 이 시기의 국유지는 대부분 행정 기관, 경찰 파출소, 또는 세금 수납 관련 시설로 사용됐어. 작은 숫자지만 식민 통치 인프라의 물리적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숫자가 있어. 일본인 소유 22필지, 중국인 소유 1필지. 중국인 소유 토지는 1필지에 불과하지만, 일본인 소유 22필지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야. 전체의 5.4%를 차지하는 건데, 강제병합 초기에 이 정도 규모의 외국인 토지 소유가 이루어졌다는 건, 경제적 침투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됐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야.

충무로5가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극명해. 충무로5가는 79필지(89.7%)가 일본인 소유였는데, 종로5가는 22필지(5.4%)야. 이 차이는 두 지역이 식민 자본에 의해 잠식된 속도와 방식이 달랐다는 걸 보여줘. 종로5가는 조선인 토착 세력이 훨씬 강하게 버티고 있던 공간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해.

실제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외국인 소유 토지가 있던 구역은 특별한 주의가 필요해. 이 구역에는 조선 전통 건물 기초와 일본식 건물 기초가 겹쳐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 층위가 복잡하게 교차되는 만큼, 발굴 시 더 세밀한 분석이 요구돼. 종로5가의 22필지 일본인 소유 구역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지표조사의 우선 대상이 돼.


이 땅은 왜 지금 문화재 발굴의 핵심이 되었을까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이나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해당 지역에 매장 문화재가 있을 가능성을 사전에 평가하는 작업이야. 단순히 땅 표면을 살피는 게 아니라, 역사 기록과 토지 이용 패턴, 지형 데이터를 종합해서 그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를 예측하는 과학적 프로세스야.

종로5가는 이 기준에서 거의 모든 항목에 체크가 들어오는 지역이야.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도심 기능, 주거와 농경이 공존했던 복합 토지 이용, 다양한 성씨의 토착 세력, 외국인 소유 토지의 존재, 그리고 도시 기반 시설의 미비. 이 다섯 가지 조건이 한꺼번에 충족되는 지역은 서울에서도 드물어.

성공 사례를 하나 들어볼게. 2010년대 중반,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서 대형 복합 건물 신축 공사가 예정됐을 때 의무적으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단서가 나왔어. 조선 시대 골목의 흔적과 도로 시설이 확인됐고, 이것이 시굴조사로 이어졌지. 결국 그 아래에서 조선 후기 생활 유구층이 확인되면서 공사 일정 자체가 조정됐어. 지표조사 한 번이 수백 년의 역사를 지켜낸 거야.

종로5가도 그런 가능성의 땅이야. 406필지의 기록이 지금 이 순간에도 땅 아래 잠들어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 거야. 발굴 기관들이 종로5가를 서울 도시 형성사의 핵심 퍼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종로5가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

406필지의 기록을 따라오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겨. 이 땅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지금은 누구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이씨 94필지, 김씨 79필지. 이 숫자들 뒤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그들의 후손은 이 땅을 기억하고 있을까.

도시는 항상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아래에는 이전 것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어. 종로5가의 지하도 마찬가지야. 지금 저지대 주차장이 있던 곳에 어쩌면 이씨 가문의 기와집 기초가 잠들어 있을 수 있어. 지금 약국 앞 보도 블록 아래에 1912년 누군가의 밭이 있었을 수도 있어.

이 질문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게 정상이야. 우리가 편리하게 쓰는 도시 공간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아는 순간,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거든. 문화재 발굴이 불편한 진실을 꺼내는 작업인 것처럼, 이 기록을 읽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작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숫자 뒤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거야. 1912년 종로5가의 406필지 기록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야. 그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살아 있는 데이터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물건을 찾아내는 것에 있지 않아.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 이름 없이 지나간 일상들, 그 무게를 현재로 불러오는 작업이거든.

이씨 할아버지의 94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59필지의 밭에서 채소를 키우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22필지를 사들인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그 사람들이 살았고, 숨 쉬었고, 그 땅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는 것만은 이 숫자들이 증명하고 있어.

종로5가를 다음에 지나갈 때, 딱 한 번만 발밑을 의식해봐. 그 발걸음 아래 얼마나 많은 시간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겹쳐 있는지를. 문화재 발굴 기관이 이 땅을 파는 건 바로 그 시간과 그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기 위한 거야. 그리고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너는, 지금 그 작업의 일부를 함께 한 거야.



이 땅은 언제나 기억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보지 않았을 뿐.지금 눈을 뜨면,종로5가의 406필지가여전히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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