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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종로4가, 숫자로는 보이지 않는 골목의 기억들

2025년 12월 27일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서울 역사

지금 네가 밟고 있는 그 땅 아래에, 조선이 살아 있다— 1912년 종로4가 토지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의 연결고리


서울문화유산 · 문화재 발굴, 지표조사, 종로구 역사

당신이 모르는 사실 하나.


지금 종로 거리를 걸을 때마다,


당신 발아래엔 100년 전 사람들의 집이 있다.

문화재 발굴이라고 하면 산속 어딘가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 그런데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한복판에서 땅을 파면 조선시대 기단석이 나오고, 우물이 나오고, 누군가가 쓰다 남긴 도자기 조각이 나와. 그게 가능한 이유는 딱 하나야. 이 도시가 수백 년 동안 같은 자리 위에 쌓여왔기 때문이야. 그 시작점을 보고 싶다면, 1912년 종로4가 토지조사 자료를 들여다봐. 숫자 하나가 이야기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거야.


목차

  • 1장. 종로4가, 192필지 안에 담긴 서울의 민낯

  • 2장. 191필지의 집터 — 땅을 파면 반드시 무언가 나오는 이유

  • 3장. 단 1필지의 도로가 말해주는 도시 구조의 비밀

  • 4장. 성씨로 읽는 종로4가의 사회 지형도

  • 5장. 법인·일본인 소유 토지, 시대의 균열을 숫자로 보다

  • 6장.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발굴의 첫 관문

  • 7장. 1912년 토지조사가 오늘날 발굴조사에 주는 의미



1종로4가, 192필지 안에 담긴 서울의 민낯

1912년, 일제는 조선 전역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했어. 이름은 그럴듯하게 '조사'였지만, 실제로는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면적은 얼마인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낱낱이 기록하는 작업이었지. 그 과정에서 종로4가도 정확히 측량되고 분류됐어. 결과는 이랬어. 총 192필지, 면적 26,314제곱미터. 숫자만 보면 그냥 행정 자료야. 그런데 그 숫자를 하나씩 뜯어보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돼.

종로4가는 당시 조선의 심장부였어. 종로대로와 맞닿아 있었고, 골목 안쪽으로는 주거지와 상점이 빽빽하게 뒤섞여 있었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필지가 잘게 나뉘어 있기 마련이야. 192개라는 숫자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좁은 땅 위에서 서로의 경계를 맞대며 살았다는 뜻이야.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보면 이건 굉장히 중요한 신호야. 밀도가 높은 구도심일수록 지하에 남아 있는 생활 흔적도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쌓여 있거든.

192

총 필지 수

26,314㎡

총 면적

191

대지(집터) 필지

1

도로 필지

5

일본인 소유 필지

2

법인 소유 필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전역 25개 구의 지역조사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어. 종로구부터 강동구까지 각 동별 토지 현황을 분석해서 어느 지역이 문화재 지표조사나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우선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데이터로 보여주는 작업이야. 그 자료 안에서 종로4가는 특히 눈에 띄는 케이스야. 대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필지가 촘촘하게 나뉘어 있어서 조사 대상으로서 리스크와 발굴 가능성 모두 높은 지역으로 분류되거든.


2191필지의 집터 — 땅을 파면 반드시 무언가 나오는 이유

총 192필지 중 191필지가 대지였어. 비율로 따지면 99.5퍼센트야. 거의 모든 땅이 사람이 살던 집터였다는 거야. 면적으로는 약 26,000제곱미터. 이 숫자가 왜 중요하냐면, 땅을 어떻게 쓰고 있었느냐가 지하 유적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야. 집터에는 생활 흔적이 쌓여. 우물, 배수로, 온돌 흔적, 기단석, 그리고 사람들이 쓰다 버린 도자기와 금속 유물들. 이것들이 층층이 쌓여서 하나의 타임캡슐처럼 땅속에 보존되는 거야.



실제로 서울 도심에서 이루어진 문화재 발굴 성공 사례들을 보면 이 패턴이 반복돼. 고밀도 주거지는 조사 착수 전부터 이미 '주의 구역'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일대에서는 주택 신축 공사 전 발굴조사를 진행하다가 조선시대 토기와 제기가 나온 사례가 있어.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가문의 의례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어. 그 유물 하나가 그 동네의 성격을 완전히 다시 쓰게 만들었지. 종로4가도 마찬가지야. 191필지의 집터라는 건, 조사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엄청난 양의 역사 정보가 나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땅이라는 뜻이야.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대지 비율이 높은 지역은 시굴조사 및 정밀발굴조사 전환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 191필지 집터는 단순한 주거 데이터가 아니라, 조사 범위와 깊이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야.


3단 1필지의 도로가 말해주는 도시 구조의 비밀

도로는 단 1필지, 314제곱미터. 전체 26,314제곱미터 중 고작 1.2퍼센트야. 보잘것없어 보이지? 그런데 이 도로 하나가 종로4가 전체의 생활 동선을 결정했어. 사람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는지, 상점이 어느 쪽을 향해 문을 열었는지, 물자가 어느 방향으로 흘렀는지. 그 모든 게 이 작은 도로를 중심으로 짜여 있었어.

문화재 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서 도로 흔적은 굉장히 중요한 기준점이 돼. 도로를 경계로 해서 유구의 배치 방향이 달라지거든. 도로 쪽을 향한 건물 기단과 안쪽을 향한 구조물은 성격이 완전히 달라. 상업 공간과 주거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도로를 기준으로 드러나는 거야. 발굴 현장에서 도로층을 찾아내는 건 그래서 굉장히 설레는 순간이야. 그 아래부터는 그 도시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거든.



314제곱미터의 도로 흔적이 종로4가 전체 유적의 방향성을 설명해주는 핵심 열쇠가 될 수 있어. 현재 재개발이나 건축 허가가 진행될 때 문화재조사 의무가 적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 도시는 같은 자리 위에 계속 쌓이고, 도로는 바뀌지 않거나 아주 조금씩만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과거 도로의 위치를 알면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있거든.


4성씨로 읽는 종로4가의 사회 지형도

토지조사 자료에 기록된 소유자 이름을 분석하면 놀라운 패턴이 보여. 김씨 32필지, 이씨 31필지, 박씨 18필지. 상위 세 성씨가 전체 필지의 약 4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어. 이건 단순한 소유 통계가 아니야. 당시 종로4가에는 특정 가문과 혈연 집단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며 서로 인접한 땅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줘. 조선 후기부터 이어지던 가문 중심 거주 문화의 흔적이 1912년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거야.



문화재 발굴 해석 단계에서 이 정보는 굉장히 중요하게 활용돼. 동일 가문 소유지에서는 유사한 유물군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거든. 같은 장인에게서 만든 도자기, 같은 형식의 기단 구조, 비슷한 방향의 건물 배치. 이게 반복되면 발굴단은 그 지역 전체의 생활 문화를 훨씬 더 정밀하게 복원할 수 있어. 즉, 성씨 분포라는 사회적 데이터가 고고학적 해석의 정밀도를 높이는 도구가 되는 거야. 종로4가는 그런 의미에서 무작위로 형성된 공간이 아니라, 혈연과 경제적 관계가 얽힌 촘촘한 공동체 공간이었어.


5법인·일본인 소유 토지, 시대의 균열을 숫자로 보다

법인 소유 토지 2필지, 일본인 소유 토지 5필지. 전체의 3.6퍼센트에 불과한 숫자야. 그런데 이 작은 비율이 가진 상징성은 엄청나. 1912년은 경술국치가 일어난 지 불과 2년밖에 안 된 시점이야. 식민 지배의 물리적 흔적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미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거야. 이 7필지는 아마도 종로4가에서 가장 요지에 있었을 거야. 상업적 가치가 있거나, 향후 개발을 염두에 두고 선점한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토지들을 조사하면 독특한 패턴이 나타나. 구조물이 비교적 빠른 시기에 훼손되거나 재건축된 흔적이 보이는 경우가 많아. 원래 있던 조선식 건물이 철거되고 새로운 구조물이 들어선 과정이 지층에 그대로 기록돼 있거든. 이건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야. 지금도 도심 재개발 현장에서 문화재조사 범위를 설정할 때 토지 소유 이력이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동하거든. 어떤 땅이 어떤 시기에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아야 어느 층위에서 어떤 유적이 나올지 예측할 수 있어.


6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발굴의 첫 관문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건드리기 전에 이 땅에 문화유산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단계야. 지표 위에 드러난 유물이나 유적의 흔적, 지형의 특성, 역사 기록 등을 종합해서 '여기를 파도 되는가'를 판단하는 거야. 사업 면적이 3만 제곱미터 이상인 건설공사를 진행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해. 법으로 정해진 의무야.



지표조사가 끝나면 그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서 국가유산청에 제출해야 해. 국가유산청은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해당 지역에 어떤 보존 조치가 필요한지 통보해줘. 원형 보존, 이전 복원, 발굴조사 등 여러 선택지가 있어. 그중에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그다음 단계로 표본조사(조사 면적의 2% 이내), 시굴조사(10% 이내), 정밀발굴조사가 순차적으로 진행돼.

발굴을 통해 중요한 유적이 발견되면 사적이나 지방기념물로 지정되고, 출토된 중요 유물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기도 해. 땅을 파는 행위가 국가 문화유산을 탄생시키는 순간이 되는 거야. 이 과정에서 1912년 종로4가 같은 토지 기록이 기초 자료로 활용돼. 어떤 땅이었는지, 누가 살았는지, 어떻게 쓰였는지를 알아야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방향을 잡을 수 있거든.


71912년 토지조사가 오늘날 발굴조사에 주는 의미

종로4가 토지조사 자료는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설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 돼. 대지 비율이 높고 필지가 촘촘할수록, 그리고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을수록, 지하에 남아 있는 유적의 밀도와 다양성은 높아지거든. 종로4가는 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실제로 서울 도심에서 성공적으로 문화유산이 발굴된 사례 상당수가 바로 이런 고밀도 구도심 지역이었어. 주택 한 채를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조선 후기 생활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것이 그 동네 전체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어.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들이 종로구부터 시작해서 서울 전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어. 발굴은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야. 기록이 준비될수록, 발굴의 정밀도와 성공 가능성은 올라가거든.

지금 서울에서 건물을 짓거나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면, 그 땅이 과거에 어떤 곳이었는지 먼저 확인해봐.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에는 반드시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나 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어. 절차를 제대로 밟는 것이 법적 리스크를 줄이는 동시에, 그 땅이 가진 진짜 가치를 발견하는 길이야.

종로4가의 192필지는 숫자가 아니야. 그 안에 사람이 살았고, 가족이 있었고, 길이 있었어. 땅을 존중하는 것은 그 기억을 존중하는 일이야.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파헤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보살피는 일이야.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지금 네가 걷는 종로의 바닥 아래에, 100년 전 누군가가 살았어.

그 사람의 집터에서 어쩌면 지금도 도자기 조각 하나가 숨을 참고 있을 거야.

우리가 그 땅을 조심히 다루는 이유는, 그 기억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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