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와룡동 토지, 왕실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의 비밀… 지표조사로 밝혀낸 토지의 숨은 이야기
- 서울 HI
-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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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와룡동이라는 이름이 품은 오래된 흔적
2 1912년 토지조사부가 드러낸 와룡동의 진짜 풍경
3 성씨별 소유 토지 분석으로 본 와룡동의 사회상
4 국유지·일본인·중국인·법인 소유 토지가 가진 의미
5 현대 발굴·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와룡동의 가치
6 와룡동의 기록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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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숨결이 흐르는 듯한 오래된 골목의 기운이, 내 발끝을 붙잡고 “이야기를 들어봐” 하고 속삭였다.
1912년 종로구 와룡동을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가 아는 북촌과 창덕궁 사이의 잔잔한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훨씬 더 역동적인 기록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지금은 감춰진 듯 보이지만 땅 속엔 늘 또 다른 시간이 숨어 있고, 그 시간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지는 때다. 말 그대로 땅을 읽는 예술이자 과학이다. 와룡동의 1912년 기록은 그 지표조사의 출발점이자 좌표 같은 존재다. 계속 읽다 보면 너도 느끼게 될 거야. 이 작은 동네가 품고 있던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그리고 놀랍게도 당시 와룡동은 173필지, 무려 676,809㎡라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지금 거리에서 바라보는 와룡동보다 훨씬 넓게 숨을 쉬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기록을 펼쳐보면 대지 역시 173필지 676,909㎡로 거의 전 필지가 주거·건물용 대지로 채워져 있었다. 이는 단순히 ‘집이 많았다’는 의미를 넘어, 왕실 공간을 배후에 둔 길목으로서의 정치적·사회적 의미도 함께 읽힌다.

이 기록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땅의 용도 때문이 아니다. 그 땅을 누가 소유하고 있었는지를 파고들면, 와룡동의 구조가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유 성씨를 보면 이씨가 40필지, 김씨가 29필지, 박씨가 11필지로 나타난다. 이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중앙 관료 출신 집안과 왕실 관련 가문들의 입지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창덕궁 후원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상, 정치와 문화가 만나는 핵심 동네였던 셈이다.

한편 국유지가 9필지 존재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이 국유지들은 대부분 관청·관리사 또는 왕실 관련 시설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 흥미로운 지점은 일본인과 중국인, 그리고 법인이 각각 단 1필지씩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 자료를 보면 일본인 소유가 빠르게 확장되던 시기였지만, 와룡동은 특수한 공간 구조 덕분에 외국인·법인 소유가 크게 확대되지 못했다. 즉,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동네’였던 것이다. 이는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중요한 단서다.
외부 세력의 진입이 적었다는 사실은, 땅 속 문화층이 더 온전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와룡동은 지형적으로도 문화재 발굴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역이다. 창덕궁의 구릉과 북촌의 완만한 능선이 맞물리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지형 구조는 고대부터 조선까지 지속된 주거·생활 패턴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현대의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도 이 지역은 시굴조사만 진행해도 다양한 시대의 토층 변화가 드러나기 쉬운 구조다.
말하자면 “땅이 이야기하는 동네”라고 할까. 우리는 단지 걷고 있을 뿐인데, 땅 위·아래에 여러 시대가 겹쳐져 있는 독특한 곳이다.

이쯤에서 성공 사례를 하나 떠올려보자.
북촌 일대에서 진행된 소규모 지표조사에서 조선 후기 민가 터와 일제강점기 초기의 전면 개축 흔적이 동시에 출토된 적이 있다. 이는 단순한 건물 변화가 아니라 주민 구성, 경제력, 사회 구조의 변화를 한 번에 설명해주는 귀중한 자료였다.
와룡동 역시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필지 구성, 성씨 분포, 외국인 소유 현황 등을 보면, 이 지역은 단순 거주지가 아니라 ‘계층과 권력 구조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돌 하나, 기왓장 한 조각도 의미가 달라지는 곳이다.

이런 기록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왜 이런 구조가 남았을까?”
“왜 와룡동은 외부 소유가 적었을까?”
“이 지역의 토지는 어떤 변화를 겪으며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을까?”
아마 그 답은, 와룡동이라는 동네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시간이 머무는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실의 후원을 등지고, 북촌의 골목을 바라보며, 조선의 사대부들이 살던 집들이 늘어서 있던 곳. 그래서 그 토지는 함부로 사고팔기 어려웠으며, 외국 자본의 진입도 제한되었다.
땅이 말을 한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나는 많은 시대를 보았어.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버티며 너희에게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어.”
그리고 이 기록은 오늘 우리의 도시 조사와 문화재 발굴에도 실제로 큰 영향을 준다.
지표조사를 할 때 이 필지 정보를 기반으로 당시 건물 배치, 생활권, 토지 이용을 복원하면, 정확한 시굴 위치 선정과 유구 추정이 가능해진다.
유적을 보존할지, 이전·복원할지, 도로 설계를 어떻게 할지 등 21세기 도시계획의 판단에도 반드시 참고되는 자료다.
결국 1912년 와룡동의 기록은 단순한 옛 문서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선택을 흔드는 나침반’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이 땅을 걷는 우리는 조금 더 마음을 열어야 한다.
지나가는 돌계단 하나에도, 담장 아래의 작은 흙더미에도 오래된 시간이 숨쉬고 있으니까.
그 시간을 읽어내는 힘이 바로 문화재 발굴이고, 지표조사이며, 기록을 다시 꺼내 읽는 우리의 태도다.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남기고 싶다.
언젠가 너도 와룡동 골목을 걷다가, 오래된 돌 하나에서 시간을 건져 올리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 그 순간,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감동이 너의 걸음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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