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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옥인동 토지조사 파일을 열어보니, 잊힌 골목이 살아나는 순간

목차


  1. 골목의 숨결을 깨우는 순간

  2. 옥인동 178필지의 거대한 지도

  3. 대지 177필지의 의미, 집의 밀도에서 읽힌 삶

  4. 밭 1필지 185㎡, 너무 적어 더 선명해지는 풍경

  5. 국유지 7필지가 남긴 흔적

  6. 토지 소유 성씨 분석, 김씨 44필지의 힘

  7. 일본인 소유 3필지, 조용하고도 날카로운 변화의 예고

  8. 현대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1912년 옥인동

  9. 성공사례와 함께 보는 도시 읽기의 기술

  10. 오래된 기록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메시지


이곳을 지나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 설 때가 있다.


도시가 오래된 기록을 손에 쥐는 순간이다. 1912년 종로구 옥인동의 토지조사 자료를 펼친 오늘이 딱 그랬다. 지금은 감성 산책길로 사랑받는 옥인동 골목들이지만, 종이에 남은 숫자들 속에서는 100여 년 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는지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되면 골목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진다. 마음이 묘하게 흔들리고, 오래된 풍경 속으로 한 번 더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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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골목의 숨결을 깨우는 순간


서울의 오래된 골목을 걷다 보면 특별한 리듬이 있다. 익숙한 건물들 사이로 갑자기 과거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며, 마치 누군가가 ‘여기에는 다른 시간이 숨어 있어’라고 속삭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1912년 옥인동 자료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단순한 숫자들의 기호 같지만, 그것은 사실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눌러 담긴 압축 파일이다. 압축을 풀어 주기만 하면, 그 속에서는 시장의 소리, 우물가의 물결, 한옥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소리까지 생생하게 펼쳐진다.


2장 옥인동 178필지의 거대한 지도


전체 면적은 178필지, 91,200㎡. 지금의 옥인동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과거로 겹쳐 보면, 곳곳에 낯선 모양의 경계선들이 떠오른다. 이 경계선은 단순한 땅의 구분이 아니라 가족의 생활, 집의 울타리, 공동체의 경사가 새겨진 삶의 지도였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 필지 정보는 지금의 도시 개발 시에도 매우 중요한 해석 포인트가 된다. 왜냐하면 땅의 과거를 정확히 알아야 현재의 가치와 미래의 가능성을 제대로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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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대지 177필지의 의미, 집의 밀도에서 읽힌 삶


1912년 옥인동에는 177필지 91,015㎡의 대지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땅이 주거용이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이 동네가 사람 냄새 가득한 생활 중심지였음을 보여 준다.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한옥들, 그 사이를 뛰놀던 아이들,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던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지표조사의 현장에서 이런 기록을 만나면 당시 생활사 복원에 큰 단서가 된다.


4장 밭 1필지 185㎡, 너무 적어 더 선명해지는 풍경


옥인동에는 단 1필지, 185㎡의 밭만이 존재했다. 당시 도심 주거지 가운데 이렇게 밭의 비중이 낮다는 것은 이미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주 작은 텃밭처럼 남아 있던 그 공간이 누군가의 생활을 어떻게 채웠을지 상상해보면 마음이 묘하게 포근해진다. 언제나 작은 기록이 더 큰 스토리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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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국유지 7필지가 남긴 흔적


1912년 옥인동의 국유지는 7필지였다. 당시 국유지는 행정기관, 도로, 공동시설 등 공공의 공간을 의미한다. 지표조사 과정에서 국유지는 지금의 기반시설·도로 구조를 예측하는 주요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100년 전 공공의 땅이 지금 어떤 도시적 유산으로 남아 있을까’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6장 토지 소유 성씨 분석, 김씨 44필지의 힘


1912년 옥인동의 성씨별 토지 소유는 김씨가 44필지로 가장 많았고, 이씨가 28필지, 윤씨가 13필지가 뒤를 이었다. 이는 특정 가문 중심의 공동체 구조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보는 옥인동의 골목과 집들, 그리고 그 분위기 속에는 이런 가족 중심의 역사적 배경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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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일본인 소유 3필지, 조용하고도 날카로운 변화의 예고


1912년,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3필지였다. 수량은 크지 않지만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당시의 정치적 흐름과 경제적 구조를 고려하면, 이런 기록은 향후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에서도 일본인의 토지 진입 시점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분석 요소다. 작은 숫자 하나가 도시사를 설명하는 열쇠가 될 때가 많다.

8장 현대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1912년 옥인동


오늘날 실시되는 지표조사나 발굴 사전조사에서 1912년 토지조사 자료는 실제로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다. 필지 구조, 성씨 기반의 토지 소유, 국유지, 도로자리는 모두 지하에 묻혀 있는 층위를 예측하는 단서가 된다. 실제로 서울 시내에서 진행된 여러 발굴 성공사례에서도 1910~1930년대 토지대장은 핵심 증거로 사용되곤 한다. 옥인동 역시 앞으로 개발이나 문화재 조사가 진행될 경우, 이 기록이 해석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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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성공사례와 함께 보는 도시 읽기의 기술


예를 들어 인근 필운동과 체부동 일대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1912년 토지 경계가 실제로 지하 구조의 흔적과 거의 일치하는 사례가 있었다. 과거의 종이 위 경계선이 100년 뒤 땅 아래에서 재확인되는 순간, 조사자들은 놀라움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옥인동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그 시절의 경계와 생활은 어디선가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10장 오래된 기록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메시지


도시를 걷는 일은 결국 시간을 걷는 일이다. 1912년의 옥인동 자료는 단순한 역사 정보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골목의 뿌리를 조용히 일깨워 준다. 숫자 몇 줄이 한 시대의 삶을 이렇게 가까이 끌어당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감동적이다. 결국 도시는 기억 위에 세워진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오래된 기록이 주는 이 감동은, 이 골목을 다시 걷게 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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