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연건동, 땅 위에 남겨진 흔적을 따라가다
- 서울 HI
- 7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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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연건동의 오래된 숨결을 마주하는 순간
1912년 토지 기록 속에서 발견한 연건동의 진짜 모습
대지·밭·국유지가 말해주는 생활의 흔적
성씨별 토지 소유, 그리고 미국인·일본인의 존재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이 기록이 의미하는 것
1912년 연건동이 남긴 메시지와 감동의 결말
도시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순간, 사람들은 늘 생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1장 연건동의 오래된 숨결을 마주하는 순간

1912년의 연건동을 떠올리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학가의 번잡함이나 골목의 활기를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의 기록을 펼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깊게 묻힌 유물 하나가 표면을 드러내듯, 토지대장에 적힌 숫자와 성씨, 면적들은 오래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발자국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흙을 걷어낼 때마다 나오는 작은 조각들이 거대한 역사를 설명해주듯, 연건동의 토지 구성 역시 단순한 부동산 정보가 아니라 삶의 형태를 비추는 기록이었다. 당시 329필지, 총 269,868㎡라는 규모는 현재와 확연히 다른 공간적 밀도를 품고 있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일상의 숨결이 쌓여 있었다.
2장 1912년 토지 기록 속에서 발견한 연건동의 진짜 모습

연건동 전체 면적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235필지, 225,558㎡의 대지였다. 이는 단순히 집이 많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연건동이 1912년 기준으로도 상당한 주거 밀집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주거 유적이 발견되는 지역은 대부분 과거에도 사람이 오래 정착해 온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연건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지의 면적이 매우 넓었던 이유는 당시의 한옥 구조가 지금의 건물보다 더 많은 땅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골목과 마당, 창고, 텃밭 등으로 구성된 주거 형태는 지금보다 더 넓게 주변 공간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를 보면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생활 방식 전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이었던 것이다.
3장 대지·밭·국유지가 말해주는 생활의 흔적

연건동에는 밭도 94필지, 44,310㎡나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 연건동이 ‘반도시·반농촌’의 경계를 이루던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도시 중심부라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지표조사나 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연건동 일대에서 조선 후기~일제강점기의 농경 흔적이 꽤 자주 발견된다. 밭이 있었다는 것은 곧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쌀·보리·채소류가 주로 재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주변의 생활사와 연결된다.
또한 국유지 8필지는 당시 행정기관·공공시설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조사에서 국유지가 있던 자리에서 관아 건물지나 공용 창고지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기록 하나로 우리는 당시의 행정 동선을 유추할 수 있고, 현재 발굴조사 방향 설정에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결국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발굴조사의 첫 번째 단서가 된다.
4장 성씨별 토지 소유, 그리고 미국인·일본인의 존재

연건동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성씨는 김씨와 이씨로 각각 53필지였다. 뒤이어 최씨 16필지, 정씨 15필지, 임씨 12필지, 강씨와 박씨가 각각 10필지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성씨 구성은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연건동의 전통적 주민 구조를 반영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외국인의 토지 소유다. 당시 미국인은 3필지, 일본인은 무려 21필지나 소유하고 있었다. 이 현상은 일제강점기의 토지 정책과 관련된다. 특히 일본인이 집중적으로 땅을 취득한 지역에서 현재 발굴조사를 진행하면 축대, 돌담, 관정, 근대기 건축 잔해 등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즉, 이 데이터는 연건동에서 근대 문화층이 존재할 가능성을 매우 높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실제로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근처 혜화동 일대 발굴에서 일본식 가옥 기단과 도기류가 발견되며 지역 생활사를 복원한 적이 있다. 연건동도 동일한 맥락에서 접근하면 발굴 가치가 상당히 높은 지역으로 평가될 수 있다.
5장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이 기록이 의미하는 것

문화재 지표조사는 현재 땅 위에 드러난 흔적을 통해 과거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탐색’의 과정이다. 연건동처럼 1912년 토지 기록이 명확한 지역은 지표조사를 할 때 큰 방향성을 준다. 예를 들어 지표조사에서 기와편, 토기 조각, 근대기 건축 잔재가 발견될 경우, 1912년 토지대장과 비교해 당시 어떤 성씨의 집이 있었는지, 주변의 밭이 어디였는지 등을 대조하여 시굴조사 구역을 설정할 수 있다.
즉, 1912년 자료는 단순 역사 기록이 아니라 발굴 현장에서 바로 활용 가능한 ‘지도’ 역할을 한다. 연건동처럼 성씨와 필지 수가 뚜렷하게 기록된 지역은 특히 유구의 층위 추정에도 큰 도움이 된다. 어떤 구역에 근대기 문화층이 쌓였고, 어떤 구역이 조선 후기 생활 공간이었는지를 재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록과 발굴이 연결되는 순간, 과거는 더 이상 추상이 아니라 실제 공간이 된다.
6장 1912년 연건동이 남긴 메시지와 감동의 결말

연건동의 1912년 기록을 다시 바라보면, 이는 단지 ‘땅의 크기’나 ‘필지 수’를 적어둔 문서가 아니라 오래전 이곳을 살았던 사람들의 체온이 남아 있는 증언이다. 발굴조사 현장에서 작은 조각 하나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떨림처럼, 이 기록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여기에도 삶이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이 땅을 지키려 했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 아래에서 끝없이 이어졌던 이야기들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연건동의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 우리가 사는 도시가 결코 우연의 층위 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역사는 늘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고, 우리는 다시 그 숨결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따뜻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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